2017.6.24 토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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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아버지 後農, 정치적 상상력 물려줘”
김영호 지역위원장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서대문을 지역위원장
“DJ, 나를 아들처럼 대해…치밀하고 기획력이 강한 정치인”
“20년 내 무조건 남북통일, 미·중·러와의 외교전 가장 중요”
“나는 재벌의 비리나 유통독식, 골목상권 침해에 강경하다”
2016년 02월 27일 (토)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시원시원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영호 서대문을 지역위원장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갑작스런 인터뷰 요청에 어떤 질문을 할 거냐고 물어봄직도 한데, 그냥 오시란다. 선거가 임박해 바쁘지 않냐고 했더니 어차피 평소에도 똑같이 바쁘다며 웃는다.

궁금증이 일었다. 후농(後農) 김상현의 아들, 한국인 최초로 북경대에 입학한 중국통, 지난 총선 최소득표차(0.8%) 석패. 김 위원장에 대해 세간에 알려진 바는 주로 이 정도다. 신상 하나하나가 소위 ‘임팩트’ 있다. 김 위원장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 위해, <시사오늘>은 지난 22일 남가좌동 시민카페 ‘길’의 문을 두드렸다.

   
▲ 평소나 선거 때나 큰 차이가 없다며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서대문을 당협위원장.  ⓒ시사오늘

-선거가 다가와서 바쁘지 않은가.

“물론 바쁘다. 하지만 선거 때라고 해서 유난히 바쁜 것은 아니다. 평소에도 늘 주민 분들을 만나고 다닌다. 그래서 내가 가면 ‘선거철이 되니까 기어나왔냐’고 면박을 주는 분이 지금껏 단 한분도 없다.”

-화제가 됐던 재래시장 장보기 운동의 효과인가.

“그 부분도 크다. 재래시장은 내 최대의 지지기반이다. 매월 둘째 넷째 화요일마다 장을 보니까 두 주에 한번은 뵙는 거다. 한 나이든 상인 분은 얼마 전에 ‘다른 후보들이 많이 나와서 불쌍해서 죽겠다’며 내 손을 잡고 울기도 하셨다. 지금 다른 후보들은 시장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시장 분들은 좀 거칠지 않나. 하하.”

-처음에 재래시장 장보기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뭔가.

“지난 총선 때도 재래시장을 많이 찾았다. 낙선하고 한 두어달 있다가 오랜만에 인사나 드리려고 시장에 갔다. 그랬더니 상인들이 절 보더니 ‘또 선거가 있냐’고 묻더라. 그래서 ‘없는데요’라고 대답했더니 ‘진짜 선거 없는 거야? 그럼 왜 왔냐?’고 약간 퉁명스런 어조로 말씀하시더라. 돌아와서 당 여성당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밥 먹고 사는 건데, ‘우리 같이 재래시장서 정기적으로 장을 보자’고 했다. ‘정(精)바구니’라고 부르는 가방도 만들었다. 많게는 100여명, 평상시엔 2~30여명이 함께 장을 본다. 그렇게 3년 정도 다녔다.

그러면서 작은 실천이 불신의 정치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새정치’는 별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것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시장에 자주 가니 물가도 당연히 잘 알게 됐다. 게다가 미처 모를 수 있는 여성 당원들의 사정 같은 것도 공유하게 되고 하니까 당원 관리에도 이만한 게 없다. 그래서 문재인 전 대표님께 말씀도 드렸다. 나만 서대문에서 할 게 아니라, ‘우리 당이 전국적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문 전 대표님도 ‘참 좋다’고 하셨는데 결국 실행되진 못했다.”

-재래시장에 애정이 많아 보인다.

“우리 더불어민주당이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재래시장 상인이나 중소기업인, 택시기사 이런 분들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더불어민주당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한번은 어느 아파트 부녀회가 와서 대형마트 유치를 공약하면 몰표를 주겠다고 했다. 그래야 아파트 값이 오른다는 거다.

그래서 그건 새누리당에 가서 말씀하시라고 했다. 그랬더니 낙선시키겠다는 말까지 하더라. 대형마트가 시대적인 트렌드인 것은 알겠는데, 나까지 나서서 유치할 수는 없다.”

   
▲ "더불어민주당이 운명을 같이 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재래시장 상인이나 중소기업인, 택시기사 이런 분들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더불어민주당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시사오늘

“아버지 후농(後農) 김상현, 내게 정치적 상상력 물려줬다”

김 위원장은 야권의 원로 인사인 김상현 전 국회의원의 아들이다. 이름보다 호(號)인 후농으로 더 많이 불리는 김 전 의원은 한국 민주화와 현대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오른팔인 동시에, 故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탄생시켰다.

-부친이 후농 김상현 전 의원이다. 사이는 어떤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참 어려웠다. 정치하시느라 얼굴도 잘 못 뵀다. 소위 ‘가정적이지 않은 분’이었는데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은 집에 아버지 손님이 오셨는데 ‘아들이 몇 살이냐’고 묻는 거다. 아버지가 ‘17살인가, 18살인가’ 하시기에 내가 ‘21살입니다’라고 대답하니, ‘아따, 니가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했냐’고 놀라셨을 정도였다.”

-후농은 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유명했다. 김 위원장도 DJ와 친밀한 사이인가.

“물론이다. DJ를 비롯한 동료 정치인들이 우리 집에 종종 오셔서 식사도 하시고, 약주도 하시고 그랬다. 가족이 배석할 자리는 아니었지만. DJ와는 내가 6살 때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감옥에 가셨을 때다. DJ가 원내총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나를 신촌 형제갈비에 데리고 가셨다. 내가 혼자 여섯 대를 먹었다. 그리고 조선 호텔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그래서 1997년 대선 직전 중국에 오셨을 때, 내가 유학생들까지 데리고 나가 공항에서 DJ를 환영했다.

그랬더니 사람들 있는 자리서 ‘영호 얘가 여섯 살 때 내가 갈비를 사줬는데, 원내총무 지갑을 다 털었다. 이 친구 밥 사주려고 하면 돈을 두둑이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농담하시더라. 그러면서 ‘지금도 고기 많이 먹냐’고 물으셨다. 돌아가시기 4개월 전에도 찾아가서 뵀는데 또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 그리고 투석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털어놓으시던 것도 기억난다.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다.”

-하지만 나중에 후농과 DJ는 충돌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DJ선생님은 아주 다른 스타일의 정치인이다. 아버지는 정치란 감동과 반전, 그리고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순발력이 강한 스타일이었다. 반면, DJ는 기획력이 강하고 치밀한 성격이다. 그런 아버지 입장에서는 DJ가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을 거다. 과거 신민당 전당대회 때도 아버지가 DJ에게 ‘형님, 이철승과 김영삼(YS)이 나오는데 왜 안 나오십니까?’라고 하자 ‘나는 이름도 돈도 없지 않나’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형님, 명분만 있으면 이름도 돈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설득했다고 들었다.

제15대 대선 때는 동교동계에서 DJ를 그냥 추대하려고 하자, 아버지가 반대했다. ‘지금 여론이 좋지 않은데 이렇게 만장일치로 추대하면 결국 DJ를 대통령으로 못 만듭니다. 형님, 저라도 이기고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를 이기고 가면 형님이 더 강해지는 것이고, 제가 이기면 그 또한 반전이 주는 감동으로 우리 당이 이기는 길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같으면 사약을 내릴 일이다. DJ가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였어도 인간적으론 아버지에게 섭섭해 하셨다.

결국 아버지는 공천을 못 받으셨다. 내가 기자생활 할 때인데 이미 ‘김상현 공천 못 받는다’는 이야기가 기자들 사이에서 파다했다. 믿지 않으시더라. 결국 TV속보 자막으로 뜨는 것을 보시면서도 믿지 않으셨다. ‘저거 예측 기사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지금 발표한 거라고 말씀드렸다. 결국 비서들과 나가서 식사하고 들어오시면서야 인정하셨다. 상심이 크셨다. 그 때 하신 말씀이 ‘내가 물구나무 서서라도 국회로 돌아간다’였다. 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아버지는 ‘DJ만큼 똑똑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평하셨다. DJ를 평생 인간적인 형님이자 정치적 동지라고 생각했다.”

-DJ가 후농을 정치적으로 견제했다는 이야기는 뭔가.

“DJ가 대통령이 되고서 아버지에게 ‘자네와 나의 애증의 관계는 끝났네. 이제 우리의 꿈을 이뤘으니 자네의 꿈을 펼치소’라고 말했단다. 그때 아버지 꿈은 당 대표였다. 그런데 당시 청와대에서 당내 중진들을 만난 DJ가 벽에 걸린 과일 그림을 가리키면서 ‘어이, 후농을 조심해. 저기 있는 과일도 빼먹을 사람이야’ 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그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후농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거냐고 뒤에서 한마디씩 했다고 한다. 그냥 아버지의 정치적 상상력을 부각시킨 일화라고 본다.”

-김 위원장도 아버지의 정치적 상상력을 물려받았다고 보나.

“내게도 그 피는 흐르는 것 같다. 상상력은 정치를 새롭게 하는 힘이다. 생각해놓고 실천을 안 해서 정치가 정체되는 것 같다. 아버지는 적극적인 실천을 시도하신 분이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통일마라톤을 기획하시기도 했다. 거의 성사 단계에서 김정일 때 북한 군부가 도와주지 않아서 못 한 거다. 내가 지금 구상하는 ‘가좌역 신(新) 실크로드 종착역’ 구상도 비슷하다. 현재 중국의 최대 프로젝트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연장선이다. 내가 아는 중국 관료에게 이 발상에 대해 말해 봤다. ‘대륙의 시작은 한반도 아니냐, 신 실크로드가 시작한다면 여기서 하는 게 맞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도 동의한단다.

그런데 북한이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북한을 그냥 통과하고 통행료만 좀 주자’고 했다. 북한도 승낙할 거라고 봤다. 개성공단처럼 직접 사람들이 접촉하는 게 북한 체제에 더 위협이 된다. 고속철로 통과하면 사람 얼굴도 안 보인다. 그랬더니 중국 관료가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지금은 좀 멀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이런 상상력이 결국 지역을, 그리고 정치를 발전시키는 거다. 허무맹랑해 보여도 좋은 발상이면 그걸 현실화 시키는 게 진짜 정치다.”

-그러고 보니 지금 구 동교동계 인사들이 탈당하는데 후농은 움직이지 않았다.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나.

“아버지는 현직에 있을 때도 늘 통합정치를 주장했던 분이다. 분열은 안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말씀이다. 과거에 평민당 창당 당시 DJ를 따라가지 않으셨을 때도, 일부에선 ‘김상현이 YS랑 친해져서 그런 거다. 믿을 수 없다’고 공격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형님, 야권분열이 되면 절대 정권을 잡을 수 없습니다. 노태우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비극적인 사건이 납니다’라고 해서 남으신 거다. 최근 야권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한 것도 아버지의 기본 철학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아버지(후농)는 현직에 있을 때도 늘 통합정치를 주장했던 분이다. 최근 야권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한 것은 아버지의 기본 철학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사오늘

19대 총선 최소득표차 ‘석패’…“정두언, 연구 끝났다”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뭔가.

“사실 북경대를 졸업할 때도 정치보단 직장인 생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민일보> 들어가서 기자생활도 하고, 그 계열사인 <스포츠투데이>에서도 일했다. 그런데 회사에서 ‘한중문화연구소’라는 걸 부설하더니, 평기자인 내게 소장직을 맡겼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나름 ‘한중관계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자꾸 사업만 시켰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한중문제, 통일문제에 기여를 하고 싶은데 외무고시 보기에는 늦었다 싶어,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초의 중국전문 국회의원으로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서 일하는 꿈을 꿨다. 정치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모르고 한 선택이지만, 지금와서는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아버지인 김상현 전 의원이 제안한 건 아닌가.

“전혀 아니다. 내가 정치에 대해 물어도 답변을 잘 안 해 주신다. 지금껏 딱 두 번 답을 들었다. 정계에 발을 들이고 17대 총선 전에 이름도 없던 신당인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 사이에서 고민할 때, 우리 형이 ‘네게는 후농이라는 좋은 스승이 있지 않느냐’며 아버지께 물어봐서 해법을 찾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 때 아버지는 ‘네 판단에 따르라’고만 답하셨다.

그 다음엔 출마결심을 하기 위해서 물었는데 그 땐 ‘돈은 있냐?’라고 되물으시더라. 한 때 세간에 ‘내가 아버지 말을 안 듣는다’, 혹은 ‘한명숙 전 대표가 공천을 안주려고 했는데 김상현이 가서 책상을 뒤집으며 화를 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루머가 있지 않았나. 차라리 그 정도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내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에 가까울 정도로 무심하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지역구였던 서대문갑이 아닌 서대문을에서 정치를 하고 있나.

“그런 건 아니다. 원래 나는 서대문갑에서 준비했다.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하는데,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합쳐져서 통합민주당이 됐을 때다. 18대 총선을 앞두고 서대문갑에 공천신청서를 냈는데 사무총장 전화가 왔다. 서대문을로 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왜냐고 물으니 손학규 전 대표의 지원을 받는 우상호 대변인이 온다고 했다.

나는 ‘우리 당의 입인 우상호 선배가 서대문을로 가야 MB맨 정두언 선배와 게임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버텼다. 또 우상호 선배를 만나서 ‘형이 을로 가시면 안됩니까’했더니 현역 국회의원은 지역구 옮기는 게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더라. 그냥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이 오히려 좀 더 편해지더라. 갑구에 있을 경우에 혹시 불거질 지역구 세습논란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아버지 그늘에서 나와 내 정치를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서대문이야 내가 50년 살아온 내 고향 아닌가. 하지만 선거 보름 정도를 앞두고 명함도 없이 서대문을에 왔을 때는 막막했다.”

-그 결과 정두언 의원과 두 번 붙어서 패했다.

“정두언 선배는 초등학교 선배다. 그래서 친하지는 않지만 서로 좀 알았다. 그렇게 선거에 강한 사람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당에서 내노라 하는 거물급 인사들로 여론조사를 붙여봤는데 죄다 패하는 걸로 나왔다. 당시 소위 ‘핫’했던 분들도 20%에 못 미치는 걸로 나왔다. 그런데 보름 전에 온 내가 32% 나왔다. 당에서도 18% 정도 예측했는데, 엄청난 수치다.”

-다시 붙으면 이길 자신은 있나.

“물론이다. 정두언 선배는 연구가 끝났다. 몇 번 붙어봤기 때문에 제일 잘 안다. 나는 서대문도 제일 잘 안다. 1대1 구도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18대 총선서 공천 받자마자 뉴타운 지역에 갔다가 정두언 선배를 만났다. 정 선배가 하는 말이 ‘공천은 받았나? 사무실 없으면 나랑 같이 써’라고 하더라. 순간 기분이 상했다. 속으로 ‘이번엔 어렵겠지만 다음엔 꼭 이기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떨어진 뒤에 진짜 열심히 했다. 서대문의 각종 경조사, 단체 행사 참석을 빼먹은 적이 없다. 뉴타운 공사 때문에 모기들이 엄청 많이 나타났다. 그때 모기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여름 내내 방역작업을 했다. 이것도 열심히 하니까 공중파 프로그램들이 방송하더라. 여하튼 원외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 같다.

19대 총선 약 두 달 전 아침에 어느 모임 인사를 갔는데 정두언 선배가 머리가 떡이 돼 가지고 인사를 하더라. 그러다 나를 보고 ‘야, 엥간히 좀 뛰어라. 나 힘들다’고 얘기하더라. 그 순간 에너지가 갑자기 가득 차올라왔다. 바로 이거다. 난 더 뛴다. 한발 더 뛰자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지난 선거에선 내가 아직 부족해서 625표, 0.8%로 차로 졌는데, 원래 정몽준 정두언 이재오가 서울에서 가장 강한 새누리당 ‘빅3’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왔으면 수 천표 차이로 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엔 이긴다. 다만 변수로 국민의당의 등장과 야권 표 분열이 마음에 걸리는 정도다.”

-1대1 구도가 되려면 우선 당내 경선을 거쳐야 한다.

“계보 없는 정치는 참 외롭다. 난 아직도 계보를 타본 적이 없다. 그래도 지난 19대 때 7명의 예비후보가 신청했는데, 전직 국회의원도 계셨지만 전부 더블스코어로 이겼다. 그런데 당시 한명숙 대표가 천정배 의원이랑 여론조사를 붙였다. 이겼다. 그러더니 김한길 전 대표랑 붙였다. 또 이겼다. 다 이겼더니 이번엔 야권단일후보로 통합진보당 후보를 붙였다. 그것마저 이겼다.

지금 경선에 나온 분들이 내게 기회를 두 번 줬으니 이제 된 거 아니냐고 말하는데, 나는 처음에 전략공천으로 서대문을에 와서 죽도록 뛴 사람이다. 그리고 당에서 차례차례 보낸 인물들도 다 꺾고 가장 적합하다고 해서 나갔다. 내가 여기서 10년을 뛰었다. 일단 주민들이 다 동의해준다. 경선서는 그런 부분을 믿는다.”

-계파가 없어서 당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은 건가.

“계파문제라기보다 당에 서운한 부분이 있었다. 당에서 자꾸 서대문을이 열세지역이라고 발표했다. 반대로 새누리당은 자꾸 우세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대개 박빙이다. 대충 반반 정도로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지는 여론조사만 발표하느냐고 당에 따졌더니, 지고 있는 여론조사를 내야 동정표가 더 나온다는 궤변을 내놓더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언론에서 화제의 지역이나 격전지로 한 번도 안 나오더라. 정치신인은 언론 노출이 적어지면 점점 불리해진다. 결국 서대문갑보다 투표율이 2%이상 적게 나왔다. 시쳇말로 ‘듣보잡’후보가 나왔으니, ‘찍어도 안 될 텐데 놀러가자’고 돼 버린 거다.”

   
▲ "정두언 선배는 연구가 끝났다. 몇 번 붙어봤기 때문에 제일 잘 안다 1:1 구도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시사오늘

한국인 최초 북경대 입학한 ‘중국통’…“20년 안에 무조건 통일, 준비해야”

-한국인 최초 북경대 입학생이다. 처음 중국 유학의 계기는 뭔가.

“지금은 한류가 있지만, 내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만 해도 우리 사회에 홍콩 바람이 불었다. 홍콩영화도 많이 봤고, 삼국지 같은 것도 좋아하고 해서 중국 문화에 관심이 좀 있었다. 하지만 유학 생각까진 없었고 대만에 중국어를 배우려고 6개월 쯤 갔다가 친구가 대만 대학에 가겠다고 해서 따라갔다. 그 자리에서 얼결에 나도 입학면접을 보고, 언어 방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서 처음엔 대만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거다. 그런데 대만과 수교가 단절되며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 당시만 해도 중국은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유학 생활은 어땠나.

“막상 가보니 사회주의 분위기가 있었다. 도로는 큰데 차는 얼마 안 다니고, 제복 입은 여성 교통경찰관이 경직된 분위기 속에 서 있고. 입학 당시만 해도 북경대 학생들과 사상이나 체제와 관련된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한참 공부를 하다 보니까 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선거가 없지만 지도자 교체는 합리적으로 이뤄진다. 그 과정도 상당히 과학적이고, 현장 중심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다.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중국만의 정치과정이 있더라. 북한과는 아주 다르다. 북한이 중국을 모방하다가 중국이 개방을 하니까 따라하지 못하고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더욱 변질된 모습이 지금이다. 중국의 일당독재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 나름의 특색있는 사회주의가 있다는 것을 졸업할 때 즈음에 알게 되더라.”

-최근 남북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데, 중국의 입장은 어떨 것 같나.

“중국 지도자나 국민들은 북한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한다. 오히려 북한의 정서를 이해 못한다. 하지만 중국의 북한 감싸기는 외교전술의 일환일 수 있다. 지난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치러질 때다. 그런데 연평도 포격 도발이 일어났다. 아는 중국 관료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주 불쾌해 했다. ‘북한이 이럴 수가 있느냐, 이웃집 잔치하는데 불 지르는 꼴이다’, 하면서 화를 내더라.

그런데 2~3일 있다가 통화할 때는 또 입장이 바뀌었다. 애매모호하게 북한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을 돌리더라. 미 항공모함이 서해로 들어오고 하면서 중국은 미국과의 군사적 대립때문에 한국을 지지할 수 없게 되는 모양이었다. 미·중 간 첨예한 갈등 사이에 한국이 끼어있다. 그래서 이미 진작에 경제나 문화면이나 중국의 지지는 북한이 아닌 한국 쪽에 기울어 있는 상태이지만, 미국과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거대 강대국 사이의 나라로서 등거리 외교를 지혜롭게, 양국을 설득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20대 국회에서는 중국을 잘 아는 정치인이 나타나서 우리 입장을 부지런하게 설득해야 한다. 미국과의 사이도 잘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수출이 80% 이상인, 외교력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나라다.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나라인 탓에 생긴 운명이고, 줄타기 능력은 우리의 국력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을 감정적으로 결정지으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대신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 간에 교류를 늘리고 점점 가까워져야 한다. 그래서 한중 시민연대를 만들었다. 중국에선 독도를 죽도라고 일본식으로 부른다. 우리도 조어도를 센가쿠 열도라고 일본어로 부르지 않나. 서로 이걸 독도로, 조어도로 고쳐 부르기로 하고 있다. 그리고 소녀상 지키기를 같이 하자고 했다. 중국 측에서도 100% 동의했다. 지금 하면 선거철 쇼처럼 보일 것 같아서 총선 뒤에 하려고 준비 중이다. 그 땐 한중 시민단체를 모두 모아 반(反) 아베정서를 만들 거다. 반일정서가 아니다. 평범하고 선량한 일본 국민들을 자극할 이유도 생각도 없다.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아베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다.”

-박근혜 정부는 중국에서 어떻게 보고 있나.

“MB정부는 중국이 확실하게 싫어했다. 친미정부라고 생각했고, 중국의 일반 국민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 2009년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장례일정을 중국 CCTV에서 생방송으로 보도했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이게 다 MB정부에 대한 불만 표출이라고 본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초반에 인기가 아주 좋았다. 우선 동아시아에서 탄생한 여성 대통령이기 때문에 좋아했다. 중국도 우리와 정서가 비슷한데 여성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다. 다음으로는 중국어를 잘 하는 대통령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내가 아는 한에서 박 대통령의 중국어 실력은 초보 수준이다. 5분에서 10분도 대화 못 할 거다.

내가 본 실력은 그랬다. 그런데 칭화대에서 중국어 연설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잘했다. 발음이 웬만한 대학교수들 수준이었다. 어떤 연습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우리 당에서 그 연설을 좀 폄하한 적이 있는데 그건 잘못이었다고 본다. 잘 한건 잘 했다고 해야 했다. ‘기대 이상이었다’정도면 좋았을 것 같다. 그래서 중국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는데, 그것도 작년까지 일이다. 사드 배치 문제가 불거지고 대북 강경책을 연이어 펼치면서 ‘역시 박근혜 정부도 미국에 치우친 친미정권 아니냐’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통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20년 내로는 무조건 통일이 된다. 아마도 북의 급변사태로 인한 통일일 것 같다. 김정은이 지금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주 설득력있어 보인다. 자꾸 현지지도를 다니고 정치자금을 군에 쏟아붓는다고 한다. 순방으로 사단장 마음을 사고, 장병들 마음을 사며 강경파를 잠재우는 중이라는 거다. 급변사태의 위험이 크다는 이야기다. 만약 통일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타이밍에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급격히 온다면 큰 문제다. 중국과 미국만의 테이블에서 결국 과거 얄타 회담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남북 간의 일임에도,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의 외교전이 가장 중요하다.”

   
▲ "중국 지도자나 국민들은 북한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한다. 오히려 북한의 정서를 이해 못한다. 하지만 중국의 북한 감싸기는 외교전술의 일환이다" ⓒ시사오늘

“서대문에서 10년 뛰었다, 핵심은 지하철과 학교”

-지금 서대문을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지금껏 선거에서 건물을 짓겠다, 다리를 놓겠다, 이런 공약을 내본 적이 없다. 거의 다 입법공약이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왜 비전을 제시하지 않느냐고 물으시더라. 입법공약은 아무래도 다가가기 어렵다고 봤다. 그래서 지금 서대문의 가장 큰 문제들을 생각했다. 우선 지하철역이 한 군데도 없다. 그래서 지하철 공약을 걸었다. 많은 전문가들과 상의해서 8km짜리 지선을 끌어놓으려고 한다. 신분당선 세검정에서 시작해 디지털미디어시티역까지 가는 노선이다. 보통 1km에 1200억정도 되는데, 이건 민자유치도 가능하다. 국내 기업들이 안 된다고 하면 중국 완다기업 같은 곳과 접촉할 계획도 있다. 지하철이 도입되지 않으면 서대문을은 영원히 낙후된 동네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시민카페가 있는 길이 서대문을 제일의 번화가다. 모든 후보 사무실이 다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은 세 군데 뿐이다. 다음으로는 교육문제다. 19대 총선 때 초·중·고 혁신학교를 도입하려고 했는데, ‘전교조가 판을 친다’는 반발이 있어 가재울초등학교만 도입했다. 원래 허용된 게 7반까지였는데, 학생이 몰려서 13반까지 늘려야 했다. 혁신학교 추가 도입 등을 통해 과밀화를 해결하고 교육 질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여긴 화교들이 다니는 중국인 학교가 있다.

이건 우리 서대문을의 자산이다. 중국인 학교는 보통 방학에는 기숙사를 다 비운다. 이걸 이용해서 운동장에 중국어 마을이나 캠프도 열고, 서대문을 학교 지역과 교류도 확대하면 좋다. 그러면 중국어를 유창히 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중국문화를 접하고 글로벌 시대에 서대문구의 학생들이 세계로 가는 발판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중국 대사한테 물어봤더니 적극 지지를 표하며 교재 등을 지원할 의사도 있다고 했다.”

-화교 학교가 있을 만큼 서대문을엔 화교들도 많이 산다고 알고 있다.

“학교가 있어서 많이 사는 거다. 화교들은 일반 외국인들이랑 달리 거주한지 100년이 된 이웃이다. 얼마 전에 독감주사 무료접종소에 인사를 하고 다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나쁜 놈들!’하면서 욕을 하고 나가더라. 그러더니 중국어로 혼자 욕을 하시길래 ‘아 화교구나’ 하고 내가 중국어로 왜 그러시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중국인이냐고 해서 ‘아니오,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예방주사를 맞으러 왔다 거부당했다고 했다.

자기는 세금을 다 내는 사회구성원인데, 왜 주사도 못 맞게 하냐고 하더라. 그래서 우리 구청장한테 얘기했더니 화교들 독감예방주사를 허용했다.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나서 화교 어르신들의 무료승차도 가능하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예산도 모자란데 화교한테 쓸 돈이 있냐고 묻지만, 그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이다. 거기 소모되는 예산보다 얻게 되는 국익이 더욱 크다.

그리고 지하철 타는 화교 노인들은 얼마 되지도 않아 큰 부담도 아니다. 내가 그래서 박 시장님께 말했다. 며칠 있다가 북경시장을 초청해서 만나실 때, 꼭 얘기하십시오. ‘서울시에 있는 화교분들 복지혜택을 아무도 못 했는데 내가 했다. 북경에 있는 한국 교민들도 이런 혜택 받을 수 있게 배려 좀 부탁드린다’고 말해보시라 했다.”

-주민들의 화교들에 대한 반감이 좀 있지 않은지.

“시끄럽다는 선입견이 있다. 자본력으로 한국 부동산을 매입할 것이란 두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공존의 차원에서 접근을 해야 한다. 화교 타운을 만들자, 카지노를 들여오자 이런 이야기가 나온 적도 있었는데, 이런 건 주민들이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어떤 일이든 주민의 동의 없이는 해서는 안 된다. 대신 화교역사박물관을 유치하는 것을 고려해볼 만하다.

화교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고, 서대문의 관광명소가 될 수 있다. 환경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돼야 가장 좋다. 마침 서대문을은 예전에 중국 사절들이 다니던 길로, 대륙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역사적 배경도 있다.”

   
▲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시도됐으면 좋겠다 하는 분은 진보를 택하시면 된다. 그런 면에서 난 진보다. 나는 안보나 외교 쪽으로는 유연하지만 재벌의 비리나 유통독식, 골목상권 침해 같은 것에는 아주 강경하다" ⓒ시사오늘

“내 정치 소신은 ‘실사구시’…보수와 진보의 가치 다 들어있다”

-끝으로 본인의 정치적 소신을 간단히 말해 달라. ‘중국통’답게 사자성어로 해 줘도 좋겠다.

“실사구시(實事求是)다. 혁신이나, 진보 같은 단어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진보라고 내세우면 보수적인 사람은 반대한다. 실사구시는 과학적인 얘기다. 가장 실용적인 걸 탐구해서 결과를 내자는 이야기 아닌가. 보수와 진보의 가치가 여기 다 들어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 내게 묻는다. ‘너는 진보냐, 중도냐 아니면 보수냐.’ 나는 학자가 아니라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삶이 너무 편안하고 행복해 바꾸고 싶지 않으면 보수를 택하십시오. 아예 판을 뒤집고 싹쓸이하고 싶으신 분은 노동당 같은 곳을 찍으십시오. 하지만 지금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시도됐으면 좋겠다 하는 분은 진보를 택하시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전 진보입니다.’ 나는 안보나 외교 쪽으로는 아주 유연하다. 그러나 재벌의 비리나 유통독식, 골목상권 침해 같은 것에는 아주 강경하다. 만약 국회에 들어가면 경제민주화를 강하게 주장하고, 공정거래위원회를 강화할 생각이다. 자꾸 엉뚱한 데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투쟁의 전제조건은 국민의 동의다. 나는 주민들이 원할 때 얼마든지 거리의 투사가 될 것이다. 그 배경에 있는 내 정치소신이 바로 실사구시다.”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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