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와 '세련된' 야권
스크롤 이동 상태바
필리버스터와 '세련된' 야권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6.02.29 0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자수첩> 얼굴도 몰랐던 정치인에 '실버수미' '한숨요정' 별명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오지혜 기자)

▲ 지난 28일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를 방청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한 시민들 ⓒ 뉴시스

지난 주말, 필리버스터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해 야권이 며칠째 이어가고 있는 필리버스터를 직접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국회를 찾았다.

마침 지난 28일 오전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기자는 평소와 달리 활기를 띠는 국회 분위기에 4층을 올라가 봤다.

방청석 옆 휴게실 자리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휴게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는 국민의당 권은희 의원이 발언을 이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로 왔는지 묻자, 아이들은 단어가 잘 기억나지 않는지 조금 쑥쓰러운 표정으로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국내 정치권에서 필리버스터는 47년 만에 재등장했다.

115시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이번 필리버스터 릴레이는 한국 국회 사상 처음이어서 시민들에게도 '진풍경'이다.

더민주 김광진 의원이 지난 23일 저녁 첫 스타트를 끊고 은수미 의원이 바통을 넘겨받으면서 필리버스터에 대한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정치권만의 이슈가 아니었다. 유명 포털사이트에도 며칠간 필리버스터가 상위권 키워드에 랭킹됐다.

그간 다수 여당이 무리하게 법안처리를 시도할 때마다 야권은 폭력적 저지나 장외농성을 택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두꺼운 자료집을 박스째 담아 비장한 각오로 국회 연단에 섰다.

발언 중에는 끼니는 커녕 화장실도 못 간다고 한다. 게다가 발언 내용은 본회의에 상정된 법안에 제한된다. 성경을 읽고 축구시합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미국 국회보다 조금 더 엄격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발언시간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수다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리적인 부분을 참아가면서 홀로 이야기를 이어간다는 것은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은수미 의원이 지난 24일 10시간이 넘는 발언을 마치고 본회의 연단에서 절룩거리며 내려왔을 때, 동료 의원들이 안아주자 눈물을 보인 것도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해 버텨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AP와 로이터통신 등 해외 언론도 '세계에서 가장 긴 필리버스터'로 주목했다.

로이터는 지난 28일 "야당은 테러방지법이 통과된다면 개인의 자유를 위협할 거라고 본다"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등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필리버스터 풍경을 전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원시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기자가 보기에 이번 필리버스터 릴레이는 그간 야권, 특히 운동권 중심으로 흘러갔던 저지방식 중 가장 '세련'되고 '합법적'이다.

▲ 필리버스터 방청을 위하 줄 선 시민들 ⓒ 뉴시스

'필리버스터 효과'는 테러방지법 내용에 대한 관심에 그치지 않고, 연설을 위해 연단에 섰던 야권 의원 개개인으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더민주 소속 은수미 의원과 강기정 의원, 정청래 의원에 쏟아진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정 의원은 그간 SNS와 팟캐스트를 통해 젊은세대에 이름을 알린 정치인이었던 반면, 은 의원과 강 의원의 경우는 각각 비례대표와 지방을 지역구로 두고 있어 비교적 대중인지도는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시간 필리버스터를 통해 의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상황을 바꿨다.

'실버수미' 은 의원의 필리버스터 연설 마지막 부분은 SNS를 통해 크게 회자됐다. 다음은 일부분을 옮긴 것이다.

"참된 용기, 왜 가지게 되는지 정치인에겐 참 중요한 자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선 비례인 저, 제가 더 용기를 내면, 그래서 내린 결론은 (제 나이가) 20대 때 간절한 것 이상으로 간절하다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 청년들이 누구를 밟거나 누구에게 밟힌 경험만으로 20대를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청년'으로 네이버 검색을 해봤더니 검색어 1위가 '알바'가 아니라 '글자 수 세기'예요. 회사를 지원하는데 소개서를 1000자 이내로 써라, (그래서) 글자수 세기 프로그램을 씁니다. 청년 하면 떠오른 키워드가 '젊음', '정열', '축제', '사람', '욕망'이 아니고, 그런 모습으로 (청년을) 살게 해선 안 됩니다. 특히 자기의 인권과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뿐 아니라 타인의 권리도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미래가 그렇게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 한 명도 인권을 훼손당하지 않고 자기 운명을,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 2012년 이후 박근혜 정부에게 요구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 것 같지만 저는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인터넷에 '청년'을 검색하면 '글자 수 세기'부터 나온다는 현실진단과 인권을 보호하고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은 의원의 주장이 젊은세대 중심의 SNS상에서 큰 반응을 얻은 것으로 풀이된다.

강기정 의원의 연설에서는 기존 '운동권 세대'에 대한 반성이 주목받았다.

지난 25일 9번째 주자로 나선 그는 깊은 한숨을 쉰 후 "19대 국회에서 국회선진화법이 개정되기 전 본회의장에서 몸싸움을 자주 했다"면서 "그때는 필리버스터 같은 수단이 없었다. 점잖게 싸울 수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19대 국회는 그런 싸움도 없고 참으로 행복한 국회였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이어 "이렇게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국민으로부터 폭력의원이라고 낙인찍히지 않았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강 의원은 당의 전략공천 방침으로 4·13 총선에서 사실상 공천배제된 바 있다.

물론, 필리버스터 릴레이에 대해 "정치인들의 한탄까지 봐야하냐"며 '국민적 피로감'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북한의 위협이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와중에 국회 정상화가 우선"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지난 주말 꽉 메운 방청석은 분명히 긍정적 신호다. 정치권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다. 필리버스터를 주도한 야권에 호재인 셈이다.

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필리버스터를 '우리들만의 파티'로 남겨둬서는 안 된다. 테러방지법의 원안과 수정안의 차이, 국정원의 위험성 등에 대한 관심도 이끌어내야 한다. 또 본회의 일정이 얽혀있는 선거법 처리를 위해 출구전략도 미리 짜두어야 한다.

앞서 국회사무처는 "여야가 합의하면 필리버스터 중간에 선거법을 처리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지만, 여당은 "테러방지법의 원안 통과가 먼저"라며 합의를 거부한 상태다.

총선을 44일 남겨두고 있는 가운데, 필리버스터는 지리멸렬한 야권이 국민들과 다시 소통할 수 있게 만든 새로운 기회다. 출구전략까지 세심하게 세워 국민들에게 '세련'되고 '합리적'인 야권으로 눈도장 받을 타이밍이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本立道生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