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우리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주어진 절대적 사명임과 민주주의는 오직 국민의 투쟁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는 것임을 선언한다.”
1984년 5월 18일, 김녹영 전 의원의 ‘민주화 투쟁 선언’ 낭독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탄생했다. 민추협은 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상도동계와 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동교동계가 힘을 모아 결성한 것으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끈 단체다. 그리고 민추협의 탄생을 세상에 알린 장소가 바로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였다.
외교구락부는 1950~60년대 민간인이 경영한 최초의 양식당(洋食堂)으로 기록돼있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었다. 1949년 윤치영 전 내무부장관을 비롯한 정·재계 인사들이 뜻을 모아 문을 연 이래, 정치 외교계의 사교 클럽으로 기능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단골’이라고 할 만큼 자주 드나들었고, 박 전 대통령은 6관구 사령관 취임식을 이곳에서 갖기도 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당대의 ‘실력자’들도 외교구락부를 즐겨 찾았다.
YS 등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야당 인사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1969년 YS가 ‘40대 기수론’의 기치를 내걸었던 곳도, 1983년 5월 18일 단식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YS는 외상으로 음식을 먹은 뒤 계산은 한꺼번에 모아서 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외교구락부의 ‘주 고객’이었다.
YS의 측근이었던 문정수 전 부산시장은 8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장택상 외무장관이 주로 이용하던 곳인데, 당시 YS가 비서로 수행하다 보니 친분이 생기고 자주 이용하게 됐다. 시설도 좋고 교통도 편리해서 소규모 집회를 하기도 좋았던 곳”이라고 증언했다.
민주화를 위해 함께 목숨 걸고 투쟁했던 YS와 DJ가 서로 돌아섰던 곳도 여기였다. 1987년 9월 29일, 제13대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담판 협상을 펼치던 YS와 DJ는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섰고, 이를 계기로 노태우 대통령 당선됐다. 그야말로 외교구락부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던 장소였다.
그러나 이 ‘역사의 현장’은 더 이상 흔적을 찾기 어렵다. 옛 외교구락부 건물을 제1별관으로 사용해온 숭의여자대학교가 지난 2009년 강의동 확장신축 계획에 따라 건물을 완전 철거했기 때문이다. <시사오늘>은 외교구락부의 현재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7일 남산을 찾았지만, 외교구락부 건물에는 카페가 들어서 있었다.
카페 옆쪽 벽에는 외교구락부에서 있었던 역사 이벤트가 정리돼 있다.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 대통령 출마선언, 야권지도자들의 유신반대성명 발표,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김영삼 신민당 총재 여야영수회담,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씨’ 회동, 김영삼 전 대통령 단식투쟁 선언, 김영삼·김대중 후보단일화 회동 등 한국 현대사를 바꾼 사건들로 빼곡하다.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표지석에 새겨진 ‘이곳은 정치, 경제, 문화계의 유명 인사들이 사랑방으로 이용하던 역사적인 장소이다’라는 문구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민주화 투사들의 사랑방이자 현대 정치의 산실이었던 이곳도 그 주인공들의 퇴장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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