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오지혜 기자)
"그놈이 그놈이지."
정치권에 대한 거리 인터뷰를 하다 보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대답이다. 정치가 소명이 아닌 직업이 돼버린 시대, 정치인은 이제 비슷한 표정으로 비슷한 주장을 늘어놓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나 국내 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행보를 걸어온 정치인이 있다. 바로 김종필 전 총리(JP)다.
JP는 여전히 봉합되지 못한 채 사회적 갈등의 씨앗이 된 산업화와 민주화 양쪽 진영에서 '거물'로 통한다. 그는 총리직도 두 번이나 역임했는데, 한 번은 박정희 정권 때고 다른 한 번이 김대중 정권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JP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군사 정변을 주도, 2인자 자리에 올랐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구금된 뒤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다. 이후 그는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3김 시대'를 여는 등 국내 정치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만년 2인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국내 정치사의 굵직굵직한 순간마다 자리해 JP 자체가 '현대사'라는 평가도 나온다.
<중앙일보>는 지난해 3월부터 10개월간 JP 자택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모아 자서전으로 출간, 이를 기념하는 자리가 1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가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세종문화회관에는 수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었다. 회관 양 끝에는 황교안 국무총리와 새누리당 이인제 최고위원,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정치권에서 알만한 이름들이 적힌 화환이 일렬로 서 있었다.
취재 열기 또한 뜨거웠다.
정의화 강창희 박관용 등 전현직 국회의장을 비롯해, 새누리당과 더민주, 국민의당 대표 모두 행사에 자리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JP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교차점'이었음을 방증한 셈이다.
19대 국회에서 얼굴을 붉히고 독설을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이날만큼은 행사 주인공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모습이었다. 나란히 앉은 정 의장과 김무성 대표, 김종인 대표, 안철수 대표는 카메라 앞에서 서로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JP는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다. 각 정당의 대표들이 다가가 인사했고, 그 역시 표정이 밝아보았다.
JP는 이날 행사에서 "이제 개발시대의 정치는 저물었다. 동료들 모두 세상을 떠났고 저 혼자 남은 것 같다"면서 "아직 제가 남아있는 게, 세상에 말 한마디 남기고 가라는 것 아닌가 싶었다"며 자서전 출간의 변을 밝혔다. 90세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한 목소리였고, 발음 역시 대체로 분명했다.
5·16 군사 정변 등 박정희 시대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의식한 발언도 나왔다.
그는 "흔히 오늘의 잣대로 과거사를 재단들 하는데, 사려 깊지 못한 생각"이라면서 "특정 시대를 관통하는 논리가 있고, 어제의 시대적 논리 위에 오늘의 논리가 성장하는 것이 역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제가 그간 본의 아니게 국민께 상처와 고통을 안겨드린 일도 적지 않았다. 용서해주시길 빈다"면서 "나이 아흔을 '인생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졸수(卒壽)라고 한다. 저 역시 인생을 졸업하며 지난날 악연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전부 용서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JP는 현 정치권에 대한 걱정도 놓지 않았다.
그는 "최근 국회가 본래의 뜻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제 귀에도 들린다. 정치권이 국민을 걱정해야 하는데 국민이 정치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며 "작은 당리당략은 뒷전에 두고 나라의 먼 장래를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JP의 바람과 달리, 이날 행사에 참석한 각 정당의 대표들 모두 축사를 통해 정치적 이해가 얽힌 발언을 이어갔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JP가 지난 1980년 '서울의 봄'을 비유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을 인용, "요새 제 마음이 춘래불사춘인데, 오늘 모처럼 오고 싶은 자리에 와 마음이 푸근해졌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는 최근 살생부 파문과 윤상현 의원의 막말 논란으로 마음고생한 일을 이르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대표는 이어 "김종필 전 총재는 대한민국이 가지 않은 길을 온몸으로 헤쳐나가는 용기를 보여줬다"면서 "저 역시 이번 총선에서 국민공천제 최초 시행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가보려고 하는데 여러가지 방해와 저항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다음으로 단상에 선 김종인 더민주 대표는 야권의 총선 슬로건인 '경제민주화'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김 전 총재는 60년대 우리나라가 빈곤에 허덕일 때 나라의 근간을 보고 경제기반을 세웠다"고 치켜세웠다. 또 "지난 1997년 DJP 연합 역시 김 전 총재의 현명한 판단으로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면서 "우리나라가 경제적 성공과 정치민주화를 함께 이룩한 사실을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야권통합 제안을 거절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김 전 총재의 '제3당 이력'을 강조했다.
안 대표는 "김 전 총재는 15대 총선에서 자민련 돌풍을 일으키며 양당 구조에 도전했다"면서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다양한 국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정치세력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여당의 막말 논란을 겨냥, "요즘 보수나 진보할 것 없이 김 전 총재처럼 낭만과 학식을 갖춘 분이 없다고들 한다"면서 "특히 김 전 총재가 정치언어의 품격을 지킨 것은 저희 정치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최근에야 그 중요성을 실감한다"고 꼬집었다.
좌우명 : 本立道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