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계 총선출정③]야권에 남은 두 명의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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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계 총선출정③]야권에 남은 두 명의 출사표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6.03.26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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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전 의원·박재호 부산남구을 위원장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오지혜 기자)

▲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전 의원과 박재호 부산남구을 위원장 ⓒ 뉴시스

YS가 지난 1995년 창당한 신한국당의 맥이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면서 상도동계는 보수진영으로 대거 흡수된다. 민주당에서 상도동계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 간판을 들고 출사표를 던진 YS계 인물은 단 두 명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전 의원과 박재호 부산남구을 지역위원장 모두 이번 총선에서 PK 입성에 재도전한다.

더민주 김영춘 전 의원은 지난 1987년 상도동계 비서진 막내로 합류했다.

부산 출신으로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영춘은 1985년 민정당사 농성사건으로 구속돼 이듬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때 김영춘 앞에 나타난 것은 YS 최측근 김덕룡(DR)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실장이었다.

김영춘은 DR의 권유로 상도동계에 입문, '젊은 브레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지난 1994년 민자당 조직책 선정 당시, 서울 성동병 지구당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서른셋의 나이로 최연소 야당 위원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 문민정부 시절 김무성 이충범 등과 함께 신경제론의 바탕이 된 '영소사이어티'에 핵심멤버로 참여했다.

DR은 문민정부 시절 사석에서 '가장 눈여겨보는 정치인'을 물어보면 망설임 없이 김영춘과 이성헌을 꼽았을 정도다. 새누리당 이성헌 전 의원은 김영춘에게 DR을 소개해 주고 비슷한 시기에 상도동계 막내로 입문했다. 이들은 16대 국회 당시 여름휴가로 해수욕장을 함께 갔다 왔을 정도로 끈끈한 관계였다.

이들의 길이 달라진 것은 김영춘이 당시 한나라당의 폐쇄적인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하면서다. 그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공천권을 독점하던 YS도 이러지는 않았다. 비주류를 인정하지 않는 이회창과 주류세력이 이대로 정권 잡으면 안 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로써 김영춘은 첫 정치 모험을 감행한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거대야당인 한나라당을 탈당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탈당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김영춘은 정계 입문부터 'DR 사람'으로 분류됐다. 탈당은 보스를 버리는 셈이 됐다. 또 당시 지역구였던 서울 광진갑이 한나라당 강세지역이었기 때문에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으로도 해석됐다. 그러나 수많은 우려 속에서도 김영춘은 성공적으로 모험을 마친다.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광진갑에 당선된 것이다.

김영춘은 둥지를 옮긴 뒤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모험을 시도했다. 그는 당시 열린우리당 최대주주였던 정동영(DY)의 비서실장을 역임, DY계로 분류됐다. 그러나 2006년 전당대회에서 DY의 협력 요청을 거절하고 '홀로서기'를 감행했다. 이는 첫 모험과도 일맥상통했다. 계파에 의지하지 않고 기득권을 버리는 것이었다. 김영춘은 DY계라는 꼬리표를 떼고 당 의장 후보로 나선 이유에 대해 "힘센 사람 잡고 지도부에 입성한들 무슨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고 답했다.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세 번째 모험도 비슷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기가 추락한 2007년, 김영춘은 열린우리당에서 더는 희망을 찾지 못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당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선후보의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구호였다. 당시 문 후보의 대선캠프는 선거를 한 번도 치러보지 않아 참여하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였다. 그러나 김영춘은 18대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을 치고 문 후보를 도왔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그는 "문 후보의 공약과 슬로건이 내 생각과 많은 부분 일치했다"면서 "인본주의적 정치를 알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정치는 계파와 지역 등 기득권 구조에 기반을 두는 게 아니라는 오랜 신념이 반영된 선택이었다.

김영춘은 이후 더불어민주당에 돌아와 PK 입성을 노리고 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정치실험은 끝났다"면서 "그간 생각해 온 정치신념을 갈무리할 곳은 부산"이라고 밝혔다. 여당 텃밭인 부산에 민주당 간판으로 출사표를 던진 것은 지역주의에 기댄 기득권을 청산하고 정치인 한 사람으로 선택받는 '김영춘 정치'의 최종판인 셈이다.

김영춘은 이번 20대 총선에서 현역인 새누리당 나성린 의원과 부산진갑에서 리턴매치를 벌인다. 이들은 4년 전 3.7%의 박빙 승부를 펼친 바 있다.

한편, 야권에 남아있는 또 다른 상도동계 인사로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부산남구을 위원장이 있다. 

박재호는 지난 1986년 부산의 대표적 YS계 정치인으로 통하는 서석재 전 의원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987년 대선 당시 부산 학생들을 이끌고 전국을 오가며 YS 유세를 도왔다. 또 1992년 YS의 비선조직이었던 '나라사랑본부(나사본)' 부산지역 책임자로 활동했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청와대에 입성, 인사재무비서관을 역임했다.

그는 DJ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으로 떠났다가 1999년 귀국했다. 자신이 모셨던 서 전 의원 지역구에 무소속 출마를 감행할 생각에서였다. 그때 우연히 '노무현의 왼팔과 오른팔'로 불리던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를 만났다. 이들은 박재호에게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합류를 제안했다.

마침 서 전 의원의 출마로 국회입성 시도가 무산돼 박재호는 노무현을 돕는 길로 갔다. 그는 3천여 명 되는 '푸른연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선거인단을 모집했다. 상도동계에서 YS를 대통령 만들기 위해 쌓은 경험들이 기반이 된 셈이었다. 

이같은 인연으로 박재호는 이광재, 안희정과 함께 노무현 정권의 일등공신으로 평가 받는다.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뒤에도 계파와 거리를 뒀던 김영춘과는 다른 점이다.

박재호는 이번 총선에서 부산 남구을에 출사표를 던졌다. 네 번째 도전이다.

박재호는 17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열린우리당 간판을 들고 남을에 출마했지만,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폄훼가 맞물려 낙선했다. 이같은 경험으로 18대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상대는 같은 상도동계 출신인 김무성이었고, 박재호는 당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붙으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에서 친이-친박 간 계파 갈등으로 '공천 학살'이 이뤄지자, 희생자인 김무성에 동정여론이 일었고, 박재호는 또다시 낙선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김무성계 새누리당 서용교 의원과 다시 각축을 벌인다. 서 의원과는 19대 총선 때 맞붙어 7.92%포인트 차이로 석패한 바 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本立道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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