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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한부산③] 박재호, “YS·노무현의 개혁정신 새겨야”
박재호 국회의원
"문민정부 초창기, 자부심 느꼈다…국민들도 신바람"
"노무현과 첫 만남, 가슴이 뜨거워졌다"
"부산 갈매기파, 내가 붙인 이름…단톡방도 있어"
"친노패권 비난, 스스로 실력 없다고 인정하는 꼴"
2016년 05월 29일 (일) 부산=박근홍 기자 오지혜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부산/박근홍 기자 오지혜 기자)

직접 만난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은 한마디로 호쾌한 '부산 사나이'였다. 힘이 실린 악수부터 거침없는 대답까지. 선수로만 보면 초선이지만 중진급의 능숙함이 느껴졌다.

상도동계 출신이자 친노(盧) 인사인 박재호 의원이 국회에 입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지역민심은 박 의원이 정성껏 쏟아부은 시간을 외면하지 않았다. 

<시사오늘>이 지난 24일 부산 남구을 사무소에 직접 방문한 자리에서 "시민들에게 인기 많더라"며 인사를 건네자, 박 의원은 "인기 뭐 많아요. 별로 없어요"라면서도 기분 좋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은 초선이지만 증진급 이상의 노련함이 묻어났다. ⓒ 시사오늘

"서석재 전 의원 비서관으로 정계 입문…조직력 배워"

-정치를 하려고 마음먹은 계기가 궁금하다. 

"유년 시절, 학교 선생님 심부름으로 동사무소를 찾았다. 서류 발급 때문에 줄을 섰는데, 관계 인사가 들어오더니 줄을 무시하고 바로 창구에 가서 서류를 발급받더라. 당시 박정희 정권 때니까 새마을운동 지도자 정도 됐을 거다. 학교에서는 준법정신을 가르치는데 실제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니까 혼란스러웠다. 고등학교 가서도 마찬가지더라.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부모님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처벌도 안 받았다. 잘못된 사회를 바꾸고 싶은데, 그 방법은 정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도동계 故 서석재 전 의원과 인연을 맺으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민우 전 총재가 신민당을 이끌었던 1986년, 서석재 전 의원 비서관으로 들어갔다. 입문하고 두 달 동안 별다른 이야기 없이 지켜만 보더라. 그때 수원에 살던 누나 집에서 출퇴근을 했는데 통근 시간이 3시간이었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서서 국회에 도착하면 8시쯤 됐다. 그러면 국회의사당 한 번 둘러보고 업무를 시작했다. 사무실에 있는 다른 선배들이 신문도 읽게 하고 회의록도 보게 하고 그랬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서야 서 전 의원과 일대일로 식사 자리에 갔는데, '지금부터 정식으로 내 밑에 있는 거다' 이러더라. 그러면서 세 가지만 명심하라고 일러줬다. 첫째는 무조건 겸손해라. 둘째는 할 말 못할 말 구별해라. 마지막으로 정직해라. 그렇게 1992년까지 6년간 함께했다."

-정치인으로서 서 전 의원에게 배운 점은.

"서석재 전 의원을 두고 흔히 '조직의 귀재'라고 하는데, 같이 있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 예를 들어, 후원금이 들어오면 명단만 달라고 하고 금액은 절대 안 봤다. 후원자 모두에게 감사해했다. 또 당시에는 의원 자택에 매일 모이는 정치 문화가 있었는데, 아침에 가보면 양말까지 다 신고 앉아계셨다. 누가 가도 예의를 차렸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당원들도 챙겼으니,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지 않나. 나 스스로도 서 전 의원 곁에서 보고 배운 점들이다. 서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됐는데, 사모님이 지난 선거 운동 때 직접 와서 도와주시는 등 여전히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서 전 의원의 영향인지, 조직력에 있어서 비슷한 평가를 받는데.

"YS 대선 때 부산지역 학생조직을 책임진 경험 덕분인 것 같다. 1987년도 대선 때는 3000여 명 되는 학생들을 이끌고 서울과 광주를 다니고 그랬다. 당시 우리 쪽 슬로건이 '군정종식'이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1992년도 대선 때는 보좌관을 그만두고, 당시 YS의 외곽 선거운동 조직이었던 '나라사랑실천본부(나사본)' 부산지역 책임자로 일했다. 그때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느꼈다."

"김무성·김영춘 등 상도동계 인사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넓은 정계 인맥도 당시 만들어졌나.

"정치권에 남은 상도동계 인사들은 거진 다 안다. 대부분 1987년부터 알던 사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 정병국 김선동 이진복 의원, 이성헌 전 의원도 그렇고, 이번에 같이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의원도 오래 알고 지냈다."

-같은 상도동계 안에서도 차이점이 있다던데.

"더민주당 김영춘 의원과 새누리당 이성헌 전 의원은 상도동 직계다. 반면 서석재 전 의원 쪽은 방계로 분류되는데, 나도 서 전 의원의 비서관으로 방계에 속했다. 직계는 보통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 많았다. 이들 대부분이 문민정부에서 일했는데, 방계 인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만 청와대에 들어갔다. 사실은 오랫동안 고생한 쪽이 못 들어간 셈인데, 당시 정치 문화는 그랬다. 어느 계열에 속하는지가 정치 인생을 좌우했지."

"문민정부 초창기, 자부심 느꼈다…국민들도 신바람"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했다. 당시 청와대 분위기는 어땠나.

"문민정부 초창기에 YS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한 번은 일부 언론에서 'YS가 국정운영을 하려면 기존 군부세력과 어느 정도 손을 잡아야 할 것'이라는 보도가 났다. YS가 그걸 보고 하나회 척결을 결심한 거다. 금융실명제 실행과 경복궁 철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청와대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 정도로 YS는 과감한 개혁을 밀어붙였다. 국민들도 신바람이 났던 것 같다. 물론, 불편해한 세력들도 일부 있었지만, 청와대는 큰 자부심을 느꼈다."

-대통령 YS를 평가한다면.

"국민들이 YS의 결단력을 꿰뚫어봤다고 생각한다. YS는 개혁이라면 어떤 장애물도 물리치고 밀어붙였다.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오는 데 문민정부 시절 개혁 사례가 토대가 됐다. 역대 대통령 모두 빛과 그림자가 있지만, 아무튼 YS는 우리나라가 이만큼 급성장하는 데 소신을 가지고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은 기존 PK의 의원들은 지역주의 프레임을 이용한 측면이 크다고 역설했다. ⓒ 시사오늘

-문민정부 임기가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 신한국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전 총재가 '03인형'을 만들어서 문민정부를 공격했는데 정말 아니다 싶었다. 도로 민정당이 됐구나 싶더라. 그래서 이 전 총재가 대선에 나왔을 때 서석재 전 의원 따라 그쪽으로 가지 않고 이인제 후보를 지지했다. 그때 서석재 전 의원에게도 직언을 많이 했는데 사실 미안함이 남는다.

이회창 전 총재 쪽에 남았으면 국회의장도 하고 더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당시 젊은 내 생각으로 문민정부는 군정종식과 민주화 정착을 위한 정권이었는데, 당시 여당은 기득권 세력을 위한 집단으로 변해있었다. 서민들이 행복한 세상이 돼야 하는데 있는 사람들 천지가 됐다는 생각에 세월을 기다리자 싶었다. 그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진짜 이유다."

-문민정부의 지역기반이었던 PK지역이 보수화된 시점과 맞물리는 것 같다.

"87년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YS와 DJ가 갈라서면서 호남과 영남의 민심이 완전히 이반 돼 있었다. 문제는 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무성 전 대표 등이 이같은 민심을 PK지역 선거에서 양껏 활용했다는 것이다. '야당 하면 빨갱이' '호남놈'과 같은 선거 프레임이 지속되면서 주민들 의식도 점차 바뀌었다. 기존에 있었던 야성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 하나는 민주 진영에 행정 전문가가 부족했던 탓에 문민정부 당시 민정당 출신 인사를 기용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보수화에 한몫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원래 민정당 출신이라 공천줄 때 나를 포함해 많이들 반대했다. 하지만 나라를 운영하려면 이들이 필요하다는 데 대부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인사들도 PK지역에 내려가 선거운동할 때면 앞서 언급한 지역주의를 활용했다. 듣기로 쿠데타가 한번 일어나면 그 문화를 바꾸기 위해 3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 부산도 마찬가지다. 그런 인식이 한번 퍼지면 세대가 바뀌어도 야성을 회복하는 데 쉽지가 않다."  

"노무현과 첫 만남, 가슴이 뜨거워졌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노무현 사단에 합류했다.

"공부를 좀 해볼까 해서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에 지원했다. 1년 8개월간 머무르다가 귀국했는데, 서울 교보문고에 들린 길에 우연히 안희정 충남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를 만났다. 사실 안희정과 이광재 역시 예전부터 잘 알던 사이다. 내가 문민정부에서 비서관이었을 땐, 이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일하던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 초청받아 들리기도 했다. 아무튼 재회했을 때 노무현이 종로구 국회의원으로 있으니까 한 번 만나보라고 하더라."

-노무현의 첫인상은 어땠나.

"사실 처음에는 만남 자체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식사 자리에서 만난 노무현의 첫인상이 참 멋졌다. 나보고 지방대학 나와서 청와대 비서관까지 참 고생했다고 하더라. 자신도 부산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로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했다. 또 KS(경기고-서울대)만 나오면 실제로는 아무 능력이 없어도 인맥으로 평생을 잘 살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잘 사는 세상이 돼야 하지 않겠냐고,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더라. 그때 내 가슴도 뜨거워졌다. 함께 정치를 하려면 이념이 맞아야 한다. 그래서 의기투합이 된 거다."

-대통령 만들기에도 역할을 맡았다.

"노무현이 16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해수부장관을 역임하던 때, 나보고 대통령 나가겠다고 했다. DJ가 반대해도 끝까지 갈 거냐고 물었더니 '내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런데 내가 직급을 맡으면 이상하게 볼 수 있으니까 알아서 할 테니 간섭 말라고 했다. 그래서 만든 게 '푸른연대'라는 조직이다. 지난 1987년도 대선 운동에서 학생 조직을 이끌었던 게 기반이 됐다."  

-처음부터 대통령감이라고 느꼈는지.

"노무현을 돕겠다고 하니까 처음엔 주변에서 뜯어말렸다. 서석재 전 의원과 신상우 전 해수부 장관은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확신을 가졌던 것은 노무현의 정치 이념뿐 아니라, 부산 내려가서 직접 느낀 3040 민심 때문이었다. 당시 이회창, 이인제, 노무현을 두고 인기투표를 하면 노무현이 일등했다. 50대까지도 노무현을 지지하더라. 그래서 오히려 내가 서 전 의원과 신상우를 설득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있으니까 노무현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아니냐고, 밖에서는 다르다고."

-이같은 인연을 바탕으로 참여정부에서도 비서관으로 일했다.

"문민정부 당시 인사정무 쪽을 맡은 경험이 있어서 실정을 파악한 상태였다. 당시 정책보좌관 제도가 수립되고 국정원 보고체계가 사라진 것도 내 제안으로 비롯된 것이다. 정책보좌관 제도는 장관의 독립성을 위해 만든 것이다. 장관이 관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면 실무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장관 곁에 정책보좌관을 둘 수 있도록 하고 임기가 끝나면 같이 나오는 조건으로 제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청와대 소관으로 보좌관을 보내 오히려 장관을 감시하는 제도로 변질됐다. 또 국정원에서 보고를 받지 않도록 한 것은 문민정부 시절 경험 때문이다. 당시 국정원에서 수많은 보고서를 받았는데 어떤 인사는 '술을 잘 마시고 호탕하다'고 표현하고, 또 다른 인사는 '술 주정이 심하다'고 썼더라. 국정원 입맛대로 인사 보고서가 작성된다는 생각이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께 말해 반영된 것이다."

-두 명의 대통령을 모셨다. YS와 노무현의 공통점은. 

"YS와 노무현 모두 부산 사나이 기질이 있다. 목표가 생기면 무조건 부딪쳐 본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목표였기 때문에 실패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 실패하더라도 시도한 만큼 가치가 남는다는 걸 알았다. 이처럼 밀어붙이는 개혁 정신 덕분에 우리나라가 한 단계 진보할 수 있었다."

"부산 갈매기파, 내가 붙인 이름…단톡방도 있어"

-지난 4·13총선에서 부산의 야(野)성이 부활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워낙 못하니까 민심이 폭발했다고 본다. 그래서 지역색 때문에 낙선했던 인물들을 대신 찍어준 것이다. PK지역에 출마한 야권 후보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고생했다. 주민들 사이에 '여기 내려와서 고생만 하고 안타깝다'는 정서가 투표로 이어진 것 같다.

첫 출마에 당선된 김해영 의원의 경우, 상대 후보였던 김희정 전 여가부 장관이 워낙에 지역 민심을 잡지 못한 상태에서 김 의원이 전문 변호사에 예의 바르게 시민들에게 다가가니까 호감을 샀다고 본다. 그런데 부산 시민들도 사실 5석이나 돼서 놀란 상태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긴장해야 한다. 이번에 잘해야지 부산이 또 야권 후보들을 찍어줄 것 아닌가.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여당 야당이 반반 정도는 돼야 부산도 발전할 수 있다." 

   
박재호 의원은 지난 총선은 새누리당에 대한 심판으로 민심이 폭발했다고 역설했다. ⓒ 시사오늘

-부산 5인방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다.

"김영춘·박재호·전재수·최인호·김해영 이렇게 다섯 명을 '부산 갈매기파'라고 한다. 처음에 김영춘 의원이 '독수리 5형제'를 제안했는데, 내가 '우리는 갈매기'라고 주장해서 바꾼 거다(웃음). 지역 현안이 생기면 자주 만난다. 단체 채팅방도 있다."

-만남은 누가 주도하나.

"지금 김영춘 의원이 부산시당위원장이니까 총지휘자 아닌가. 우리는 김영춘 의원이 하자는 대로 복종한다(웃음).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 보니까 양보도 많이 하는 편이고."

-워낙에 친한 사이니까 당권과 대권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것 같다.

"그런 이야기는 안 한다. 때가 됐을 때 나올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이르다. 무엇보다 부산 갈매기파는 그런 뜻에서 모인 게 아니다. 지역 현안에 대해 머리를 모아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한 모임이다. 물론, 대선에 대해서는 서로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갈라질 수도 있겠지. 부산에 출마하는 야권 정치인들은 공천에 대한 염려가 없으니 줄서기를 할 필요 없다. 소신껏 정치하면 되는 거다."

"친노패권 비난, 스스로 실력 없다고 인정하는 꼴"

-당내 경쟁구도에서 '친노패권' 문제가 늘 지적되는데.

"늘 하는 이야기지만, 노무현의 가치를 뛰어넘으면 친노패권이라고 비난할 필요가 없다. 당내 경선에서 떨어지면 친노패권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만큼 노무현 정신에 공감하는 당내 세력이 많다는 건데, 지니까 패권이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이기고 싶으면 노무현 정신보다 더 좋은 정치 이념을 제시하고 표를 받으면 된다. 결국 친노패권이라는 말은 스스로 실력 없다고 인정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조경태, '친노 트라우마'에 최고위원 도왔지만…새누리당서도 계륵 될 것"

-조경태 의원이 새누리당으로 떠나면서 친노세력을 비판한 바 있다.  

"새누리당으로 잘 갔다. 다들 박수를 보낸 참이다. 그런데 민주당에서 계륵같은 존재였는데 새누리당에서도 비슷할 것 같다. 본인이 원조친노라고 하는데, 처음에 노무현을 도와준 건 맞다. 하지만 중간에 배신해서 한나라당에 갔다. 하여간 복잡한 사람이다. 내가 지난 2013년 부산시당위원장으로 있을 때 조 의원이 하도 억울해한다고 들어서 최고위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왔다. 직접 문재인 전 대표 등을 찾아가 '화끈하게 도와줍시다'라고 강력 건의했다.

또 온갖 욕을 들어가면서 부산에 어지간한 위원장들을 설득했고, '조경태가 부산에서 당선된 야당의 유일한 3선 의원'이라고 서울에 문자까지 쫙 돌렸다. 최고위원이 되면 그런 친노에 대한 트라우마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최고위원이 되더니, 자기만 부산에서 의원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더라. 다른 사람은 당선되면 안 된다는 눈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트라우마가 아니라 천성이었다."

"자본주의 사회, 경제 범죄에 대해서도 엄격한 처벌 필요해"

-20대 국회가 개원했다. 상임위 활동 계획이 궁금하다.

"사실은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신청했는데, PK지역 8명이 모인 자리에서 보니 교문위 신청자가 많더라. 나이 많은 내가 하겠다고 싸울 게 아니라 양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했다. 전재수가 교문위를 하기로 하고, 김해영이 정무위원회로 틀었는데 부산 남구을에 금융단지가 있어서 머뭇거리더라. 괜찮으니 편하게 정하라고 하고 고민했다. 그리고 부산에도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의원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산자위로 정했다. 대신 서로 상임위에서 민원이 생기면 다 같이 의논하자고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현안을 알려달라.

" 우리나라에서 살인죄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법정형이 규정돼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범죄는 수많은 서민들 목숨을 끊고 집안을 파토낸다. 경제 범죄에 대한 처벌이 살인죄보다 더 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분식회계를 하면 주식이 휴지조각이 돼 버린다. 미국 텍사스 주는 한 기업의 CEO가 분식회계를 한 죄로 감형 없는 50년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돈만 있으면 빠져나올 여지가 많다. 그래놓고 국민들에게 법 지키라고 하면 누가 지키겠나. 서민을 대상으로 한 사기 범죄, 권력을 이용한 권력형 비리 등에 대한 법안만큼은 꼭 만들겠다."

오지혜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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