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무리울에서]손학규의 ‘진창 비도(陳倉 秘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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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무리울에서]손학규의 ‘진창 비도(陳倉 秘道)’
  • 권혁식 논설위원
  • 승인 2016.07.10 1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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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권혁식 논설위원)

파촉으로 들어가며 잔교를 태워 항우를 안심시킨 유방

살다보면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가 필요할 때가 있다.  ‘전략적 후퇴’라고도 한다.  성공하면 상승세를 탈 수 있지만 실패하면 영원히 낙오자가 될 위험도 있다.  초한지에서 전략적 후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유방이 항우의 명을 받아들여 중원의 서쪽 오지인 파촉(巴蜀)으로 들어갈 때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유방에게 장량은 유일한 통로인 잔도마저 “지나간 뒤에는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간언했다.  유방이 화들짝 놀라 “그럼 나보고 평생 그곳에서 늙어 죽으란 말인가”라며 이유를 묻자 장량은 “태워야 다시 나가게 된다”고만 답했다.  유방의 궁금증은 훗날 한신이 풀어줬다.  한신은 “잔교를 불사른 것은 주군이 다시는 중원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 항우를 안심시키기 위한 속임수”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항우가 방심하고 있는 동안 유방은 군사력을 키워 또다른 통로인 ‘진창 비도(陳倉 秘道)’를 통해 파촉을 빠져나온 뒤 기습공격에 성공했다.

손 전 고문의 정계은퇴는 진짜인가?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은 2년 전인 2014년 8월 30일 수원병 보선에 낙선한 뒤 국내 오지로 떠났다.  전남 강진 백련사 인근 토담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정계은퇴도 함께 선언했다.  그의 포부를 알고 있는 일각에선 반신반의했다.  과연 정계은퇴는 진짜 맞는가?  맞다면 굳이 오지로 들어간 이유는 무엇인가? 

요즘 들어 많은 호사가들이 그의 정계복귀를 점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공개적으로 그에게 복귀를 권유하고 있다.  국민의당 총선자금 리베이트 파문의 책임을 지고 안철수 공동대표가 지난 달 29일 사퇴하자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더민주에는 문재인이라는 분이 계시니 손 전 고문이 우리 당으로 와서 경쟁하는 것도 좋지 않겠나"면서 러브콜을 보냈다.  손 전 고문의 경기도지사 시절 정무부지사를 지냈던 김성식 정책위의장도 "기존 양당 체제를 극복하는 정치 혁명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데, 손 전 고문은 그러한 에너지를 충분히 갖고 계신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이어 "아마 안 전 대표도 우리 당에 좋은 분이 함께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좋아할 것"이라며 안 전 대표의 생각까지 넘겨짚었다.

정계복귀는 본인 마음먹기에 달린 듯

손 전 고문은 지난 4·13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양당으로부터 선거지원 요청을 받았을 때는 측근을 통해 “정계 은퇴의 약속과 원칙을 지키겠다”면서 거절한 바 있다.  그런데 석 달 사이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손 전 고문의 정계복귀는 아무 걸림돌 없이 오로지 본인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처럼 기정사실화하는 양상이다. 

강진행으로 ‘골리앗’의 이미지는 지웠다

손 전 고문이 오지로 들어갈 때는 적어도 과거와의 단절을 기대했을 것이다.  정치 신인과 맞붙은 싸움에서 어이없이 패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심어준 ‘다윗에서 진 골리앗’의 이미지는 지울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불명예로 끝줄을 채운 정치 이력을 갈아엎고 포맷을 새로 할 수 있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 2년 간의 칩거는 그 정도의 효과는 가져다준 것처럼 보인다.  그의 복귀 가능성이 회자해도  ‘골리앗의 패배’를 이유로 시비를 거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복귀 통로인 ‘잔교’를 스스로 불살랐다

그러나 그는 오지행와 동시에 ‘잔교’마저 불살라버렸다.  정계은퇴를 선언함으로써 스스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없애버린 것이다.  유방은 항우를 안심시키기 위한 속임수로 잔교를 불살랐지만 손 전 대표는 그런 의도는 아닐 것이다.  항우라고 할 만한 상대로 없을뿐더러 속임을 당할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영영 강호에 파묻혀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는가?  그게 아니면 무슨 복안이라도 있는가?

또다른 통로인 ‘진창 비도’를 갖고 있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유방은 자신이 불태운 잔교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되돌아올 수도 없었다.  한신의 선도(先導) 하에 진창의 고산준령 사이로 험로를 뚫고 뚫어 천신만고 끝에 중원에 입성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손 전 고문에게 파촉 탈출구가 필요하다면 무엇이 될 수 있는가?  그의 장고 속에 ‘진창 비도’는 그려져 있는 것인가?

많은 국민의 바람이 전제돼야 한다

상식적으로, 은퇴 선언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천명(天命)급의 부름이 그에 해당될 수 있다.  개인적인 권력욕으로 비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국민들의 절실한 바람이 필수적이다.  과거 정계은퇴를 번복한 사례를 보더라도 그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복귀 후 ‘성공’을 기약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예컨대 지금 국민의당의 위기 정도로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자칫하면 주인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안방을 넘보는 도둑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명분 없는 복귀는 대권 레이스의 흥행만 돋우는 불쏘시개로 끝날 수도 있다.

천명만이 길을 열어줄 수 있다

토담집 마루에 걸터 앉아 길 어귀를 바라보는 손 전 고문의 심경은 착잡할 것이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세상사는 여의치 않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불태운 잔교로 되돌아올 생각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허상일 뿐, 디디면 천 리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다.  초심을 지키며 천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흔한 ‘진인사 대천명’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前 영남일보 정치부 기자

現 시사오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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