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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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일베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7.18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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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미국·영국 사례에서 우리도 교훈 얻어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브렉시트와 트럼프 현상, 일베 현상은 본질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다 ⓒ 시사오늘

현지 시각으로 18일, 미국 공화당이 전당대회를 열고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합니다. 지난해 6월 공화당 대선 경선 참가를 공식 선언할 때까지만 해도 농담거리 정도로 여겨졌던 ‘트럼프 대통령 시나리오’는, 어느덧 무시할 수 없는 확률을 가진 현실적 가능성이 됐습니다.

이처럼 트럼프가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바탕에는 저학력·저소득 노동자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최전선에 서있는 미국의 저학력·저소득 노동자들은 날로 커지는 빈부격차에 분노해왔습니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현재의 구도를 지속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진보 진영은 ‘알아듣기 어려운’ 구조와 체제를 공격하는 데만 힘을 쏟았습니다.

반면 트럼프는 혐오의 대상(이주 노동자)과 그 해결책(트럼프 장벽)을 뚜렷이 제시하면서 ‘기존 정치권’과 선을 그었습니다. 여기에 제3세계의 제1세계에 대한 테러는 ‘제노포비아’를 내세우는 트럼프에게 힘이 됐습니다.

이런 경향성은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놓은 브렉시트(Brexit)에서도 발견됩니다. 트럼프 지지자와 브렉시트 찬성파의 공통점은 저학력·저소득이라는 점입니다. 세계화의 수혜를 입지 못한, 오히려 노동력 이동의 자유화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이들의 불만이 임계점에 다다른 상태에서, 트럼프와 브렉시트라는 기폭제가 이들을 폭발시킨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분노는 경로를 이탈했습니다. 현재의 불평등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이민자가 ‘일자리와 복지를 빼앗아서’ 생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구조와 체제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대안을 모색하는 대신, 눈앞에서 움직이는 이민자를 공격하는 쪽을 택했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나라 역시 신자유주의 바람과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한국은 미국과 영국 못지않게 빈부격차가 큰 나라입니다. ‘세계경제포럼(WEF) 2015’ 자료에 따르면, 2013년 기준 한국의 지니계수는 0.347로 선진 30개국 가운데 싱가포르(0.398), 이스라엘(0.376), 미국(0.374), 영국(0.348) 다음으로 높았습니다. ‘트럼프 현상’과 ‘브렉시트’가 발생한 미국, 영국와 큰 차이가 없는 수치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야 했던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배타성을 내면화해 왔습니다. 여기에 3D 업종을 천시하는 문화적 특수성까지 더해지면서,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는 경쟁 대상이라기보다 무시 혹은 동정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는 분노를 외부로 표출하기보다 체념하는 형태로 표현해 왔습니다. 이른바 ‘N포 세대’가 꺼내든 ‘포기’라는 해법은 불만을 폭발시킬 곳을 찾지 못한 세대의 내부적 파괴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희생양을 찾으려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여성 혐오 현상이 그것입니다. 특히 여성과 호남,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타깃으로 하는 ‘일베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극단주의의 토양이 확대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현재의 불평등을 여성과 호남, 장애인 등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트럼프 현상이나 브렉시트에서 볼 수 있듯이, 분노가 반드시 원인을 정조준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영국인들이 이민자를 혐오하는 것은 그들이 ‘원래 내 것이어야 할’ 일자리·복지를 빼앗아가는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외부에서 적을 찾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특성상, 여성과 호남, 장애인 등 ‘전통적 약자’를 혐오하는 일베 현상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자가 더 큰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분노를 해소하려 한다는 점에서, 트럼프 현상·브렉시트와 일베 현상은 유사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타자화함으로써 위안을 찾고 내부 결속력을 다지는 것은 전통적인 전략입니다. 미국과 영국은 인종과 국적을 바탕으로 타자화를 진행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미국과 영국 같은 방식이 불가능합니다. 대신 우리 사회는 여성, 호남, 장애인 등 또 다른 방식으로 약자를 규정하고 타자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풍선효과처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터지고 있는 셈입니다.

여성, 호남,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일베 현상’은 우리 사회의 이상 신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베 현상을 그저 비난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을 분석하고 파악해 치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를 향한 불만이 뒤틀린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의 트럼프’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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