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현혹되지 마소”…‘북풍’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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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현혹되지 마소”…‘북풍’의 진화
  • 오지혜 기자
  • 승인 2016.07.3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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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자기검열' 부르는 '프레임의 정치학'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오지혜 기자)

최근 정계 원로인사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언론인 출신인 그는 박정희 시대부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시대를 모두 겪은 한마디로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그가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혼설'이었다. 주변 참모들이 박 전 대통령의 재혼을 바랐지만, 육영수 여사의 신격화로 곤란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원로인사의 조언은 간단했다. '언론계 몇 사람에게만 슬쩍 귀띔하면 신격화를 전부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권언 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국민의 생각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언론계의 자신감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떨까. 예전과 달리 '언론플레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만큼 그 영향력이 충분히 인지되고 있는 듯하지만, 언론의 프레임 기술 역시 날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반정부 여론에 대한 '언플'은 세련되게 진화했다. 쌍팔년도 냄새나는 '북한'이나 '간첩' 대신 '외부세력'이라는 현대식 용어로 대체한 것이다. 

군부독재정권 시절, '북풍(北風)'은 반정부 시위 등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주장으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기 위한 프레임으로 주로 사용됐다.

북풍과 외부세력 프레임 모두 여론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방식으로 시민들의 '진짜' 목소리를 차단, 진영논리화 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효과를 갖는다.

최근 경북 성주군은 사드배치 반대 시위로 홍역을 치렀다. 정부의 사드배치 발표에 항의하기 위한 군민들의 모임을 일부 언론이 외부세력 개입설을 덧씌웠기 때문이다.

전문 시위꾼이 선동했다는 전제 아래 '감금'과 '폭력' 등 시위의 '비정상'을 부각시키기 위한 표현도 다수 등장했다.

이에 따라 성주군의 반대 시위는 정부의 졸속 발표와 사드의 위험성 등 논란의 본질보다 외부세력의 참여 여부에 초점이 맞춰졌다.

지역지 <대구신문>은 지난 20일 1면 기사에서 "수도권 일부 언론이 집회의 폭력성을 부각하고 ‘외부세력 개입설’까지 횡행하면서 사드 성주배치 반대 운동 자체가 이념 논쟁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 인식에도 성주군의 목소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이유보다 외부세력 개입설에 대해 항변해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외부세력 프레임이 '자기검열'인 셈이다.

군민들은 지난 21일 상경집회에서 거주지·이름이 적힌 목걸이형 명찰을 달았다. 결의대회에 성주 군민만 참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외부세력 개입’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어른들의 세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화여대에서 지난 28일부터 사흘째 이어지고 있는 대규모 농성에도 같은 프레임이 적용됐다.

학생들은 학교 측이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 단과대학 설립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데 반발, 대학 본관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학교 측이 "사회에 진출한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총학 측은 이미 평생학습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학교가 돈벌이를 위해 미래라이프대학을 설립하려는 게 아닌지 의심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갈등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감금' '폭력' '외부세력' 등 프레임을 덧대고 있다.

학교 측도 복수 언론을 통해 "선의의 학생 대표, 재학생, 졸업생들의 의견과 행동은 존중해 대화 기회를 갖겠다. 그러나 다른 의도를 갖고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 외부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라며 편가르기식 프레임에 힘을 싣는 모습이다. 

이 가운데, 유행은 조금 지났지만 우리에게 이 만큼 시기 적절한 대사가 따로 있을까.

"뭣이 중헌디…절대 현혹되지 마소."

담당업무 : 국회 및 야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本立道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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