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무리울에서] '김영란법' 시행과 국회의원실 민원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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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무리울에서] '김영란법' 시행과 국회의원실 민원처리
  • 권혁식 논설위원
  • 승인 2016.08.16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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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권혁식 논설위원)

<사례1> 지역구 이장인데 민원이 있어 전화했습니다. 이번에 한국도로공사가 고속도로를 새로 건설하면서 우리 마을 바로 앞을 15미터 높이의 토공(흙을 쌓아 노반을 만드는 공법)으로 가로질러 가도록 노선을 설계했습니다. 마을주민들이 “집 앞의 전망과 통풍이 꽉 막히게 됐다”면서 모두 들고 일어났습니다. 도로 노선이 마을을 멀찍이 비껴 지나갈 수 있도록 힘써 주세요. 

<사례2> 지난 선거 때 의원님을 도왔던 지역구 주민입니다. 이번에 우리 딸애가 00공사 신입사원 채용시험에 응모해 필기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이제 최종 면접을 앞두고 있습니다. 다들 연줄을 동원한다는데, 가만히 있으면 손해볼 것 같아 전화했습니다. 아무쪼록 합격될 수 있도록 윗선에 얘기 좀 해주세요..

<사례3> 지역구에 본사를 두고 있는 전문건설업체 사장입니다. 이번에 우리 지역에서 LH공사가 발주하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있는데 하도급을 좀 받을 수 있도록 힘 좀 써주세요. LH공사가 나서서 원청사에게 우리 회사 좀 챙기라고 슬쩍 얘기하면 먹힐 것입니다.

<사례4> 지역구 시청 예산계장입니다.  내년도 국비보조사업에 국비예산을 확보해야 하는데 주무 부처에서 해당사업 B/C(편익/비용)가 1을 넘지 않는다고 예산 배정을 안해주고 있습니다. 내년에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 착공이 늦어져 목표연도에 사업을 끝낼 수가 없습니다. 주무 부처에 얘기 좀 해주세요.

국회의원 권력에 기댄 민원의 속성
 위 사례들은 국회의원실로 접수될 수 있는 민원의 일부다. 국회의원 업무 중에서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진 ‘법률 제·개정’과 ‘정부예산안 심의’, ‘국정조사·감사’ 등에 못지않게 지역구 민원 처리의 비중도 상당히 크다.  이들은 지역구 주민들이 제기하는 경우도 있고 지역구 지자체가 요청하는 것들도 있다. 어느 것이든 민원 결과에 따라 선거 때 많은 표의 향배와 직결돼 있기 때문에 국회의원은 이를 소홀히 대할 수 없다. 

 국회의원에게 제기되는 민원들은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의 업무와 관련돼 있다. 이들 기관들은 평소 일반 주민들에게는 물론 지자체에게도 문턱이 높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공직자들의 인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출직 수장(首長)들이 시장이나 군수처럼 주민들 가까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국회의원들이 평소 의정활동을 통해 정책이나 사업의 잘잘못을 추궁하고 따지는 상대가 이들 기관이기 때문에 민원들이 번지수는 제대로 찾아온 셈이다.

 국회로 오는 민원들은 해당 공직자로부터 “수용이 곤란하다”는 1차 회신을 받은 게 대부분이다. 이들 중에는 해당 공직자가 자신을 얕잡아 보고 민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공직자보다 더 센 권력을 이용해보자’는 생각으로 국회의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국민들 사이에 ‘국회의원의 특권은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지만, 동시에 국회는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권력기관이라는 인식이 혼재한다.

김영란법의 ‘부정청탁 금지’ 조항
 그러나 다음달 28일부터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 국회의 민원 처리 풍속도는 많이 달라질 전망이다. 동법 제5조 ‘부정청탁 금지’ 조항 때문이다. 국회의원과 관련된 내용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국회의원을 포함해서 누구든지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하여 직무(동법에 14가지 열거)를 수행하는 공직자 등에게 법령을 위반하여 직무를 처리하도록 부정청탁을 해서는 안된다’(제5조 제1항) 다만, 국회의원을 포함한 ‘선출직 공직자 등이 공익적인 목적으로 제3자의 고충민원을 전달하거나 법령·기준의 제정·개정·폐지 또는 정책·사업·제도 및 그 운영 등의 개선에 관해 제안·건의하는 행위는 이 법을 적용하지 않는다’(제5조 제2항 제3호)라는 ‘예외조항’이 있다. 이를 종합하면 국회의원은 공익적인 목적에만 부합하면 제3자의 고충민원을 공직자에게 전달하거나, 민원을 반영해 정책·사업 개선을 공직자에게 제안·건의하는 것이 부정청탁에 해당하더라도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의미다.

 이 규정을 적용하면, <사례1>의 경우 국회의원 입장에서 민원 접수는 가능하다. 이어 도공 측에 “지역민원이 생겨서 그렇다”고 전제한 뒤 “도로 노선을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이에 도공 측에서 “주민불편 등 미처 고려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면서 늦게라도 민원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도로법 등 관련 법령을 들어 “노선 변경이 불가하다”고 답하면 국회의원도 더 이상 밀어붙이지 못한다. ‘민원 전달’과 ‘사업개선 제안’까지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강압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한다. 다만, 도공 측의 ‘법령 위반’ 판단에 이의가 있을 때는 시비를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공익적 목적’ 없는 민원은 퇴짜
<사례2> ‘인사청탁’과 <사례3> ‘이권청탁’의 경우는 공익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예외조항’을 적용받을 수 없다. 따라서 의원실에선 첫 마디에 “김영란법 때문에 도와드릴 수 없다”면서 당당하게 거부할 수 있다. 김영란법 시행 이전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 연출될 것이다.

<사례4>의 경우 지자체를 위한 것이어서 공익적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에 접수는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해당 부처의 예산부서로 전화해 ‘지역구 민원’이라고 말문을 연 뒤 내년도 착공을 위한 예산 반영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위해 공직자 재량 범위 내에서 예산을 재배정해주면 다행이다. 그러나 답변이 “BC가 기준치를 넘지 못해 예산배정은 법령 위반이다”라고 한다면 더 이상 압박하기는 힘들다. 법적으로 ‘전달’과 ‘제안’까지만 가능해서다. 물론 ‘법령 위반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설 경우에만 ‘밀당’이 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국회의원이 처리할 수 있는 민원의 종류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게다가 민원은 ‘해결’이 아니라 ‘전달’의 대상이기 때문에 민원 처리에 드는 수고도 한결 줄어들 것이다. 국회의원은 김영란법 시행으로 일감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감에 속으로 환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정청탁 금지 ‘예외조항’ 삭제의 문제점
 그런데 일각에서는 제5조 제2항 제3호의 ‘예외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조항이 국회의원의 부정청탁에 대해 ‘면책 통로’를 제공한다는 이유에서다. 국회에서는 새누리당 강효상 의원(비례대표)이 같은 취지로 예외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의 김영란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상태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 예외조항 때문에 국회의원에 의한 부정청탁이 가능하더라도 공직자에게 법령을 위반한 직무처리를 압박 또는 강요할 수는 없다. ‘고충민원 전달’과 ‘사업개선 제안’까지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공직자는 ‘김영란법 위반’을 거론하며 얼마든지 부정청탁을 거부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부정청탁을 받아들여 위법한 직무를 수행했다면 전적으로 본인 책임이다.

 만약 강 의원의 법안이 통과돼 예외조항이 삭제되면 <사례1>과 <사례4>의 민원에도 국회의원 입장에서는 소극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공직자로부터 “나한테 지금 부정청탁하는 겁니까? 김영란법 제5조 위반입니다. 국민권익위에 신고할까요?”라는 항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민원사항이 법령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분명히 서야만 공직자를 상대로 민원 처리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결과는 자연히 민원인들에게 추가 부담을 안긴다. 민원사항이 법령 위반이 아니라는 근거를 충분히 제시해야만 국회의원실에서 민원을 접수하는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기부행위 금지’와 ‘부정청탁 금지’의 공통점
 지난 2004년 ‘공직선거법’ 개정을 통해 금지 대상인 ‘기부행위’의 범위가 대폭 확대되고, 적용기간도 삭제돼 상시적으로 기부행위가 금지됐다. 그 결과 정치인이라면 지역구에서 행해지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서 축·조의금을 내지 않아도 전혀 거리낄 게 없다. 유권자들도 그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다.

 김영란법도 마찬가지 효과를 낳을 것이다. 지역구민이 민원을 제기해도 일단 공익적 목적이 없는 민원은 외면당할 것이다. 또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예외조항’까지 삭제된다면, 민원사항이 법령 위반이 아니라는 근거를 갖고 있어야만 국회의원실을 노크할 수 있다. 이래저래 누구는 9월28일부터 표정관리에 들어갈 전망이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前 영남일보 서울 정치부 기자

現 시사오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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