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삼성X파일 사건은 국민들이 무죄 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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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삼성X파일 사건은 국민들이 무죄 선고 ”
  • 김병묵 기자 송오미 기자
  • 승인 2016.08.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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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원내대표“진보정당이 있는 사회 꿈꾸며 정치 시작 ”“정의당 기대이하 결과는 선거제도도 원인 ”“김영란법? 금연처럼 괴로워도 익숙해진다 ”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김병묵 기자 송오미 기자]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는 이제 한국 진보정치의 얼굴이 됐다. 확고한 소신, 시원한 입담으로 무장한 노 원내대표는 시나브로 ‘전국구’ 스타정치인 반열에 오른 상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노 원내대표의 이번 20대 국회 원내 복귀 과정도 드라마틱했다.

19대에서 60%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보이며 압승했다가 9개월 만에 의원직을 상실했다, 동작구을 재보선서도 분패(憤敗)하며 정치권에서 멀어지는 듯 했지만 지역구를 창원으로 옮겨 당선되며 화려하게 돌아왔다. 한국 진보의 간판 정치인 노 원내대표의 영화같은 정치여정을 듣기 위해, <시사오늘>은 17일 의원회관 510호의 문을 두드렸다.

-조금 전 검찰개혁 관련 토론회에 참석하고 왔다고 들었다.

“각 지방 검찰 책임자인 지방검사장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자고 주장했다. 지금 미국이 이렇게 하고 있다. 지금 전체적으로 검찰권 행사가 잘 안되고 있으니, 교육감 선출하듯이 국민들이 검사장을 뽑는 거다. 그렇게 함으로서 검찰의 비대해진 권력을 분산시키고, 보다 국민들에게 봉사토록 하자는 것이다.

지금 논의되는 검찰개혁 방안이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크게 세 가지 정도를 꼽자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신설, 검찰에 집중되어있는 수사권을 검찰과 경찰이 조절해서 나누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가 검사장 직선제다. 그것에 대한 토론회였다. 만약 실제로 이뤄질 경우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 같다”

▲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 ⓒ시사오늘 김용주 기자

'진보정당이 있는 사회'를 꿈꾸다

-정치 입문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됐나.

“사실 정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상대적으로 얼마 안 됐다.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른바 군사독재시절에 청년기를 보낸 사람으로서, 대학 다닐 때는 민주화 운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운동과 사회운동에 종사하며 노동자들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일에 오랫동안 매진해왔다. 그러면서 직접 정치를 할 것이라곤 생각을 못 해왔는데,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과거 방식의 민주화 운동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대신 노동자를 비롯한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에 생각이 미쳤다. 이 진보정당이 제대로 자리잡는 일이 내 일생일대의 과제가 됐다. 정당의 주요 활동이란 게 정치다 보니, 진보정치를 안 할 수가 없게 됐다. 선거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은 그 중의 피할 수 없는 과정이고. 개인적으로 정치의 길을 걷고자 했다 기 보다는 ‘진보정당이 있는 사회’를 목표로 한 거다. 진보정당이 한 축이 되는 정치를 만드는 건 오랜 꿈이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여러 가지가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을 꼽자면, 인민노련 활동을 하다가 수감됐을 때다. 교도소란 곳이 죄를 지어서 들어오는 곳이긴 한데, 그 안에서 만난 일반 수감자들과 교도 행정에 복무하고 있는 교도관들 보면서 다 우리 이웃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슷비슷한 삶들이고, 다 민초들인데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맡은 바 역할이 다를 뿐이지 않나.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 과정에 따라 비슷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을 해소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진보정당은 이를 위한 다양한 방안 중 한 가지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인민노련)은 1987년 6월 항쟁에 힘입어 출범한 대표적인 노동운동 단체다. 창립 시엔 진보진영이 다함께 했으나, 결성직후 소위 NL파가 이탈하며 PD파가 주도했다. 당시 함께했던 대표적 인물로 송영길 전 인천시장 등이 있다. 노 원내대표는 중앙위원, <사회주의자> 편집위원 등 인민노련의 핵심인물로 활발히 활동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89년 체포된다. 이후 노 원내대표는 2년6개월간 복역 뒤 1992년 만기출소했다.

-어느 정도까지 왔다고 보나.

“부족하나마 이뤄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시작단계를 못 벗어났다.”

진보정당의 길, 나라를 위한 창업

-더불어민주당 같은 거대 야당에 들어갈 기회도 있었다. 굳이 진보정당이라는 험난한 길을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

“개인적으로는 험난한 길이 맞다. 예를 들면 실력을 쌓아서 큰 회사에 취직하면 될 일을, 취직은 안하고 작은 회사를 창업하겠다고 하니 힘들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런데 이게 개인을 위한 창업이 아니고, 한국 사회를 위한 과업이다. 우리 사회가 발달하려면 훌륭한 정치인도 많이 나와야겠지만, 구조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더 많이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필요하다. 지금 세계적으로 발달한 선진국들의 집권당 내지 제1야당은 진보정당들이지 않나.

그런 당이 우리나라에도 뿌리를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거다. 괜찮은 정치인들이 한두 명 더 나타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진 않는다. 정치민주화를 넘어서 경제민주화까지도 실현된 선진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진보정당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이란 생각을 지금도 갖고 있다. 내가 국회의원을 한 번, 두 번 더 하는 것보다 진보정당이 뿌리내리는 일이 내가 바라는 사회가 빨리 오는 길이다.”

-故 이기택 총재와 통합민주당을 같이 하기도 했었는데, 노선이 영 달랐나.

“그게 1996년 총선을 앞두고선데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나는 진보정당판데 꽤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진보정당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개혁연대란 것을 만들었다. 장을병, 노무현, 제정구, 나중에 이부영, 이런 분들과 함께 했다. 아무래도 진보정당의 길은 따로 있어서 나와 노선은 아주 같지는 않았지만, 진보정당이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 일종의 정치실험을 해 본 거다.

그리고 몇 차례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통합민주당이 만들어졌고, 이기택 총재도 그 때 함께했다. 그런데 결국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진보정당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만들어보자 하면서 결별했다. 사실 결별도 아니다. 당시 통합민주당은 일종의 일시적 선거연합이었기 때문이다. 그 노력의 결과가 2000년에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고, 2004년엔 국회에 들어오게 됐다.”

-그렇게 힘들게 원내에 들어갔는데, 18대 총선서는 아깝게 졌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인기가 더 올랐다.

“2008년이었는데 그 때 서울에서 야당이 두 명 밖에 이기지 못했을 때다. 그런데 나는 중앙언론사 9개의 여론조사에서 모두 이겼다. 막판에 뒤집어진거다. 나 말고 야당후보가 15%를 가져가면서 근소한 차이로 졌다. 그렇게 억울하게 진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지못미(지켜주지못해 미안해)’라며 많은 분들이 위로를 해 주셨다. 그리고 약속했던 대로 떨어지자마자 한 달 후에 바로 지역활동을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활동한 결과, 그 노력을 알아주신 분들이 19대 때 높은 득표율로 당선시켜 주셨다.”

▲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 ⓒ시사오늘 김용주 기자

삼성X파일 사건, 국민들이 4심에서 선거로 무죄선고

-그런데 삼성 X파일 폭로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심정은 어땠나.

“여전히 나는 법적으로 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민사소송에선 다 이겼고.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고, 억울해도 지난 일이다. 그러나 억울하게 9개월 만에 의원직을 박탈당해서 후회하냐 물으면 그렇지 않다. 몇 번 밝혔듯 똑같은 상황이 되어도 똑같이 선택했을 것이다.

엄청난 정경유착 스캔들을 알게 됐는데,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서 감출 수는 없는 일이다. 법사위원이기도 했던 내가 침묵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19대 때 그렇게 억울하게 잃었지만, 이번에 20대에서 당선되지 않았나. 난 이 당선의 의미를 3심 재판에서 내가 졌지만, 국민의 재판인 4심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에게 무죄를 확인받은 거다. 내게 그런 중죄가 있다면 뽑았겠는가? 그렇게 평가하고 싶다.”

삼성X파일이란 1997년 대성과정에서 당시 안기부가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테이프와 이를 분석한 보고서를 말한다. 내용은 삼성측의 정치권과 검찰들의 로비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

2005년 MBC 이상호 기자가 한 차례 방송으로 폭로했지만 뇌물을 받은 검찰들의 실명은 공개되지 않았는데, 노 원내대표가 그해 8월 국회 법사위 회의에 앞서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했다. 이에 검찰은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위반 혐의로 노 원내대표 등을 기소, 2009년 2심에선 무죄 판결이 났지만 2013년 결국 상고가 기각됐다. 이 일로 19대 총선에서 당선됐던 노 원내대표는 의원직을 상실했다.

-19대 때 동작구 재보선도 나갔다가 패했다.

“그 선거는 나를 위해 출마했기 보다는 당을 위해서 나갔었다. 2014년 재보선인데 나는 2012년에 이미 당선된 사람 아닌가. 다음 선거를 기다리는 것이 맞았다. 내 선거구도 아닌 곳에, 그것도 3주전에 당에서 출마를 결정했다. 물론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때도 유권자들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선거법의 문제인데, 후보단일화가 됐지만 기동민 후보가 투표용지에 명기가 되는 바람에 사표가 많이 나왔다. 그 사표를 합치면 이기고 남았었다. 집계에선 2등이었지만 가장 많은 정치적 지지를 얻었으니까.”

-그 다음에 창원성산으로 지역구를 옮기는 결심을 했다. 판단 배경은 무엇이었나.

“굉장히 어려운 선택이었다. 고민이 길 수밖에 없었고. 노원병은 원래 내가 당선됐던 선거구다. 의원직 상실상태에서 다른 분이 와서 된 것 아닌가. 그래서 한편으로 나로선 출마할 자격과 배경이 있는 것인데 다른 한편으로선 노원에 나갈 경우에는 야당끼리 대결해서 둘 다 크게 상처를 받을 수 있었다. 여당이 어부지리를 얻는, 새누리당이 원하는 결과 아닌가. 그래서 고민이 되는 상황에서 창원에서 나를 적극적으로 초청했다.

한 석이 아쉬운 당에서 어느 것이 현명한 선택인지 고민했다. 원래 지역구기 때문에 정당성은 있지만 야권이 모두 공멸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으로 가느냐, 지역구를 옮기는 모험을 해야하지만 새누리당과 겨루는 경남창원으로 가느냐. 당에서도 많은 논의와 오랜 고민 끝에 내게 창원행을 권유했고, 내가 받아들이면서 가게 됐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더라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이번 선거에서 이렇게 야권이 승리할 거란 느낌을 받았나.

“솔직히 야권이 질 줄 알았다. 당시 야권은 분열된 상태였고, 당이 하나 더 생긴 것 아닌가. 더민주-국민의당-정의당 연대는 성사되지 않았고, 나는 단일화에 성공했지만 전국적으로 단일화 된 곳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질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런데 국민들이 야권이 질 뻔한 선거를 전략적인 투표를 통해 수정 보완한 게 아닌가 싶다.”

-국민들의 선택엔 어떤 요소가 반영됐다고 보는지.

“우리 국민들이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집권여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생각이 워낙 강했다고 본다. 그래서 야당에 표를 몰아줘야하는데 분당이 일어나고, 선거연대도 실패하면서 그냥 표를 몰아줬다가는 분산된 표로 인해서 참패하는 상황이 안 봐도 뻔한 거다.

그래서 고차원적인 투표를 한 것 같다. 실제로 후보 투표와 정당 투표, 두 장의 선택권이 모든 국민들에게 주어지는데, 이번 유권자들의 반 이상이 이 두 개를 분리했다. 후보를 지지하면서 당까지 지지한건 50%가 안 된다. 두 장의 표를 가장 효율적으로 분산해서 야권전체가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호남 밖에선 의석이 2석에 불과한 국민의당이 정당투표에선 더민주를 웃도는 지지를 받지 않았나.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는데, 국민들이 영악한 선택을 했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 ⓒ시사오늘 김용주 기자

목표는 교섭단체…스타 정치인보다 당이 뿌리내려야

-그런데 정의당 입장에선 아쉬운 결과가 나온 거 아닌가.

“원인을 따지자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선거제도라고 생각한다. 이번 20대 총선은 지난 19대 총선에서의 선거제도보다 훨씬 개선될 전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비례대표제가 줄어드는 등 후퇴했다. 그게 정의당에 다소 불리하게 작용했다.

또 야권에 당이 하나 더 생김으로서 표가 분산된 피해를 가장 크게 본 것은 정의당이다. 국민들이 전략적 투표를 하면서 비호남 지역구에서 더민주를 밀어줬고, 그래서 더민주는 예상 밖 당선이 많아졌다. 이 지역에서 국민들이 정당투표는 또 국민의당에 몰아줬다. 그래서 비례대표가 예상보다 훨씬 많이 당선됐다. 야권의 두 당은 혜택을 받았지만 그 혜택이 세 번째 당까진 오지 못한 것이다.”

-왜 정의당 대신 국민의당이 선택받았을까.

“내가 그 문제를 제기한 사람인데, 서열상 여유분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한 편으로 보자면 그동안 정의당은 양대 기득권 정당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제3당으로서의 진보정당인 우리 당에 표를 몰아달라고 주로 얘기를 해 왔는데, 양당 거대 정당체제에 염증을 느낀 분들이 표를 던질 좀 더 큰 정당이 생겨버린 거다.

그런 구조적인 요인도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하필 그리로 갔느냐 하는 것은 아직 정의당 스스로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좀 더 정의당이 국민들에게 호소력 있게, 매력적으로, 신뢰감 있게 다가가지 못한 것은 아니냐 하는 거다.”

-일각에선 대권주자의 존재 여부가 영향을 끼친 것 아니냐 하는 분석도 있는데.

“그게 절대적이라고 보이진 않는다. 왜냐면 정의당이 지금 6석인데, 왜 60석이 안됐냐고 묻는 게 아니지 않나. 우리는 16석만 얻었어도 획기적인 성공이라고 했을 거고, 대권후보가 없어도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다.”

-과거에 쓴 책 <진보의 재탄생>의 서문에서, 운동권 동창회를 탈피하고 외연을 확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지금 6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의당을 이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그 책을 쓴 이후에 꾸었던 꿈은 실현되는 방향으로 갔다기 보다는 후퇴했다. 2012년 총선을 치른 후에 통합진보당 사태로 당이 분열했다. 더 나아가서 일부 세력들이지만 국민의 지탄을 받는 그런 노선들도 변하지 않았다. 진보가 그동안 적지 않은 국민들의 기대를 모아가고 있었는데 상처를 입었다. 2012년에서 2013년 초까지 진보정당의 지지 세력들을 실망시키는 시간이었다고 본다. 지지율도 많이 후퇴 했고, 통진당은 해산까지 갔고….

우리는 새롭게 출발했지만 뭐가 다른 세력이냐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일단은 진보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확산되면서 굉징히 힘들었다. 그것도 바닥을 쳤다고 본다. 정리하면 후퇴했다가 바닥을 치고 다시 좀 복원해 가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내가 제기했던 문제의식, 진보가 외연을 넓혀야 되고, 국민에게 대중에게 다가서야 된다는 것은 6년 전과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 이젠 그 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상황인가.

“각종여론조사나 데이터를 보더라도 지금 국민들이 바라는 한국사회가 해결해야할 과제를 보면 비슷하다. 경제민주화, 그리고 복지국가다.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이거야 말로 진보정당이 가장 앞장설 수 있는, 전공에 걸맞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경제민주화 방향으로 갈수록, 복지정당으로 한걸음한걸음 나아갈수록 진보정당이 맡아야할 짐은 커진다고 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시대가 바라는 일이 다르면 비생산적이지 않겠나. 우리가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파도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목표하는 바가 있나.

“1차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최소한 20석 이상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음 선거에는 반드시 정의당이 교섭단체를 이뤄야 한다. 교섭단체가 되면 정국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히 커질 수밖에 없다. 교섭단체가 되면 그 다음은 40석이든 60석이든 별 상관이 없다. 다음선거 20석 반드시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인데, 이는 4년 후에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걸 만들어내기 위한 2018년 지방선거 도전도 있을 것이고, 대선국면도 활용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민생을 중점적으로 한 활동을 국민들 속에서 깊숙이 벌여나갈 예정이다.”

-교섭단체 제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섭단체 제도가 없는 나라가 더 많다. 없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데…, 없애자고 해서 없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일단은 존재하는 걸 전제로 가고 있다. 사실 이건 위헌이라는 주장도 있고, 다른 나라는 20석씩이나 커트라인이 높지 않다. 5석, 10석으로 줄이자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사실 선거제도가 독일식이나 스웨덴, 네덜란드 같은 방식이었으면 이번에도 정의당은 교섭단체가 됐다. 정의당이 이번에 7.3%받았는데, 의석이 300석 기준으로 7%면 21석 아닌가. 선거제도만 달랐으면 충분히 교섭단체가 가능했다.”

-선거제 개편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 같다.

“그렇다. 지구상에 다양한 선거제도가 있지만, 가장 합리적이고 공정한 선거제도의 공통점은 국민들의 지지율과 각 당이 갖고 있는 의석 수가 같다는 거다.지지 정도에 정비례해서 권력을 양도받는다. 그게 대의민주주의에 맞는 것 아니냐. 대표적인 게 독일식 정당명부제다. 선거제도는 개편돼야 하고, 국민들의 의견이 얼마나 정확히 반영되는가가 선거제도 개편의 핵심적 사항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의당에서 노회찬·심상정을 잇는 스타 정치인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지지자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여섯 의석 중에 두 명이면 삼분의 일인데, 많은 것 아닌가. 이 계산법이면 다른 정당에선 스타 정치인이 40명씩 있어야 하는데, 둘도 많은 거다. 물론 충분하단 뜻은 아니고 어찌보면 우리 당처럼 교섭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뭘 해도 조명도 못 받는 당에서, 중량감 있는 인사의 존재는 중요하다. 다만 나는 스타의원 한명 더 나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보정당으로서 정의당의 값어치가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지율이 높아져서 이 당에서 의원 스무 명 나오는게 더 중요하지 않겠나. 교섭단체가 되면 활동의 차원이 달라지고,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아진다.”

-그래도 대권 주자는 필요하지 않겠나.

“대권주자는 우리가 제일 많지 않나, 하하. 우리도 비전이 확고한 정당이기 때문에 다음 대선에도 무조건 주자를 낼 거다. 정의당은 적당히 묻혀가는 당이 아니라 경영철학과 노선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다. 운동선수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올림픽 출전이고, 출전을 왜하냐고 물으면 금메달 아니겠나. 정의당은 원내 유일한 진보정당으로서 갈 길이 멀지만, 반드시 한 걸음씩이라도 나아가는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대선에 대한 간략한 예측을 들려 준다면.

“내년 초에 가봐야 알지 않겠나. 각 당에서 훌륭한 분들도 많이 계시고. 제1야당에게 기회를 주는 선거가 될 것인지, 여당이 다시 정권을 잡을지 아무도 모른다. 혹은 다음 세대의 목표. 대한민국 업그레이드하는 선거가 될 것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다.”

▲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 ⓒ시사오늘 김용주 기자

세비감축, 최저임금이랑 함께 가자는 것

-최근 의원들의 세비감축을 주장했다.

“세비감축은 좀 오해가 있는데, 내가 국회의원 연봉 반으로 낮추자고 하니까 다들 떨떠름해 했다. 일만 잘하면 다 받아가도 좋다. 두 배로 주면 어떤가. 내가 문제삼은 건 국회의원 연봉이 많아서 낮추자고 한 게 아니다. 최저임금에 대비해서 높다는 거다. 최근 최저임금제를 도입한 독일과 우리나라는 최저임금이 2배차이가 난다. 근데 국회의원 연봉은 똑같다.

우리 최저임금을 생각하면 절반이 돼야 하지 않느냐 이게 내 이야기다. 우리 최저임금이 오를 때 국회의원도 같이 오르자. 같이 잘살아야지 왜 국회의원만 먼저 잘 살고 있느냐는 거다. 우리 국민들이 뒤쳐져 있다면, 우리도 돌아갔다가 같이 데리고 와야 하지 않나.”

-정의당은 최저임금 만원 공약을 내놨었다. 실현가능성은 얼마나 되나.

“결정과정을 바꿔야 한다. 지금 최저임금을 위원회에서 결정하는데, 위원회에 문제가 많다. 노사정이 모여서 하는데, 사실상 정부는 사용자와 입장이 같다. 그래서 지금은 너무 기득권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많아 균형이 깨져있는 모양새다. 장기적으로 이 최저임금 결정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노사가 각각 세 명씩 내세우고, 위원장을 노사합의로 선출하면 된다.

그리고 합의가 안될 경우 위원장이 낙점하면 된다. 합의로 선출된 위원장이니 따라야 하지 않겠나. 이 방향이 맞다고 본다. 전문가들이 참여하는데 전문가들은 표결권이 없다. 얼마를 줘야하느냐는 정책의 문제도 있지만, 본질은 얼마에서 합의할거냐는 협상의 문제다. 그래서 노사가 다 동의할 수 있는 결정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걸 바꾸면 가능하다. 어떤 분들은 최저임금 결정권을 국회로 가져오자고 하는데, 가져와 봐야 정쟁이나 벌어지지 않겠나.”

사드는 美 MD 일부가 되는 것…국회 동의 얻어야

-사드 배치 논란이 뜨겁다. 사드 배치에 대한 견해는.

“사드 배치엔 지금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사드배치가 미국의 MD(미사일 방어체제)에 들어가는 행동이라는 점이다. 사드배치가 북한에 대한 핵 억지력 역할을 한다는 것은 사실 미미한거고, 한국에 있는 미군기지를 향해 날아올 수도 있는 북한과 중국의 전략무기에 대응하는 측면이 크다. 정부의 성명과 달리 이 배치는 미국의 MD체계의 일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은 한 포대 들어오지만 이게 안착되면 한 포대 더 들어올 거다. 중국을 포위하는 것으로서의 MD는 우리도 반대한다고 했지만, 사드배치로서 참여하는 꼴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 문제다. MD에 참여하게 될 경우 북한이 핵무기를 못 만들도록 몰아치는 국제 공조에 있어서 러시아 중국이 빠져나가는 문제가 생긴다. 두 번째는 중국은 큰 교역국인데, 사드배치로 중국을 자극할 경우 보복관세 등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했다.”

-철회가 맞다고 보는 입장인가.

“최종 판단 후에 필요하다면 철회해야 한다. 주한미군도 일부는 철수하고 다른 나라 가고 하지 않나. 무엇보다도 국민의 의견을 묻지 않고, 국회의 동의를 얻지 않고 벌인 일이라 많은 후유증이 있이 않을까 생각한다.”

김영란법, 금연처럼 괴로워도 금방 적응된다

-김영란법 합헌 결정에 대한 생각은.

“합헌결정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법이 우리나라의 공직사회나 접대문화나 청렴사회 만들기 등 여러 면에서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칠 거다. 당장엔 좀 불편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불과 20년전 까지만 해도 국제선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폈다. 나도 폈지만 왜 문제되는지 전혀 인식을 못했다. 근데 비행기 안에서 금연하게 됐을 때, 나는 파리로 가는 8시간이 몹시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 기내에서 피우는 인간이 있으면 기절할거다. 그만큼 인간은 잘 적응한다. 식사 3만원 이상 금지하고, 선물 5만원 이상 금지하면 큰일 날 것처럼 얘기하지만, 우리 솔직히 언제부터 3만원 짜리 밥을 먹었는가. 경직되게 생각하지 말자. 한국사회의 부패지수가 세계에서 아주 높은 수준인데, 관행화된 부정 행위를 더 이상 유지하면 안 되지 않느냐. 엄격하게 하자는 거다.

어느 외국 교수에게 만오천원짜리 만년필을 줬는데 끝까지 안 받고 결국 소포로 돌려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청렴성은 부러워하면서 3~5만 원짜리 선물을 당연하게 받는건 모순 아닌가? 문화혁명이 필요하다. 그간 관성적으로 만연해 있는 청탁문화, 접대문화, 과도한 선물문화를 바꾸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본다.”

20대 국회에서 사교육비 절감 이룰 것

-본인의 정치적 소신을 들려준다면.

“돈보다 생명이다. 생명이 중시되고 사람이 중시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치의 목표가 사람이 돼야 한다. 나는 20대 국회에서 반드시 사교육비를 낮추고 싶다. 교육비 부담이 줄면 삶의 질이 올라갈 것 같다. 월급인상, 최저임금 인상도 있지만 사교육비절감 방안에 전력을 다 하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의 가치가 차별받지 않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서 정당한 댓가를 받는 세상을 위해 노력 중이다. 똑같은 노력을 했는데 비정규직이라고 월급을 반만 받고, 파견이라고 반만 받고, 이런 행태는 근로의욕을 떨어뜨리고 사회통합을 해친다. 노동의대가를 공정하게 받을 수 있도록 정치를 통해 노력할 거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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