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매그니피센트 7>, 전설 잇지 못하는 클래식에 대한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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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매그니피센트 7>, 전설 잇지 못하는 클래식에 대한 열망
  • 김기범 영화평론가
  • 승인 2016.09.14 0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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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의 시네 리플릿>서사 대신 그림을 선택한 감독 특유의 한계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기범 영화평론가)

▲ 영화 <매그니피센트 7> 포스터 ⓒUPI코리아

용병(Mercenary) 이란 통상적 급여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으며, 순전히 개인적 이득을 위해 주로 타국의 전쟁에 참여하는 전문 군인을 말한다.

원하는 보수만 주어진다면 의뢰인과의 약속대로 업무를 성사시켜 주기에, 의뢰한 이가 누구든 개의치 않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용병들에게 금전적 이익이 아닌,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개인적 신념을 요구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여하한 정의관이나 도덕관에 대한 기대치라면 더더욱 그렇다.

현대에서도 사설 경비나 경호인 등으로 치환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프로 스포츠에서조차 일반화되어 있는 용병이란 용어는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인류의 아주 오래된 직업이기도 하다.

동시에 근원적으로 불균질할 수밖에 없는 용병이란 제도는 역사적으로 우리들보다는 기사나 총잡이 등의 존재가 분명했던 서구 사회에 있어서 더 토착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할리우드 등에서는 용병을 소재로 한 숱한 영화들이 과거로부터 이 순간까지 만들어져 오고 있다.

일례로 실베스터 스탤론이 이끄는 <익스펜더블> 은 관객들이 열광할 만한 액션 배우들과 최첨단 무기를 최적으로 조합시켜 아예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는, 그 진화가 현재진행중인 용병 영화의 최신 버전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용병 영화는 특정 장르가 늘 그러하듯 제작 공식의 전형성을 낳는다.

각자의 재능이 특화된 여러 캐릭터들은 그 개성만큼이나 저마다의 스토리나 극복해야 할 개인적 애환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초반엔 금전적 이해관계로 규합되지만 결국 인간적 이해와 우정을 매개로 끈끈한 하나의 팀을 이룬다.

상대하여야 할 적들은 도덕적 관념과는 무관한 절대 악의 상징으로, 급조된 용병 팀은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응징하고 최종 승자가 된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팀원 간의 초기 갈등은 의리와 케미스트리로 완결되는 것이 정석처럼 굳어진다.

이러한 장르의 정점에 서 있는 영화들로는 바로 존 스터지스 감독의 1960년 작 <황야의 7인> 이나 1966년에 버트 랭카스터와 리 마빈이 주연한 <4인의 프로페셔널>, 그리고 리차드 버튼과 로저 무어 등의 영국 남자들이 대놓고 최정예 용병을 묘사했던 1978년의 <와일드 기스>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일본판 용병이라 할 사무라이를 소재로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1954년에 연출한 <7인의 사무라이> 를 오마주하여, 이를 리메이크한 <황야의 7인> 은 아직도 수많은 영화 팬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추억의 명작이다.

율 브리너와 스티브 맥퀸을 필두로, 찰스 브론슨과 제임스 코번, 그리고 로버트 본 등 그 이름만으로도 가히 할리우드의 기라성이라 할 수 있는 명배우들을 총집합시킨 이 영화는 <7인의 사무라이> 를 미국식 서부극으로 훌륭하게 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삭막할 수 있는 총잡이들의 세계를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본능, 또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저마다의 아픔과 사연을 희생으로 승화시킨 여러 캐릭터들의 총체적인 합을 보여주었다.

<매그니피센트 7> 은 그러한 <황야의 7인> 의 원제목 그대로 리메이크되어, 고용된 총잡이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는 결성 과정부터 절대 악에 대한 처절한 응징까지 서부극의 전형적 공식을 통해 과거의 향수를 되돌릴 의도로 안톤 후쿠아가 새로운 클래식으로 재생산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렇다 할 반전 없는 서부극이 사장된 지 오래인 21 세기의 <매그니피센트 7> 은 그 장르의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서사와 액션에서 그렇게 현격한 품격을 갖추지 못한다.

7인의 용병들이 모이는 과정은 너무나 쉽고 단조로워, 오히려 그 동기 부여 면에서 관객들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기 힘들다.

짧지 않은 130여 분의 후반을 향해 치달을수록 정의에 대한 개념을 막연하게 부르짖을 뿐, 총잡이들이 어떻게 약자에 대한 인간적 연민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지에 대한 서사는 원전인 <7인의 사무라이> 나 <황야의 7인> 에 비해 한없이 모자란다.

관객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스토리텔링이 희석되는 부분이다.

돈 때문에 사람 죽이는데 능수능란한 총잡이들이 어찌 해서 거듭나는 지에 대한 그 메아리는 공허한 가운데, 그나마 확실한 납득을 선사하는 이는 주연을 맡은 덴젤 워싱턴뿐이다.

광활한 대지를 수놓는 지루한 총격전과 살육전은 어차피 예정된 결말을 향해 스피디하고도 장황하게 전개되지만, 기존 서부 영화들의 고풍스런 의상이나 틀에 박힌 건물만큼이나 식상할 뿐이다.

속절없이 치러지는 양민들의 처절한 희생 속에서 영웅과 악당의 대결과 복수라는 미국형 신파 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2016년 현재에 걸맞은 새로운 감각의 변주에 미치지 못하고 있음은 어찌 보면 감독의 클래식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간주될 수도 있겠다.

혹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과거 서부극의 전형적 공식을 따른 이 영화에 대해 간만에 예전의 노스탤지어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이병헌과 같은) 동양권의 스타 주윤발의 첫 할리우드 진출작인 <리플레이스먼트 킬러> 의 데뷔 이래, 더 이상 커다란 발전이나 진화가 없는 비디오 아티스트 안톤 후쿠아의 한계적 의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치 명절이면 원전과 그 한 치의 오차 없이 늘 다시 제작되어 TV 에 돌아왔던, 우리의 영원한 고전 <춘향전> 을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기는 과거 5-60 년대를 수놓았던 그 수많은 명작 서부극의 아성을 뛰어넘거나 연상시키기는커녕, 차라리 원전에 대한 재관람의 욕구만을 자극한다면 감독 본연의 기획 의도 또한 어느 정도 적중한 것이리라.

예전 명절날, 특선 영화로 TV 에서 보던 <황야의 7인> 의 옛 주제곡이 <매그니피센트 7> 의 엔드 크레디트와 함께 울려 퍼질 때 더욱 그렇다.

전야 개봉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의 공식 개봉일은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14일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뱀의 발 : 원작인 <황야의 7인> 에 나왔던 제임스 코번의 배역을 따른 것이 분명한 이병헌의 고뇌의 눈빛은 특성상(?) 상대적으로 과묵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를 충분히 상쇄시킨다. 오히려 영어 대사보다 훨씬 낫다.

★★

·영화 저널리스트
·한양대학교 연구원 및 연구교수 역임
·한양대학교, 서원대학교 등 강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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