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권혁식 논설위원)
내년 12월 19대 대선 출마에 관심이 있는 일부 광역단체장들이 최근 인지도와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여권에선 남경필 경기지사, 원희룡 제주지사, 야권에선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지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 ‘잠룡’들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정견을 널리 알리고 다양한 행사에 참석해 스킨십을 강화하는 등 존재감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선 광역단체장 출신으로 대권에 도전해 성공한 경우는 이명박 대통령이 유일하다. 그는 지난 2006년6월 서울시장 임기를 마친 뒤 2007년8월 여당 후보경선 승리를 거쳐 그해 12월 본선에서 대권을 거머쥐었다.
임기중반에 대권행보에 나선 광역단체장들
그런데 내년 대선에 관심을 갖는 광역단체장들은 임기가 2018년6월까지여서 자연히 임기 도중에 대선가도에 발을 걸치게 됐다. 이들은 2014년7월부터 새 임기를 시작했으니 지금 임기 중반을 맞고 있다. 재선인 박 시장과 안 지사를 제외하고 남 지사와 원 지사는 초선이다. 더욱이 남·원 지사는 정치인 출신으로 지방행정에 대해선 2년 전만 해도 비전문가였다. 취임 후 2년간의 직무수행을 통해 이제 어느 정도 업무파악과 조직장악을 끝내고 이제는 한창 도정 구석구석을 살펴야할 시점이다. 그런데 이들의 시선이 대권에 꽂혔으니...
물론 대권에 대한 관심 때문에 도정에 대단한 문제가 생기고 이상이 발생했다고 봐야할 근거는 없다. 서류 결재를 비롯해 회의 주재, 행사 참가, 의회 출석 등 기본적인 업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면 별 잡음은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행정업무란 주민들을 위해 일을 더해야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일은 무지 많기 마련이다. 관내 동네마다 미제의 현안들이 쌓여있을 텐데 시도지사가 직접 현장까지 나가보고 말고는 자유지만, 나가본다면 주민들이 느끼는 행정 서비스의 질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찾아보면 할 일 많은데 대권 관심으로 못 봐
그럼에도 일부에서 “시·도정 운영에 최선을 다하고도 대권에 신경 쓸 여유가 충분히 있다”고 항변한다면 다른 광역단체장들은 사정이 어떤지 궁금해진다. 잠룡들은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대권에 관심 갖는데, 그들은 무능해서 쉬지도 못하고 줄곧 일만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시간에 그들은 개인시간을 즐기는 것인가? 광역단체장직이 그렇게 널널한 자리여서 18대 국회에서 ‘도(道) 폐지’ 법안이 여러 건 발의됐던 것인가?
그렇다고 단체장 임기를 깔끔히 마무리한 뒤에 대권에 도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시장 임기종료와 대선전 사이에 비교적 간극이 짧아 타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긴 경우에는 낭패를 볼 수 있다. 비근한 예가 남 지사 전임인 김문수 전 경기지사다. 김 전 지사는 19대 대선출마를 겨냥해 도지사 3선 출마를 접고 2014년6월 일찌감치 도정을 떠났다. 그러나 2017년12월까지 3년 남짓한 시간을 버티지 못해 대권주자로서의 위상이 사그라들고 있다. ‘경력단절’이 정치인에게도 상당한 위험부담을 안긴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단체장의 대권도전이 ‘밑져봐야 본전’ 선례 남아
그런데 김 전 지사는 좋지 못한 선례를 하나 남겼다. 그는 2012년12월 18대 대선을 앞두고 8월에 실시된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에 현직을 갖고 참여했다. 경선 결과 2위로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하자 다시 도정으로 돌아와 2년 더 자리를 지킨 뒤 물러났다. 그의 이런 행보는 결과적으로 광역단체장의 대권도전이 ‘밑져봐야 본전인 장사’가 되는 길을 보여준 셈이다.
이미 안 지사와 남 지사는 언론을 통해 현직을 갖고 대권에 도전할 의사를 피력했다. 내년 초까지 판세를 본 뒤 당내 경선 직전에라도 현직에서 사퇴하고 도전하든지 아니면 도정으로 복귀할 수 있다. 이도저도 아니면, 김 전 지사의 전례를 따라 현직을 갖고 전국의 경선 유세장을 누빈 뒤 다시 도정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출마에 법적 문제 없어도 정치·도의적 책임
광역단체장이 대권에 관심을 갖고 도전하는 게 법적으로는 문제될 게 없다. 그럼에도 ‘슈퍼맨’이 아닌 이상 시·도정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된다. 더욱이 모병제처럼 국가적인 어젠다를 던져놓고 후속 공방을 벌인다면 도정에 쏟아야할 시간과 열정을 그것과 맞바꿔야 한다. 산하 공무원들은 조직의 수장이 중앙무대를 누비며 ‘한눈’을 팔고 있는데 일손이 제대로 잡힐지 의문이다. 그에 따른 기강해이와 행정공백은 고스란히 주민들의 불편과 피해로 돌아갈 것이다. 법적인 문제를 떠나 정치·도의적 책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엄밀히 말하면, 광역단체장은 현직을 성실히 수행한 뒤 그 성적표를 갖고 국민들로부터 대통령감인지 여부를 평가를 받는 게 정석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시장 재임시 추진했던 ‘청계천 복원사업’, ‘버스중앙차로제’ 등의 성과를 앞세워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역단체장은 주민들이 믿고 맡긴 시·도정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게 우선이다. 산하 기초단체장들과 협력해 주민들에게 보다 나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에 골몰하는 모습이 더 바람직하다. 그 과정에서 얻어진 (중간)성과물을 갖고 국민들의 지지를 구하겠다는 자세가 정도(正道)라고 본다. 예컨대 남 지사의 ‘연정과 공유적 시장경제’도 좋은 아이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심 굳혔으면 당내 경선 전에 현직에서 물러나야
누구든지 내년 언제쯤에는 본격적으로 대권경쟁에 뛰어들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늦어도 당내 경선출마 전에는 현직에서 물러나는 게 그나마 민폐(民弊)를 줄이는 첩경이다. 그렇지 않고 “뽑아주신 주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현직에서 함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궤변(詭辯)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다면, 아예 처음부터 대권 근처에 기웃거리지 않는 게 유권자들과의 약속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前 영남일보 서울 정치부 기자
現 시사오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