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권혁식 논설위원)
며칠 전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법정진술이 나왔다. 중소기업진흥공단 2013년도 하반기 신입사원채용에 최 의원실 인턴 출신인 황 모 씨가 부정채용된 것과 관련, 박철규 전 중진공 이사장이 지난 21일 법정에서 ‘최 의원 지시’로 그렇게 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중진공 부정 채용과 관련, “최경환 의원 지시 있었다”는 법정진술 나와
이 건과 관련해 업무방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박 전 이사장은 이날 수원지법 안양지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지난 2013년 8월1일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최 의원과 독대해 "(황 씨가) 여러가지 검토했지만 도저히 안돼 불합격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 의원은 "내가 결혼시킨 아이인데 성실하고 괜찮으니 믿고 써보라"고 말했다는 게 박 전 이사장의 진술이다. 박 전 이사장은 다시 비정규직으로 있다가 내년에 다시 한번 응시시킬 것을 권했지만 “최 의원이 ‘그냥 하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는 박 전 이사장이 기존 진술을 번복한 것으로, 앞서 감사원 감사와 검찰 조사에선 "최 의원이 합격시키라고 지시한 적 없다"고 말해왔다. 검찰은 박 전 이사장의 진술을 받아들여 최 의원을 간단히 서면조사하고 무혐의 처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야 3당은 즉각 검찰의 재수사를 촉구했으나, 최 의원은 "그런 일이 없었다"며 "그 분(박 전 이사장)이 왜 그런 말씀을 그렇게 하셨는지 잘 모르겠다"면서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이제는 ‘말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진술 번복?
최 의원은 현 정권의 최고실세로 알려져 왔다.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경제부총리로 발탁돼 ‘초이노믹스’란 이름으로 1년 6개월간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 때문에 부정채용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 검찰 수사가 제대로 이뤄질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일각에서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박 전 이사장이 법정에서 진술 번복 이유를 묻는 검찰 질문에 "(최 의원의 지시 또는 청탁을) 말한다고 상황이 뭐가 달라지겠냐고도 생각했다. 청탁자는 처벌받지 않는 거로 생각했다"고 답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박 전 이사장은 결국 생각을 바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 진술을 번복한 것으로 보인다. 현 정권의 임기가 1년 6개월밖에 안 남은 데다, 특히 4·13 총선을 거치면서 최 의원의 위상이 많이 위축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한때 정권 최고실세였으나 아랫사람의 법정진술로 명암이 교차한 유사 사례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전 의원은 코오롱그룹으로부터 의원실 운영경비 명목으로 매월 250~300만원씩 모두 1억575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 됐었다. 2012년 11월2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형사재판에서 이 전 의원이 코오롱 자금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여부가 관건이었다.
이상득 전 의원도 전 보좌관의 법정진술로 불법 정치자금 엮여
재판 증인으로 출석한 박 모 전 보좌관은 “의원실 운영비 수입·지출 내역을 보고할 때 코오롱에서 받은 돈을 ‘운영비’로 정리해 보고했다. 돈이 3~4차례 증액된 적이 있는데, 내용이 변할 때마다 사후적으로 보고했다”고 말했다. 박 전 보좌관은 검사가 “이 전 의원이 ‘코오롱에서 받은 돈은 의원실 직원들이 개인적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제가 ‘어떻다’ 말씀드리긴 힘들다. 나의 진술대로 하겠다”고 답했다. 당시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이 전 의원은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게 당시 언론보도 내용이다.
‘위’로 ‘공’을 넘기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독박’ 쓰는 구조
두 사건의 공통점은, 문제가 된 법정진술의 당사자가 ‘위’로 ‘공’을 넘기지 않으면 본인이 ‘독박’을 써야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최 의원과 이 전 의원은 해당 불법행위에 대해 본인들은 무관하다는 입장이었다. 최 의원은 인사 청탁 내지는 지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전 의원은 코오롱 자금이 의원실로 들어오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맞다면 각각 박 전 이사장이 독단으로 부정채용을 강행했고, 박 전 보좌관이 알아서 뇌물을 수수했다는 의미가 된다. 본인들도 나름대로 버티거나 고민하다가 궁지에 몰리자 언론이 지켜보는 법정에서 ‘그것이 아니다’고 부인한 셈이다.
두 사건의 차이점은 중진공 부정채용 건의 경우 ‘신·구(新·舊) 문화’가 충돌하는 접점에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박 전 이사장 진술대로 최 의원이 인사청탁을 했다면 구시대적 ‘의리 문화’의 어두운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성씨(姓氏)도 다른 인턴 직원에게 새 일자리를 챙겨줘서 얼마나 대단한 대가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이 4년간 데리고 있었던 직원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꼼꼼히 챙겨준 것도 이례적이다. 최 의원은 박 전 이사장과 독대 당시에 “외부위원이 나중에 문제제기 할 수 있어 의원님께 누(累)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을 듣고도 “그냥 하라”고 했다는 박 전 이사장의 말이 맞다면, 본인도 상당한 위험부담을 느꼈을 텐데도 입장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새누리당 의원들 중에는 보좌진 대하기를 하인 부리듯 하는 귀족 취향의 소유자들이 적잖다는 지적에 비춰보면 다른 각도에서 볼 만도 하다.
박철규 전 이사장, 신·구 문화의 충돌지점에서 진퇴양난
이에 반해 중진공의 인사체계에는 나름대로 신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직 수뇌부의 지시가 떨어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일사천리로 인사부정이 자행되던 시절이 있었다면, 지금은 많이 청산된 것으로 보인다. 황 씨는 1차 서류전형에서 2299등을 하자 두차례 서류조작을 통해 1200등과 176등으로 뛰어올랐다. 2차 인·적성 검사에서도 황 씨는 164등이 나오자 또다시 조작을 통해 합격선인 36등 안에 가까스로 들었다. 게다가 최종면접에서 외부 심사위원 중 일부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황 씨는 내부적으로 탈락이 결정됐으나 하룻밤 사이에 최종 합격자로 발표된 것이다. 박 전 이사장과 최 의원의 독대가 중간에 있었다. 그러나 합격자로 둔갑하기 위해 수차례 서류조작과 심사위원 반발을 거쳤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중진공의 조직문화에는 구태의연한 방식이 통하기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박 전 이사장은 구시대적 인사청탁과 신시대적 인사체계 중간에 끼어 진퇴양난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최 의원과는 행정고시 2년차 선후배 사이로 경제기획원에서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는 데다 고향도 같은 경북이어서 평소 ‘보통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건이 불거진 뒤 우여곡절 끝에 박 전 이사장 본인에게 ‘폭탄’이 떨어지자 실무자인 권모 전 운영지원실장에게 넘겼다. 지난 2월 첫 공판 당시에 박 전 이사장의 변호인은 같은 피고인 신분인 권 전 실장을 겨냥해 “(황 씨 등을) 적절한 범위 내에서 잘 봐주라고 한 것이지 부정한 방법으로 하라는 지시는 없었다”고 주장했었다. 그렇지만 권 실장이 ‘위로부터 부정채용 압력이 있었다’고 맞서면서 ‘폭탄’을 받을 생각을 않자 박 전 이사장 본인도 ‘자폭’을 거부하고 위로 내던져버린 셈이다. 고시 합격 이후 정통 경제관료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공공기관의 수장에까지 올랐으나 신·구 문화의 충돌지점에서 희생양이 돼버린 셈이다.
‘김영란법’ 정착으로 ‘애먼 사람’ 줄여야
오는 28일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을 두 사건에 적용하면 박 전 이사장이 주장한 인사청탁은 ‘부정청탁’에, 이 전 의원이 받은 코오롱 자금은 직무 관련 여부와 관계 없이 ‘불법금품’에 각각 해당된다. 박 전 보좌관은 당시 법정에서 “코오롱 측에서 돈을 받는 것이 위법한 것인 줄은 몰랐다”고 말했으나 김영란법이 시행 중이었다면 그런 말은 안나왔을 것이다. 부정청탁과 불법금품을 금지하는 신문화가 정착돼 ‘애먼 사람’을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前 영남일보 서울 정치부 기자
現 시사오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