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우수에 젖고 싶다면, 슈베르트의 트리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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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우수에 젖고 싶다면, 슈베르트의 트리오를…
  • 김선호 음악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9.29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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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의 지구촌 음악산책(1)>"트리오를 들으면 온 세상의 번뇌가 사라진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김선호 음악 칼럼니스트)

 꼭 연주해보고 싶은 음악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감독 베르날도 베르톨루치가 1969년도에 만든 영화 <순응자(IL CONFORMISTA)> 는 당대의 의상과 파시즘적 건축양식, 그리고 미장센, 배우들의 연기 등이 너무나 뛰어나서 교과서적인 영화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의 오마주로 만들어진 영화가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1972년 작 <대부(GOD FATHER)>이기도 하다. 필자 같이 좀 모자란 사람은 이 영화가 그렇게 훌륭한 영화인지 잘 몰랐다. 그 이유는 스토리텔링만 따라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나온 대사 한마디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예쁜 엉덩이를 가진 여자를 보기 위해 돌아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좋은 곡이 있다면 그 곡을 꼭 한번 연주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이 역시 아주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는 가장 연주해보고 싶은 곡이 바하의 ‘골드베르그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이다. 간이 부어도 배 밖으로 나올 만큼 부은 것이다. 피아니스트들이 악보를 외우는 ‘암보’와 ‘연주시간’, 그리고 ‘곡의 내재적 인스피레이션‘을 고려할 때 가장 어렵다고 하는 곡이 바로 ’골드베르그 변주곡‘과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Diabelli Variations)‘이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는 정도이다.

그런데 음악적 재능도 없고, 또 피아노 건반이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르는 필자가 감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간이 배밖에 나와도 한참 나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뭐 개꿈은 꿀 수 있는 것이니 그렇게 계속 개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골드베르그 변주곡 중에 맨 처음 나오는 ’아리아(Aria)‘는 어쩌면 죽기 전에 실현 가능할지도 모른다. 비교적 쉽고 느리고 짧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꿈은 항상 유효하다. 설령 그 개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꿈은 꿈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개꿈은 행복하다

▲ 슈베르트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두번째로 연주해보고 싶은 곡이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929번 Op100의 2악장 ‘Andante con moto’ 이다. 그런데 겁도 없이 이 곡을 연주하고 싶다고? 참 지나가는 개가 웃을 가당찮은 일이다. 아무리 개꿈이지만 너무나 가당찮은 개꿈이다. 그러나 이렇게 개꿈이라도 꿀 수 있으니 행복하다. 슈만이 그랬다. "슈베르트의 트리오를 들으면 온 세상의 번뇌가 사라진다" 고. 그런데 실현 불가능할지라도 그것을 연주하고 싶다고 꿈꾸면 번뇌가 사라지는 차원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슴 벅찬 희망이 된다.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1827년 11월 이 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 해 <겨울 나그네>를 동시에 완성하였고, 이듬해 1828년에는 <백조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리고 사망했다. 슈베르트의 사망 원인은 장티프스, 식중독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증세로 보아 매독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모양이다. 당시 기록으로 보면, 기억력이 감퇴되고 헛것이 보이며 혼잣말을 하는 등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다가 이틀 뒤인 11월 19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또 매독의 확실한 발병 증거가 1822년 12월 머리에 생겨난 매독진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망 진단서에는 슈베르트의 사인이 신경열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경열은 헛소리, 불면증, 의식 장애 등과 같은 뇌 이상 증상인데, 실제로는 매독 말기에 보이는 의식 장애, 위치 감각 마비, 극도의 피로감, 구토, 식욕 감퇴와 같은 증세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결국 가난하고 병약했던 슈베르트는 죽은 후, 당시 그를 돌보던 둘째 형 이그나츠가 베토벤의 옆에 묻어주고자 제안하여 빈 중앙 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묻혔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 피아노 트리오를 그가 작곡한 많은 곡 가운데 가장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이 곡은 1828년 3월 26일 슈베르트가 직접 피아노 연주를 하며 초연되었고, 당시 평론가나 청중들의 평도 꽤나 좋았다고 한다. 때문에 슈베르트는 본인이 직접 출판 교섭에 나섰다. 그리고 라이프치히의 프로프스트에서 출판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이 국외에서 출판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피아노 트리오는 모두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제 2악장 ‘Andante con moto’는 대중적으로 가장 알려진 악장이다. 본래는 스웨덴 민요 `해가 진다'에서 따온 악상이라고 한다. 심연으로부터 천천히 가슴을 흔드는 슬픈 첼로의 선율과,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듯한 피아노 반주의 울림은 처절한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킨다. 그리고는 또 순서를 바꿔 피아노가 앞서서 무겁게, 그리고 첼로는 더 무거운 목소리로 뒤를 받치며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마도 죽기 전의 슈베르트가 그렇게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가슴 깊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활이 아닌 손으로 뜯는 바이올린과 첼로의 피치카토 선율은 신과의 교감하는 탄지의 언어처럼 들린다.

영화음악의 OST로...

2악장이 영화 음악으로 사용된 경우는 제법 많다. 참으로 아름답고, 또 우수에 젖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한 멜로디 때문일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1975년 작 '배리 린든(Barry Lyndon)'이다. 이 영화는 18세기 중엽을 배경으로, 사기도박을 일삼으며 상류사회를 기웃거리던 아일랜드 출신의 한 청년이 아름다운 여백작과 결혼해, 꿈을 이루는 듯 하다가 몰락하는 '인생은 새옹지마' 같은 스토리이다. 영화를 보다가 떠오르는 말은 이렇다. “거봐 임마 ! 까불지 말고 잘 나갈 때 조심하라고 했잖아”

영화에서 배리가 전투에 나가서 총을 들고 적진을 향해 나아나는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 그리고 린든 여백작과 처음 마주 앉은 배리가 촛불 조명 속에서 도박을 벌이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 바로 이 아름답고 비장한 음악이 2악장이다. 

▲ 촛불 조명을 사용한 큐브릭 감독의 영화 ‘배리 린든’.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큐브릭 감독은 영화의 전편에 걸쳐서 중세 귀족들을 조롱하고, 또 인간의 권력과 부에 대한 욕심을 비웃는 냉소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또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라 할 만큼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촛불 조명 장면이 압권이다. 배리린든에서는 실내 촬영 때 전기가 아닌 촛불 조명만을 이용했다고 한다. 촛불은 전기 조명에 비해 조도가 워낙 낮아 촬영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큐브릭 감독은 NASA에서 천체 관측에 사용하는 특수 렌즈를 카메라에 장착, 아름답고도 따뜻하고 오묘한 화면을 연출하고자 했다. 한편 지난해 11월19일부터 금년 3월 1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스탠리 큐브릭전>에서도 이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2악장은 전시회의 주제 음악처럼 흘러나왔다.

이외에, 조금 변태적인 느낌을 받는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그리고 국산 영화로는 <해피엔드>에서 2악장이 사용되었고, 헐리우드의 B급 액션영화 <메카닉>에서도 사용되었다. 이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메카닉>에서 LP판과 벨트 드라이브 턴테이블, 그리고 진공관 앰프를 통해 피아노 트리오 2악장이 흘러나올 때 마다 살인 청부업자가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부분이 있었다. 아무튼 B급 영화라 할지라도 그 묘한 분위기가 참으로 음악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고 싶은 야무진 개꿈은 트리오를 받쳐줄 첼리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가 없기 때문에 더욱 요원하다. 하지만 연주하지 못하는 핑계로써는 딱 좋은 핑계이다. 같이할 연주자가 없어서….

김선호 / 現 시사오늘 음악 저널리스트

- 한국외국어대학교 문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 월드뮤직 에세이<지구촌 음악과 놀다> 2015
- 2번째 시집 <여행가방> 2016
- 시인으로 활동하며, 음악과 오디오관련 월간지에서 10여 년 간 칼럼을 써왔고 CBS라디오에서 해설을 진행해 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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