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8.18 금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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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 散策]이인제, ˝난 철새가 아니다…정치학살 당한 것˝
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
˝밀어붙인 고용노동보험, 사회안전망으로 ˝
˝97년 昌과 DJ가 동시에 누명 씌워˝
˝다음 대선,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
양극화 해소·통일 위해 기꺼이 기름될 것
2016년 10월 13일 (목) 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 /정리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이인제 전 선진통일당 대표 / 정리 김병묵 기자)

정치를 시작한 뒤, 약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맞는 휴식기다. 쉬지 않고 달려오는 동안, 어떤 정치인보다 다양한 별명과 이미지를 가지게 됐다.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정치인, 선거에서 패하지 않는 불사조, 당적(黨籍)을 수집하는 철새…. 덕분에 잠시 여의도를 떠난 지금도, 거리에선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거나 스스럼없이 악수를 청해주시는 시민들이 연령을 불문하고 꽤 많다. 그러나 사실 이런 수식어들은 내 정치인생의 일면을 희화화(戲畫化) 한 것에 불과하다. 기자가 지적하길, 이러한 이미지가 나를 상징하는 것처럼 된 데에는 변명이나 해명을 좀처럼 하지 않는 내 정치 스타일이 한 몫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잠시 지면을 빌려 내 정치역정의 소회(所懷)를 짧게 털어놓고 가려 한다.

   
▲ ˝정계입문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정당은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통일민주당 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여러 분들이 김영삼(YS)전 대통령과 함께하길 권했다.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상도동계가 나와 더 맞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YS의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DR)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중재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YS를 처음 만났다. '민주주의 발전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포부를 밝히자, 흔쾌히 받아줬다.˝ ⓒ시사오늘

YS와의 만남, 그리고 정치입문

6‧10 항쟁으로 민주화의 물꼬가 터졌을 때다. 학창시절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판사를 지내고 변호사로 있던 나는 1987년 제도정치에 참여하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 해 여름으로 기억된다.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정당은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 통일민주당 밖에 없었다. 김영삼(YS)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분열하기 전이니까. 이제 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데, 주변에서 여러 분들이 YS를 권했다.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상도동계가 나와 더 맞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YS의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DR)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중재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YS를 처음 만났다. “민주주의 발전과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포부를 밝히자, 흔쾌히 받아줬다.

그리고 곧 제13대 총선이 치러졌다. 내가 서른아홉 살 때다. 처음 경험하는 선거라 어려움이 많았지만, 당시 출마했던 안양 주민들이 젊고 참신한 인물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래서 통일민주당이 제3당으로 밀려나는 등 좋지 않은 결과를 받은 와중이었지만 나는 당선됐다. 그렇게 들어간 13대 국회의 어젠다는 5공화국 청산이었다. 5공 비리청문회와 광주민주화운동 청문회가 열렸었는데, 나는 광주 청문회에서 활약했다. 그 때 YS가 나를 고평가하면서 이례적으로 초선인데도 대변인을 맡게 됐다. 지금이야 초선 대변인을 보기 어렵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주요정당의 대변인을 맡은 초선의원은 내가 처음이었다.

초대 노동부장관 시절의 개혁

그런데 그 이전, 13대 총선의 공천 때는 YS가 내 존재를 잘 몰랐다. 그런데 광주청문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4년 내내 노동위원회에 자원해 들어가서 열심히 일했다. 그 때 노동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권위주의 시대에 억압됐던 노동문제들이 곳곳에서 분출됐다. 노동문제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눈여겨 본 YS가 문민정부 출범하면서 초대 노동부장관으로 나를 지명했다.

나중에 YS와 대화를 나누다 알게 됐지만, 당시 내게 내정한 자리는 노동부장관이 아니라 서울시장이었다. 그런데 내 선거구였던 안양은 야세가 강해 서울시장을 하면 국회의원을 그만 둬야 하니까 노동부 장관으로 선회한 거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성공이었다. 나는 많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10개월간 재임하며 중요한 법안만 13개를 제정하거나 개정했고, 고용보험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부처들, 그리고 재계가 다 반대했다. 하지만 내가 ‘미뤄선 안 된다. 약속한 일이다’라고 고집을 부려서 통과된 거다. 그 때 경제부처에 끌려 다니던 노동부의 위상도 어느 정도 정립시켰고. 이후 이 고용보험제도는 IMF사태가 터져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벌어졌을 당시 강력한 사회안전망으로서 작동했다. DJ가 사태 수습 과정에서 '고용보험제도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그리고 직업훈련제도도 뜯어고쳤다. 지금도 노동시장은 계속 변화하고 있지만, 그 때도 이미 한 사람이 한 직장에서 평생 한 가지 기술로만 일하는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민정계 포위 뚫고 대중경선통해 초대 경기지사로

1995년 지방자치가 실시되면서, 처음으로 지방선거도 치러졌다. 나는 경기도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었지만, 도지사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을 때다. 청와대에서 생각을 해 보니, 영남과 호남은 대체적으로 세력이 정해져 있고 문제는 수도권이다. 그런데 서울은 사실상 승리하기가 어려워 보였고, 경기도에선 관선지사를 지낸 임사빈 전 의원이 출마를 희망했는데 당선이 불확실했다. 내가 출마하면 당선이 확실하다는 결과가 자꾸 나오니까 당에서 내게 출마권유를 해왔다.

하지만 내가 나가도 경선은 첩첩산중이었다. 관선지사를 오래 한 임 전의원과, 민정계의 대부가 된 이한동 전 총리가 민정계 경기도정치세력을 이미 형성한 상태였다. 43개 지구당에서 민주계는 김문수 전 지사를 포함해서 나까지 7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심한 결과, 충청도 출신인 내가 도지사를 하려면 낙하산으로는 힘을 받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당에 요청했다. 당시엔 많아봐야 수 백명의 대의원들로 경선을 치를 땐데, 만명으로 확대하자고 주장했다. 그래야 정통성을 가진 후보가 되고 본선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사실 이게 최초의 대중적 경선의 시작이다.

간발의 차로 후보가 됐다. 267표 차였다. 여기서 떨어진 임 전 의원이 본선에서 무소속 출마, 20%를 가져갔지만, 결국은 최종 승리했다. 도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도지사가 된 것은 내가 최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경북 출신 김문수 전 경기지사 외엔 예외가 없다.

가끔 사람들이 내가 YS의 낙하산으로 후보가 된 줄 알지만, 이는 잘못 알거나 아예 모르고 있는 이야기다. 최초의 대중경선을 통해서, 그것도 신승(辛勝)을 거치면서 당선된 도지사였다.

'깜짝 놀랄만한 젊은 후보' 사건

1997년 대선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언급할 부분이 있다. YS가 후계자로 나를 지목했다는 루머와, 보도에 대해서다. 1996년의 일인데, 이 일의 내막은 이렇다. 김한길 전 의원이 유명 방송인이던 시절, 청와대에 부인 최명길 배우와 초청받아서 오찬을 했다. 그 대화하던 중에 김 전 의원이 다음 대통령 후보는 누구냐고 하자, YS가 지나가는 말로 ‘깜짝 놀랄만한 젊은 후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김 전 의원이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에게 말했고, 산케이신문이 취재를 시작했다. 취재 중 어느 유력 일간지 회장이 ‘그건 틀림없이 이인제다’라고 지목했고, 그래서 산케이 신문이 보도를 낸 거다. 그래서 나는 기사를 보지도 못 했는데 새벽에 아는 기자가 전화가 와서, ‘이런 보도가 났다’고 알려주며 진위 여부를 확인해서야 파악했다.

   
▲ ˝노동부장관으로 10개월간 재임하며 중요한 법안만 13개를 제정하거나 개정했고, 고용보험법을 최초로 도입했다. 당시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경제부처들, 그리고 재계가 다 반대했다. 하지만 내가 ‘미뤄선 안 된다. 약속한 일이다’라고 고집을 부려서 통과된 거다. 이후 이 고용보험제도는 IMF사태가 터져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벌어졌을 당시 강력한 사회안전망으로서 작동했다. ⓒ시사오늘

1997년, 대선 경선의 진실

당내 주류는 민정계였다. 이들이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고 밀어붙이고 있었다. YS는 레임덕이 와서 이미 당 장악력이 붕괴된 상황이었다. DR이나 나 같은 순수 민주계는 이미 소수파로 몰렸고, 이수성, 이홍구, 박찬종 등도 따로 행동하는 상황에서 경선 전날 군소후보들의 합의가 이뤄졌다. 1차 투표에서 2위를 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자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 내가 2위를 한 거다. 그야말로 깜짝 2위였다. 후보들은 모두 자신이 2위를 한다고 생각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인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여기서 바로 결선투표로 들어갔으면 100% 내가 됐을 거다. 현장 분위기가 그랬다. 문제는 이한동 후보가 나와 6표 차이였는데, 재검표를 요구했다. 그래서 3시간, 4시간을 잡아먹는 동안 너무 덥고 식사도 못 한 대의원들이 가버렸다. 약속도 깨지고 분열하고 하는 통에 분위기가 다시 바뀐거다. 재검표 결과도 똑같게 나오자 이번엔 이한동 지지자들은 가버렸다. 그 결과 2차 투표에서 59대 41로 내가 졌다. 아쉬운 일이지만, 이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경선에 불복해서 나갔다는 이야기는 헛소문이다. 그 당시엔 국민여론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부족했다. 기성정치인들은 과거의 권력정치, 보스정치에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두 배 이상 압도하고 있었지만, 다들 당내세력관계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쉬움은 왜 없었겠나. YS의 민주화도 완성을 해야 했고. 하지만 나는 받아들였다. 나이도 아직 젊고, 무리할 이유도 없었다. 3일 후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이회창 후보 환영대회에 참석해서 나는 지지연설도 해줬다. 내 지지도가 순식간에 흡수되면서 지지율이 50%를 넘기더라. 그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1997년, 대선 본선의 내막

그런데 갑자기 터진 것이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다. 55%에 육박하던 지지율이 순식간에 10%미만으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급전직하다. 다시 올라가나 했는데 올라갈 기미가 전혀 없고, 추석까지 쭉 이어졌다. 이회창 후보에게 흡수됐던 지지는 다시 갈 곳을 잃고 서서히 나한테 모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 같으면 후보를 교체했을 거다. 국민이 버렸는데 다른 말이 무슨 필요가 있나.

그런데 그 당시 신한국당 주류들의 생각은 상대는 DJ라는 ‘상수’였고, '누가 나가도 이긴다. 민심은 의미가 없다'는 논리를 계속 펼쳤다. 내 판단에선 이건 필패(必敗)였다. 고민은 계속됐다. 이제 시대는 변했고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탈냉전 시대가 도래 했는데 구시대 정치의 상징인 DJ가 당선을 목전에 뒀다고 판단했다. 나야 다음에 기회가 또 있을지도 모르지만, 세계적인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이회창으로 그대로 가면 패배에 이어 세대교체도 실패하고, 국가적 실기(失機)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국민신당을 만들고 나가게 된 거다. 이와 관련된 여러 루머가 있지만, 나머지는 사실이 아니다. 이 흐름이 당시에 사건의 중심에서, 직접 판단했던 내가 직접 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다. 도지사를 그만둔 뒤, 사실상 출마를 기정사실화 하고 11월 4일에 국민신당 창당대회를 예정했다. 이미 국민지지도는 내가 1위였다. 보통 천 명을 하는 여론조사를 정밀도를 위해 5천명을 돌렸을 때, 내가 38%, DJ가 36%, 이회창이 17%였다. 그게 10월 말의 상황이었다. 내가 11월 초에 전당대회를 하면 컨벤션 효과로 격차를 벌릴 여지도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 때 DJ의 입장이 바뀐다. 그 전까지는 DJ측은 내가 출마를 그만둘까봐 겁을 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젠 주적으로 올라서 버린 셈이다. 이회창 쪽에선 어차피 나를 주저앉혀야 하는 상황인지라, 나는 두 사람의 공적(公敵)이 됐다. 그래서 두 진영의 합의 여부까진 내가 알 수 없지만, 전당대회를 앞두고 두 당이 동시에, 11월 2일 아침 10시에 대변인들을 시켜서 ‘내가 YS로부터 200억 원을 받았다. 내일모레 창당되는 국민신당은 YS신당이다’라는 발표를 냈다. 그리고 모든 언론, TV와 신문들이 일주일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최고조에 올랐던 YS에 대한 반감을 이용한거다. 나를 정치적으로 학살 한거다. 민주주의사에 수치스러운 역사다. 모든 매체들이 폭포처럼 새빨간 거짓말을 쏟아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YS는 내게 돈도, 조직도, 어떤 것도 지원해주지 않았다. 심정적으로야 ‘YS 화형식’같은 것을 하는 이회창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나를 응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은 YS는 오히려 나를 말렸다는 것이다.

당의 주류인 민정계가 압력을 넣자 YS는 나를 두 번 불러서 식사를 하면서 내게 불출마를 권했다. 과거 1970년 신민당에서 DJ와 치렀던 대통령 경선 이야기를 하면서, ‘그 때 억울했지만 나는 승복했고, 봐라. 결국 내가 먼저 대통령이 되지 않았느냐’고 설득했다. 젊고 기회가 많으니 이번에 선대위원장 같은 중책을 맡고, 되든 안 되든 자네에겐 기회가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난 ‘대국적으로 생각해보고 결정 하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라고 답하고 나왔다. 이것이 내막이다. 200억을 내게 지원한다? YS같은 큰 정치인이 그런 명분 없는 짓을 할 리가 없지 않나. 그러나 결국 세력도 없이 국민의 지지만 있던 나는,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완주했다.

첫 낙선 후, 방랑이 시작됐다

내가 낙선하자 당은 흔들렸다. 선거에서 떨어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게다가 나와 오랜 시절 같이 해온 동지들보다도, 다 같이 신한국당에 있다가 대선 승리를 위해 뭉쳤던 당이니 혼란은 더욱 컸다. 정권을 잡은 DJ 쪽에선 내부공작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가려 하고,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도 사람들과 개별접촉을 하며 각개격파를 시도했다. 교섭단체도 아닌 당을 더 이상 끌고 가긴 어려웠다. 정의당 같은 작은 이념정당들은 처음부터 비교섭단체의 어려움을 알고 시작한 이들이라 당이 유지가 되지만, 지붕 있는 집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가라고 하는 건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DJ당이든 JP당이든 결단을 내려달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신한국당은 한나라당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여전히 이회창이 당 총재로 있으면서 우리에게 적대적이었다. 반면 DJ는 정권은 잡았지만 여전히 소수였기 때문에 국가위기 돌파에 힘이 부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차피 한나라당에선 우릴 받을 준비도, 그럴 마음도 없다. 국가위기를 타개하는데 힘을 보태주는 것이 더 명분이 있지 않느냐고 결정했다. JP쪽에선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DJ와의 합당을 결정하고, 딱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중도개혁주의 노선, 그리고 지역패권주의를 넘는 전국정당 지향을 부탁했다. 그 이외엔 어떤 조건도 달지 않았다. 이게 받아들여져서 새천년민주당이 탄생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는 지켜졌다. 내가 중앙선대위원장을 맡아서 영남을 제외하고 DJ가 한번도 만들어보지 못한, 충청‧인천‧강원‧제주에서도 의석이 나오는 전국정당의 기반을 만들었다.

   
▲ ˝DJ와의 합당을 결정하고, 딱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중도개혁주의 노선, 그리고 지역패권주의를 넘는 전국정당 지향을 부탁했다. 그 이외엔 어떤 조건도 달지 않았다. 이게 받아들여져서 새천년민주당이 탄생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는 지켜졌다. 내가 중앙선대위원장을 맡아서 영남을 제외하고 DJ가 한번도 만들어보지 못한, 충청‧인천‧강원‧제주에서도 의석이 나오는 전국정당의 기반을 만들었다.˝ ⓒ시사오늘

2002년, 두 번째 경선과 DJ의 오판

2002년 경선에 대해선 내가 털어놓을 것도 없다. DJ의 의중에 따라 자신이 경선공작을 했다고, 현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이미 한 TV프로그램에 나와서 스스로 다 고백하지 않았나. 당시 정권의 영향을 받는 모든 매체, 여론조사 권력 등을 동원해서 나를 공중전으로 공격했다. 지상전이라면 내가 그런 공작에 무너질 수가 없었는데, 박지원을 필두로 한 공중전 융단폭격은 감당하기 어렵더라. 그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가 있지만, DJ는 북한 김정일에게 5억달러 가까이 안겨준 사실이 가장 걱정이었던 것 같다. 나도, 그 누구도 그 당시엔 몰랐지만 다음 정권에서 그 사실을 인수하게 될 거고, 그러면 나는 부담스러운 존재다. 사회나 노동, 경제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나지만 안보에 대해서는 늘 단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세력도 없는 노무현을 당선시키면 자신들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했던 것이라고 본다. 대북송금의 핵심 심부름꾼이었던 박지원은 그래서 더욱 안달이 나 있었던 것이고. 자신의 입으로 DJ를 스무 번도 더 만나서 노무현이 돼야 한다고 진언했다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경선이 뒤집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대북송금문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비서실장 문희상 의원을 통해서 공개했다. 그러자 국민들과 보수진영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성토했고 특검도 하지 않았나. 임기가 한 달도 안 남았던 DJ가 특별기자회견을 열어 통치행위라고 강변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폭로야 말로 DJ나 박지원으로서는 의외였을 것이다. 그게 사람이 하는 판단의 한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보수언론이나, 보수진영에서 폭로한 것이 아니지 않나. 순전히 내 추측이지만, 이는 노무현이 DJ의 손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를 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이런 이야기를 나는 처음 하는 것 같다.

다시 탈당, 고독한 신념고수의 길

내 탈당은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 안 된다는 인식에서 이뤄졌다. 내 동지들도 있었지만 나 홀로 결정한 일이고, 순전히 내 가치관을 지키기 위한 것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날 좋아할 리도 없고 정치공학적으로는 그냥 경선에 승복하고 함께 가는 게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순전히 나라가 거꾸로 가는 일이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움직였다. 이회창 캠프에서 도와달라는 요청도 있었지만 그럴 처지도 못 되고, 가담해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유일하게 그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변수는 JP였다. 그래서 내 발로 JP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JP한테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약 한 달 간. ‘그간 대한민국의 가치를 위해 정치를 해오셨는데, 대국적 견지에서 지금 이회창 쪽을 지지하지 않겠는가’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JP는 내 이야기에 흔쾌하게 응하지 않았다. 이회창에 대한 반감도 많이 있어선지, 마지막까지 중립을 고수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서청원 의원 같은 이들이 중간에서 중재를 하고 JP가 지원하겠다고 했었는데, 이회창 측에서 깼다고 하더라. 그것도 결국은 또 역사의 흐름 아니겠는가.

돌고 돌아서 다시 새누리로

몇 가지 우여곡절 끝에 나는 결국 이회창과 다시 같은 당에 몸담게 된다. 그건 지금의 새누리당에서가 아닌 충청도당에서였다. JP의 은퇴이후 자민련을 이끌던 심대평 전 자유선진당 대표는 이회창을 영입하면서 총재를 줬다. 이후에 다시 심대평-이회창 간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자유선진당은 위기를 겪는다. 19대 총선에서 5석밖에 없는 미니정당으로 전락했다. 그러고 대선이 시작되는데, 나도 급한대로 대표를 맡긴 했지만 우리 당에선 독자적으로 후보를 낼 역량이 없었다. 관망할 뿐이었다.

관망 중에 보니 문재인 후보가 생각 이상으로 치고 올라와서 놀랐다. 진보좌파보다는 보수우파정권이 잡아야 이 어려운 나라를 끌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당시 원내대표였던 故 성완종 의원을 통해서 새누리당과 접촉했다. 새누리당에서 한 번도 공식적인 도움 요청조차 없었지만, 보수우파의 승리를 위해 사실상 힘을 합치기로 했다.

그런데 새누리당의 당내 주류들이 통합은 곤란하고 연합을 하자고 했다. 우리 당세가 빈약한 상황에서, 집권 후의 계약서를 쓴다는 건 너무 옹색하지 않나. 우리가 권력을 나누기 위해서 힘을 합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조건 없이 큰 명분만 가지고 통합을 추진해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시 후보에게 보고했더니 좋다고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아무 조건 없이 통합했다. 심지어 우리 당은 돈이 남아있었다. 빚은 전혀 없었고, 합당 당시 오히려 7억인가 8억을 새누리당에 보태줬을 거다. 그렇게 이번 정권을 만들고 맨 처음에 나왔던 새누리당으로 돌아가게 됐다.

   
▲ ˝지금 벌어지는 사회경제적인 모순의 상당부분을, 통일의 역동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젊은이들의 일자리, 사회적 빈부격차, 이념의 양극화…모두 극복이 가능하다. 우리 닫힌 시장, 섬처럼 된 나라 안에서 모순을 극복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결판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시사오늘

돌아오는 대선, 그 어느때보다 중요하다

다시 또 대선의 계절이 돌아왔다. 다음 대선에서, 내년에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주어질 임무는 정해져 있다. 우선 내부적으로는 사회 양극화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지금 너무 격화된 양극화로 인해 사회 안의 긴장감이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다. 대외적으로는 남북관계의 해결, 구체적으로는 통일이다. 지금 남북관계는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명의 모순점에 도달해 있다. 2~3년안에 북한이 핵 보유국가가 되느냐, 북핵을 좌절시키고 평화통일의 길로 가느냐의 갈림길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면 어떻게 되겠나. 우리도 어떤 방법으로든 핵을 보유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남북한이 핵을 보유하면 통일은 멀어져 버리는 것 아닌가? 통일이라는 우리 경제발전의 최고패를 영영 잃게 되는 셈이다. 지금 벌어지는 사회경제적인 모순의 상당부분을, 통일의 역동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젊은이들의 일자리, 사회적 빈부격차, 이념의 양극화…모두 극복이 가능하다. 우리 닫힌 시장, 섬처럼 된 나라 안에서 모순을 극복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엔 한계가 있다. 결판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이 정국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상황으로 뚫고 나갈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게 다음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다. 여기에 제일 적합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는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되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은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내년 대선은 지난 어느 대선보다도 중요하다.

낡은 구도를 태울 수 있다면 기꺼이 기름이 되겠소

한국정치를 지배해온 낡은 틀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영남과 호남의 대결구도, 그리고 낡은 보수와 낡은 진보의 냉전구도다. 극성을 부리다가 요샌 많이 약화된 것 같지만 아직도 힘을 많이 갖고 있다. 내가 이들 낡은 구도 속에서 공동의 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안다. 나는 오직 미래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낡은 구도에 얽혀서 매사에 서로 싸우며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는 이들이, 앞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나를 용납하지 않아왔다. 나는 1997년에도, 2002년에도 그런 기득권 세력에게 공격을 당하고 좌절된 거다.

기득권 세력, 이들이 잘 하면 또 모르겠다. 남북문제도 대처를 못해서 이 지경까지 오고. 경제가 일본형 장기불황에 빠졌다는 사실은 이젠 아무도 반대하지도 못한다. 심지어 양극화는 거의 체념상태 아닌가? 지금 이 문제들을 어떻게 돌파하고 통일의 문을 열 수 있느냐. 나는 내 역할이 있다면 여기에 목숨을 바쳐서 도구가 될 각오가 늘 있다. 낡은 구도 세력에 의해 희화화되고. 조롱당하고. 그런 나기에 오히려 기름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싶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게 철새라고 한다. 낡은 구도에서 붙여준 이미지 그대로다. 때론 내 신념에 따라 움직이기도 했지만, 이 부분 내가 정치판에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겨서 밀려 다녔다는 생각은 아예 못 할 것이다. 내가 북한 노동당에 다녀온 것도, 일본 자민당에 갔다온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최소한 명분이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고, 나의 신념이나 주장을 후퇴시켜본 일이 없다. 다음 대통령에게 지어질 시대적인 소명은 무겁다. 그리고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은, 최소한 낡은 구도에 기대어 양지 속에서 성장한 인물은 아닐 것 같다.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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