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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서거 1주기②]50년 정치 인생, 아름다운 투쟁史
자유당 탈당 이후 계속된 반독재 투쟁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2016년 11월 18일 (금) 정진호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1987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 나선 YS ⓒ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IMF. 역사는 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을 단 세 자의 알파벳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부른 대통령’ 이전에 YS는 군사독재라는 암흑 속에서 제 몸을 태워 빛을 비추던 촛불이었고, 총칼로 입을 막던 시대에 권력과 맞서던 투사였다. 혹자는 말했다. “YS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에는 아직 민주화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시사오늘〉은 YS 서거 1주기를 맞아 마치 히어로 영화를 연상시키는 YS의 치열한 민주화 투쟁기를 소개한다.

◇정계 입문 직후 시작된 반독재 투쟁

1954년, YS는 제3대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 공천을 받아 경남 거제군 국회의원이 된다. 이때 그의 나이 만 26세.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에 자유당 소속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등에 업은 YS 앞에는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불의를 용납지 않는 혁명가적 기질은 YS를 ‘꽃길’에서 이탈하게 만든다. YS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이른바 ‘사사오입’ 원칙을 내세워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미련 없이 자유당을 탈당해 야당 정치인 생활을 시작한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장군이 중심이 된 군부는 장면 내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다. 장면 내각 수립 후 불과 9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때 신민당 원내부총무였던 YS는 고향 거제도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상경한다. 그리고 ‘군의 정치참여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며 군정을 비판하다가 1963년 3월,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발표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동참한다. 이때 YS는 군정연장 반대 데모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에 ‘정적’으로 각인된 YS는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다. 제70차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3선 개헌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며 개헌 작업 중단을 촉구한 YS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 ‘초산 테러’를 당했다. 중앙정보부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청년 3명이 YS가 타고 있는 차 뒷문을 열려고 하다가, YS가 차량을 몰고 가자 주머니에서 초산 병을 꺼내 차량에 던진 것. 오른쪽 뒷문과 뒤 창 사이 철판에 부딪힌 초산 병은 차량 일부와 아스팔트 바닥을 녹일 정도로 강력했다.

◇반유신투쟁

1972년 10월, 하버드대학교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YS는 급히 귀국길에 오른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고도 김대중 후보에게 신승(辛勝)하는 데 그친 박정희 대통령이 헌법을 고쳐 국민의 대통령 선거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YS는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귀국을 선택했고, 박 대통령은 그를 가택연금하며 손발을 묶어버린다. 길고도 처절한 민주화 투쟁의 시작이었다.

1974년 8월, YS는 유진산 당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신민당 총재에 취임한다. 이때 YS의 나이 만 45세. 최연소 야당 총재가 된 YS는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을 향해 반유신투쟁을 선언하고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거부운동을 전개한다. 1975년에는 신민당 총재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개헌 논의를 금하고 있는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라”고 촉구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된다.

◇YH 사건

1979년에는 이른바 ‘YH 사건’으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기도 한다. YH 사건은 가발 수출회사인 YH 무역 여성 노동자 172명이 서울시 마포구에 있는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에 돌입하자, 박정희 정권이 경찰을 보내 강제 진압한 사건이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YS는 신민당 당사를 찾은 YH 무역 여성 노동자들에게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고 보호에 나섰다.

YS와 신민당 의원들은 당사 주변을 순찰하다가 박정희 정권이 보낸 정보과·보안과 형사들을 발견하면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때렸다. 경찰이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하자 YS는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장을 만나 “너희들이 저 여공들을 다 죽이려 하냐”며 뺨을 올려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 2000여 명이 동원된 진압 작전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YH 무역 노동자들은 모두 강제 연행되고, YS 역시 경찰에 의해 상도동 집으로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YS는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비참하게 쓰러질 것”이라며 박정희 정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또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카터 행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소수 독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끝내라”며 “미국이 점점 더 국민으로부터 소외된 독재 정권이냐, 아니면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다수냐를 분명하게 선택할 시점이 왔다”고 주장했다.

◇의원직 제명

이러자 박정희 정권은 YS가 “헌정을 부정하고 사대주의 발언을 했다”며 YS의 의원직 제명안을 제출, 10월 4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킨다. 의원직 제명 직후 신민당 의원들은 흥분하며 반발했지만, YS는 “나는 쫓겨나지만 여러분들은 남아서 민주주의를 지켜 달라”며 국회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도 바로 이때 탄생했다.

YS의 의원직 제명은 박정희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 됐다. YS가 제명됨에 따라 야당 국회의원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했고, 이것이 국민의 분노를 촉발해 ‘부마민중항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시발점은 부산이었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유신 철폐’를 주장하며 민주화 시위를 시작했다. 17일에는 시민들이 합류,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20일에는 근로자와 고등학생까지 시위에 합세하면서 마산에 위수령이 선포됐다.

부마항쟁은 정권 내 갈등도 유발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부마항쟁에 대해 ‘단순한 학생시위가 아닌 민중봉기’라고 보고하자,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1976년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언급하며 민중 학살을 예고했다. 이에 내재했던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이 폭발, 10·26이 발생했다. 10·26은 YS의 의원직 제명이 낳은 나비효과였던 셈이다.

◇23일간의 단식투쟁

10·26으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지만, YS의 민주화 투쟁은 계속됐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고, 1980년 9월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올라 군사정권을 연장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을 시켜 YS의 정계 은퇴를 강요한다.

1981년, YS는 이민우·김동영·최형우·김덕룡 등 정치활동 규제를 받던 재야인사들을 규합해 ‘민주산악회’를 출범시킨다. 산악회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민주산악회는 사실상 민주화투쟁을 위해 결성한 정치단체였다. 실제로 민주산악회는 주요 정치사건 때마다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활발히 정치활동을 벌였고, 군정종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1983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년 되는 날을 맞아 YS는 △언론 통제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선언한다. YS가 단식에 들어가면서 부인 손명순 여사는 외신 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단식 소식을 전했고, 로이터·AP·교토통신 등은 일제히 국제사회에 이를 보도했다.

언론 통제로 언로가 막혀있던 국내에는 재야인사들이 대학가와 골목을 돌며 ‘김영삼 총재 단식 돌입’이라는 유인물과 전단지를 뿌리기 시작했다. 미국에 있던 DJ 역시 ‘김영삼 총재 단식투쟁 전 미국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 YS 지지 운동을 펼쳤다. 이처럼 5·18 이후 잠시 잠잠해졌던 민주화운동은 YS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다시 불타오른다.

계속된 단식으로 YS의 건강이 악화되자, 전두환 정권은 연금을 해제하고 회유에 나선다. 그러나 YS는 민주화 5개항을 들어줄 때까지 단식을 멈추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잠시 해외로 나가라고 설득하는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에게 “나를 해외로 보내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라”고 일갈한다. 결국 YS는 함석헌·윤보선·김수환·문익환 등 재야인사들이 간곡한 권유를 한 뒤에야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다.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다.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이다”라며 23일 동안 지속된 단식을 중단한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직선제 개헌

1984년 5월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4주년과 YS 단식 1주년에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힘을 모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설한다. 민추협은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구 신민당 중진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 총선에서 총67석을 획득하며 제1야당으로 부상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YS와 DJ는 ‘민주제 개헌 1000만 명 서명 운동’에 나섰고, 두 ‘거목(巨木)’의 활약에 힘입어 개헌 운동은 전 사회적으로 확산된다.

국민적 개헌 요구에도,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임기 중 개헌은 불가능하므로 자신이 선택한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호헌 조치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불을 댕겼다. YS는 전두환의 호헌 발표를 정권연장 수단이라며 강하게 규탄하고, 대학생들의 호헌철폐 시위에 동조했다. 결국 이 해 6월, 전두환은 여당 총재 노태우에게 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게 한다. ‘5년 단임의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뽑는다’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일평생을 바친 YS의 민주화 투쟁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YS와 민주화 투쟁을 함께했던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 회장은 18일 YS의 일생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YS는 목숨 바쳐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씨를 뿌리고 가꾸고 피운 분”이라며 “32년이라는 시간 동안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부에서 목숨을 내놓고 지루한 싸움을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오랜 싸움 끝에 YS의 정의로운 철학이 이긴 것”이라면서 “그 덕분에 오늘날 민주주의가 꽃피게 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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