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27 월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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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 散策] 김덕룡, ˝민주주의 끝장이란 생각에 YS와 민주화운동 시작˝
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3당 합당 없었으면 군정종식에 결국은 실패했을 것˝
˝최순실 존재 몰랐지만 박근혜 반대위해 한나라 탈당˝
˝이 기회에 체제 혁신해야…정략적 시국 접근은 안돼˝
2016년 11월 19일 (토) 글 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 정리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글 김덕룡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 정리 김병묵 기자)

“민주주의여 만세.” 그리운 외침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듣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최근 다시 국민들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또 다시 격동의 시대가 온 것일까. 젊은 날을 민주화에 바치고, 정치인으로서 살아오면서 늘 시대정신에 대해 생각했다. 시대정신을 정확히 알고, 그것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의 책무 아닌가. 지금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며, 기자의 일문(一問)을 단초 삼아, 일답(一踏)마다 일답(一答)을 내놓는 과거로의 산책을 나선다. 9일 덕린재에서 나지막이 되뇌어 본다. 민주주의여 만세.

   
▲  "군사정권은 1969년에 3선 개헌을 자행했다. 이 나라 민주주의가 여기서 끝장이 나는게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비겁하게 살 수는 없었다.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70년 YS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패배한 후 비서실에 들어갔다" ⓒ시사오늘

YS와 인연 맺으며 민주화 운동 본격 시작

-민주화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1961년,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5‧16쿠데타가 났다. 4‧19혁명이 군에 의해서 유린되는 것을 직접 목도했다. 그 참담했던 기억, 젊은 시절의 분노가 생각난다. 나는 1965년 한일외교협상을 반대했다. 국교정상화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굴욕적인 회담에 분개했다. 역사의식 이라고 할까, 이 나라가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이었다. YS는 1963년부터 알고 있었다. 대학교 선배이기도 하고 해서 1년에 한두 번 만나서 대화하는 기회가 있었다. YS는 아마도 학생들의 동향, 생각의 흐름을 알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알고 지내다가 1967년에는 공천을 줄 테니 제7대 총선에 나가보라는 권유도 받았었다. 당시엔 내가 아직 공적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사양했다.

군사정권은 1969년에 3선 개헌을 자행했다. 이 나라 민주주의가 여기서 끝장이 나는게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비겁하게 살 수는 없었다.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70년 YS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패배한 후 비서실에 들어갔다. YS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분명했고, 패기만만했다. 민주주의에 대해 놀랄 만큼 확신을 가지고 가는 것이 내겐 큰 감명을 줬다. 그렇게 YS와 인연을 맺으며 내 민주화 운동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투옥은 내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했을 뿐

-YS의 비서실에서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다.

"1974년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유진산씨가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에는 피로 때문에 온 단순한 병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내가 나름 내 인적자원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해 보니, 암인데 심각하다고 했다. 그래서 전당대회 준비를 해야겠구나 생각하고 YS와 상의했다. 그리고 전당대회에 뛸 수 있는 조직요원을 내부에서 비밀리에 만들어 준비를 시작했다. 득표를 위해 홍보나 설득을 하려면 대의원 명단이 필요한데, 당시엔 이것이 대외비라 총재와 그 측근들만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입수가 쉽지 않았다. 명단을 입수해 가지는데 상당한 고생을 했다. 기본적인 활동 자금도 없어서 지방에 있는 대의원들 만나러 가기도 어려웠다. 빈손으로 방문할 수 없으니, 담배 한 보루, 고기 한 덩이라도 사가야 하는데 이것도 다 돈이 드는 일 아닌가.

당시는 교통이 불편해서 전북 무주 같은 곳을 다녀올라 치면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래도 대의원들을 집집마다 방문해서 설득하고 밥먹고 하면서 어렵게 운동을 했다. 정말 힘들었지만 YS의 당선이 민주주의를 앞당길 거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우리를 ‘빨치산’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우리는 스스로 '기능공'이 되자고 다짐했다.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당권을 얻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YS는 이철승씨에게 당권을 빼앗긴다. 그 때 정보기관에서는 ‘당권을 뺏으려면 김덕룡부터 (감옥에)넣어야 한다’고 했다 한다. 나는 형무소에 갔다. 간혹 내게 그렇게 자꾸만 신체의 자유를 구속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음이 꺾이거나 좌절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한다. 오기일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더 큰 사명감, 저항감이 발동했지만 위축되는 일은 없었다. 타협이나 회유도 많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 "그 때 정보기관에서는 ‘당권을 뺏으려면 김덕룡부터 (감옥에)넣어야 한다’고 했다 한다. 나는 형무소에 갔다. 간혹 내게 그렇게 자꾸만 신체의 자유를 구속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음이 꺾이거나 좌절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한다. 오기일지는 몰라도 실제로는 더 큰 사명감, 저항감이 발동했지만 위축되는 일은 없었다. 타협이나 회유도 많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시사오늘

"1980년 서울의 봄이 온 뒤에 5.17쿠데타가 일어나고 전두환은 우리를 정치규제로 묶었다. 비서실이 대폭 축소되는 등 암흑기가 오면서 YS의 비서진도 축소되고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정치인들이니 원내에 진출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할 것 아닌가. 박권흠씨 등은 민정당으로, 서석재, 신상우, 손세일 등은 민한당으로 갔다. 박권흠은 당시 상처(喪妻)후 재혼한 상황이었는데,‘용서해라, 내가 정치적으로 등을 돌린 것이 아니다. 취직해서 가는 거라 생각해라. 이해해 달라’고 말하더라. 내게도 회유, 협박 등이 있었다.

개인적인 기회도 있었다. 코엔 교수의 소개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연구원 자리를 제안 받기도 했다. 그런데 YS가 몇 사람만이라도 남아서 같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고민을 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익 때문에 이 어려운 시기에 떠나는 건 의리나, 또 양심에 어긋난다고 생각됐다. 그래서 포기했다. 돌이켜 보니, 쉬운 시절은 없었다. 그 전 해인 1979년 당권을 찾아오는 일도 드라마틱했다. YS와 김대중(DJ)의 접촉을 막던 중앙정보부가, 어찌된 일인지 전당대회 전날 단합대회를 하던 을지로에 있는 중국집 아서원에 DJ가 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인지 하늘의 뜻인지 감히 그 생각을 못 한 것 같다. DJ는 그날 YS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고, 이튿날 극적으로 승리하며 당 대표직을 되찾았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은 그렇게 시작됐다."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는지

"왜 없었겠는가. 매일 매일이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위기였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내내 아침에 집을 나가면서 든 생각은, ‘오늘 저녁은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였다.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 같은 것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체포되거나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까 싶어서였다. 수백 개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녀야 했다. 지금도 당시의 습관으로, 수십 년째 나는 수첩 대신 작은 메모지를 링에 끼워서 사용한다. 언제든지 뜯어서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정치규제에 묶여 있을 때 동지들과 호구지책으로 음식점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사무실도 못 열게 하고 하니 달리 모일 장소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청 뒤 무교동에 ‘사랑방’이라는 음식점을 열었는데 꽤 잘 됐었다. 맛이 있어서 시청 직원들도 꽤 왔고, 손님이 많았다. 그러나 ‘불순분자들이 드나드는 곳이다’‘거길 다니면 감시 대상이 된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경영이 어려워졌다. 우리 동지들 같은 돈 없는 외상 손님만 왔고, 우리가 음식점을 관리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문을 닫을 수밖에. 하지만 이는 이후에 민주산악회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로 가는 산실이 되기도 했다."

3당합당 없었다면 군부 잔존세력 계속 정치개입

-결국은 1987년 민주화를 쟁취했는데, 군정을 바로 종식시키진 못했다. 

"투쟁의 결과는 1987년 6월 항쟁과 대통령직선제로 이어졌다. 그런데 또 변수가 생겼다. YS와 DJ의 분열이다. 후보 단일화를 하기 위해, YS는 당시 DJ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미창당 지구당 위원장의 임명권을 DJ가 요구하는 대로 양보했다. 경선을 치르자고 했다. YS는 당시에 DJ가 적어도 당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DJ는 평민당을 만들며 나갔고, 1987년 대선서 패했다. 그런데 1988년엔 DJ가 주장한 소선거구제를 받았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속리산으로 달려가서 재고를 요청했다. YS는 낭패한 표정만 짓고, 어떤 설명도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나중에야 YS가 야권통합을 전제로 소선거구제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정작 야권통합은 실패했다. 그리고 통일민주당은 원내 3당으로 추락했다. 그래서 YS가 군정종식을 위해 꺼낸 카드가 3당 합당이었다."

   
▲  "3당 합당이 없었다면, 노태우 이후에도 상당기간 계속해서 군부 잔존세력이 계속 집권했을 거라고 나는 본다. 4당 체제로 분열된 야권에서는, 이종찬씨가 잡든 박태준씨가 잡든 지역분할구도를 이용해 틀림없이 군부의 기득권을 이어나가려고 했을 거다.혹자는 3당합당 없이도 YS나 DJ가 결국 대통령이 됐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시사오늘

-3당 합당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YS의 3당 합당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도 민주화의 투쟁선봉에 있던 당신이 어떻게 거기에 동의를 했느냐 이런 지적을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3당 합당이 없었다면, 노태우 이후에도 상당기간 계속해서 군부 잔존세력이 계속 집권했을 거라고 나는 본다. 4당 체제로 분열된 야권에서는, 이종찬씨가 잡든 박태준씨가 잡든 지역분할구도를 이용해 틀림없이 군부의 기득권을 이어나가려고 했을 거다.

그 땐 지역주의가 지금보다도 훨씬 심했던 시절이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겠다는 YS가 문민정부를 만들고, 결국 하나회를 청산하고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세우지 않았는가. 혹자는 3당합당 없이도 YS나 DJ가 결국 대통령이 됐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대권 후보로 분류됐었는데, 대망(大望)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문민정부로 제도적 민주화는 이뤄졌다. 하지만 문민정부 이후에도 질적인 민주주의는 아직도 미완이었다. 나는 지역 대립구도의 해소를 위해 그리고 정치개혁이라는 시대정신의 실현을 위한 밀알이 되고 싶었다. 간혹 내게 묻는다. 수많은 사람들을 발탁했고, 그들이 지금 정치권에서 활약하는데 대권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호남 출신이라서 지역주의의 피해를 입었는데, 서운하진 않은지 질문한다. 왜 아쉬움이 없겠는가. 인재 영입은 정치집단에게 늘 필요한 일이다. 특히 3당합당 이후, 군부독재와 통치시대에 있었던 사람들 외에 새로운 피가 필요했다.

민주화 투쟁 당시 상대적으로 나이든 사람들이 야권에 많았기 때문에 젊은 이성헌, 정병국, 김영춘 등을 영입했다. 이인제, 김태호도 불러들였다. 당시 이념적 지역적 문제들이 너무 많아서 집권정당이‘수구꼴통’이 되면 안 되겠다 싶어 데려온 것이 민중당이다. 이우재, 김문수, 이재오는 그 때 민중당을 해체시키고 영입했다. 다들 나와의 관계보다는, 각자의 정치를 위해 떠난 거다. 1997년 대통령후보 선거 땐 서운한 마음이 없진 않았다. 과거의 동지들, 특히 영남권 동지들이 내게 와서 ‘미안하다, 지역 사정이 그렇다’고 손을 잡곤 했다. 지역주의가 극에 달해 대구에선 ‘쌀에 뉘가 섞이면 안 된다. 대구에서 호남 사람을 위한 표가 한 표도 나와선 안 된다’라고 하던 시절이 그때였다. 정치의식이나 지형이 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어찌하랴. 나의 운명이고, 또 내 부족함 탓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졌다. 정치 혁신에 대한 마음을 더욱 강하게 먹었다. 그리고 당과 정치발전을 위한 일에 더 열성을 기울였다."

 지역주의, 운명인 것을 어찌하랴

-3당 합당 이후 쭉 몸담아왔던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내가 만든 거나 다름없는 정당이었다. 1997년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씨가 아들의 병역비리로 지지율이 추락했다. 선거가 두 달 여 남았는데 7%까지 떨어지더라. 당내에선 이재오, 서청원씨 등이 후보 사퇴를 요구했다. 그래서 내가 이회창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이대론 지는데 방법이 하나 있다. 꼬마민주당과 손을 잡는 거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기택씨가 총재였던 꼬마민주당은 조순씨가 대선후보였다. 그래서 내가 설득에 나서 대선을 한 달 남기고 통합전당대회를 열었다. 한나라당 이름도 조순씨가 지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회창씨가 당 총재 당시 나를 한나라당의 화운딩파더(Founding Father)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 한나라당을 지난 대선 때 내 발로 나왔다. 도저히 박근혜 후보를 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전, 2007년 한나라당내 경선 때도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원래는 중립을 지키려 했지만, 판세를 보아하니 박근혜 후보 쪽으로 기울더라. 그래서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MB측의 요청도 있었지만, 스스로 막판에 지지선언을 했다. MB가 특별히 좋아서가 아니었다. 최소한 나라를 위해서도, 당을 위해서도 박근혜씨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2012년 박근혜가 후보가 되자 나는 당을 나왔다.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문재인 지지 선언을 했다. 내가 평생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바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활동하면서 박근혜 당대표와 함께 한 세월 속에서 나온 나의 결론이었다. 국정에 대한 요해능력이 미흡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판단되었다."

내가 만든 한나라당 박차고 나온 이유

-그 당시 이미 최순실 등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나는 최순실씨를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늘 생각했다. 그런 판단을 내렸다. 당시에도 박대표는 우리가 모르는 참모 조직이 있다, 누군가와 중요한 순간에는 통화를 하곤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한때 김용환씨 같은 원로들에게 도움을 받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김용환씨를 만난 후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럼 누굴까 하는데, 일부에선 정윤회 정도를 추측한 사람도 있었다. 대통령 당선 되고 한참 후에야 박지만씨 주변 사람들이 정윤회는 사실 실세가 아니고, 최순실이다 하는 불평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결국은 폭로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지금 상황은 국민들이 분노를 넘어 자괴감을 느낄 정도다. 누구 말을 빌리면 봉건왕조시대 때나 있었던 일 아닌가. 외신들은 마치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나라처럼 표현하여 국가의 품격은 떨어지고. 선출 되지도, 최소한 임명받지도 않은 자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여 국민들은 화가 나고 많은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이 끝은 박근혜와 청와대만 바뀌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이 분노의 근저가 무엇인지 정치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같다. 기득권과 소위 돈 정치, 패거리 정치 그리고 불공정한 사회와 양극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다.

상식이 무너진 사회에 대해 국민 일반이 화가 나고 뭉친 거다. 조직화되지는 않았지만, 서로 눈빛을 맞춰 보고, 큰 공감대를 이루고 서서히 일어난 거다. 4‧13 총선도 그랬고, 미국 대선도 전 세계적 흐름에선 비슷하다. 트럼프 같은 사람이 후보가 되고 대통령에 당선되는가 하면, 자본주의 대표국가 미국에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가 힐러리를 몰아붙이는 일이 일어났다. 영국의 브랙시트는 또 어떤가. 말없던 다수 민중이 분노한 것이다. 지금 세계가 분노하고 변화하고 있다."

   
▲ "최순실 사태의 본질은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이지만, 오늘 여기까지 오게 만든 이 체제를 개혁하고 가야 한다. 재벌의 문제, 검찰의 문제, 언론과 지식인들의 문제, 낡은 헌법 이런 것들을 모두 혁신하고 가야 한다. 정치인은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고, 큰 흐름에서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결국 승리하고 평가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사오늘

국가 미래의 분수령, 체제개혁만이 해법

-해결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나.

"이 최순실 사태의 본질은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이지만, 오늘 여기까지 오게 만든 이 체제를 개혁하고 가야 한다. 재벌의 문제, 검찰의 문제, 언론과 지식인들의 문제, 낡은 헌법 이런 것들을 모두 혁신하고 가야 한다. 재벌은 권력이 욕을 먹고 있으니 피해자인 척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정경유착과 결탁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한다. 검찰은 엄정수사를 통해 국민들로부터‘검찰이 나섰으니 됐다’는 신뢰감을 이번 기회에 되찾아야 한다. 정치권은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자정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혹여나 여권이든 야권이든, 정략적인 사고를 통해 이런 위기를 앞으로의 권력에 유리하게 이용해야겠다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 국가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할 중대 분수령이다. 권력구조도 더 이상 제왕적 대통령제를 끌고 가선 안된다. 내각제가 이상적이긴 하지만, 절충을 통해 이원집정부제든 또는 오스트리아식이든 변화로 가야 한다. 제왕으로 시작해서 식물로 끝나는 대통령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지금 시대의 요구는 협치이고, 연합정치다. 그런 측면에서 남경필 경기지사나 원희룡 제주지사의 협치, 연정 시도는 아주 좋은 실험이라고 본다."

-본인의 정치적 소신과 아울러 현 정치인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한다.

"정치인은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고, 큰 흐름에서 어긋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지도자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 할 뿐더러 나라의 미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YS가 남긴 마지막 유지처럼 통합과 화합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결국 승리하고 평가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병묵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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