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우, 당신 장관시켜 줄게"
스크롤 이동 상태바
"최형우, 당신 장관시켜 줄게"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05.11 12: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3년 ‘YS 단식투쟁’ 계기로 민주화세력 뭉치자
신군부 집요한 회유와 설득

④고문, 회유 그리고 의리
 
“또 다시 군부가 이 나라를 장악한다는 게 정말 수치스러웠다”
 
#1. 80년 5월.

신군부의 군화 발은 매서웠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 돼 군과 정보기관을 장악하자 3김(金) 제거에 나섰다.

김대중과 김종필은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김대중은 광주문제와 관련해 배후조종혐의로, 김종필은 부정축재혐의로 옭아맸다.

양김(金)을 제거했다고 판단한 전두환은 상도동을 향해 칼날을 겨눴다. 김영삼을 가택연금 시킨 후 측근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최형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80년 7월.

서울 성산동 집에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최형우는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다.

조명은 정치폭력조직 구성이었다. YS의 사조직인 한국문제연구소의 조직책으로 태권도 유도 등 유단자 150여명을 규합해 ‘정무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

단 한 번도 고문에 굴복해 본 적이 없던 최형우였으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도 신군부의 정치 시나리오에 대층 응해 주었다.

최형우는 당시의 정치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서빙고 분실, 참기 힘든 곳이었다. 빨갛게 칠해져 있어 하루 밤 자고 나니 그 빛깔이 내 눈을 찌르는 것 같았고, 또 환각과 환청이 들릴 만큼 고통스런 곳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들이 부르는 데로 적어준 것은 아니었다.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포기하는 심정이었다. 또 다시 군부가 이 나라를 장악한다는 게 정말 수치스러웠다.” 

계엄사는 최형우를 비롯한 정치인들을 ‘정치비리 및 부패행위 등 국가기강 문란자’로 발표했다. 형사처벌은 유보하는 대신 의원직 사퇴서를 받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당시 계엄사는 최형우의 비리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최형우는 10?26 사태 후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사조직인 소위 ‘한국문화연구소’의 조직책으로 80년초 태권도 유단자 등 무술인 150여명을 규합 ‘정무회’라는 정치폭력조직을 구성해 80년 4월 신민당 중앙상무위원장 선거시 동 조직을 동원, 지방 대의원을 여관으로 유인해 연금하는 등 폭력으로 자파후보를 당선케 하는 공작을 주도했다.”

이 같은 신군부의 군화발 밑에서 YS와 최형우는 얼어붙은 ‘동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와신상담 제기를 모색하던 시절, 좌동영과 우형우의 상징적인 사진 ⓒ사진제공=김영삼
 
“어떻게든 먹고 살 테니 당신은 쓸데없는 생각 말라”
 
#2. “나의 단식은 민주정치의 확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나마 시급히 강구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요구의 표시입니다.

또한 나의 단식은 앞으로 우리가 전개해야 할 민주투쟁은 생명을 건 투쟁이어야 하며, 생명을 건 투쟁만이 민주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국민여러분께 알리면서 나의 투쟁결의를 굳건히 다지기 위한 것입니다.”

광주사태(광주 민주항쟁) 3주년을 맞은 83년 5월 18일. 김영삼은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김영삼은 전두환과 맞서기 위해 23일간의 처절한 단식투쟁을 벌였다.

YS의 단식투쟁은 로이터, AP, UPI 등 외신을 통해 일제히 국제사회에 타전됐고, 세계에 전두환 정권의 실상을 알리는 기회가 됐다.

이를 계기로 민주화세력이 뭉치는 시작했다.

민주산악회를 결성해 전두환 정권에 정면 대결을 해 나가자 이에 위협을 느낀 전두환은 YS 측근들에게 회유를 하기에 이른다.

타깃이 된 사람은 최형우다. 최형우에게 입각을 건의한 것. 최형우를 설득하기 위해 여권 관계자가 총 동원되다시피 했다.

최형우를 먼저 접촉한 것은 안기부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당시 동국대 동창이며 민정당 의원이었던 정재철 의원이 나섰다.

83년 9월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
“그렇게 고생할 필요가 있냐, 넘버원(전두환)의 허락이 떨어졌다. 보사부 장관이나 건설부 장관을 맡아라.”

“일없다. 이런 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

정재철의 권유를 단호히 거절한 최형우는 식사도 하지 않은 채 음식점을 나왔다.
밖으로 쫓아 나온 정재철은 최형우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노 부장(노신영 안기부장)을 만나 그렇게 전해라.”

정재철과 만나지 한 달쯤 지난 83년 10월 어느 날, 궁정동 안가.

노신영 안기부장과 최형우가 마주 앉았다.

“당신을 설득해 행정부에서 함께 일하라는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떨어졌소.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합시다.”

노 부장의 권유에 최형우는 거칠게 입을 열었다.

“내가 싫다고 분명히 말씀 드렸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하고 일하겠다는 거요.”

“행정부가 싫다면 민정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시오. 정치규제를 풀겠소.”

“이 사람들이….”

화가 난 최형우는 “생각 없다”며 거절한 후 안가를 나왔다.

이 같은 설득이 먹혀들어가지 않자 최형우 부인(원형일)을 향한 공작이 시작됐다. 원 씨도 궁정동 안가로 끌려가 노 부장을 만나 설득을 당했다.

하지만 부인이 오히려 더 강경했다.

원 씨는 최형우에게 “어떻게든 내가 먹고 살 테니 당신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큰딸 은지도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최형우를 설득했다.

전두환 정권은 그 후에도 최형우에 대한 회유를 계속했다. 회유가 얼마나 집요했는지 당시 정가에서는 ‘최형우도 마침내 정부쪽으로 돌아섰다’는 소문이 돌았다.

최형우는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나도 사람인데 왜 흔들림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입각하게 되면 YS를 배신하는 게 되고, 불길처럼 타오르던 민주화도 잠시 끊기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김영삼의 23일 단식투쟁이란>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
 
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3주년.

김영삼(YS)은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부인 손명순은 외신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로 성명내용을 불러줬고, 이는 로이터, AP, UPI 교토통신 등에 의해 일제히 국제사회에 타전됐다.

그러나 국내신문에는 언론통제로 단 한 줄도 보도가 안됐다. 단식 이틀이 지난 5월 20일 일부언론에서 이를 ‘정세흐름’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언급한 게 다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상도동측은 YS의 단식사실을 국내에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이들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에 관한 유인물을 만든 후 대학가는 물론, 집집마다 뿌리고 다녔다.

YS의 분신으로 불리는 박종웅 전 의원도 이때 유인물을 배포하다 상도동측과 가까워진 인물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YS의 단식투쟁이 국내외로 일파만파 파급돼 가자 다급해진 전두환 정권은 모종의 조치를 강구했다.

 

▶김영삼은 전두환 정권에 맞서기 위해 23일간의 처절한 단식투쟁을 벌였다 ⓒ사진제공=김영삼

 
YS 단식 8일째인 5월 25일.

전두환 정권은 YS를 서울대병원으로 강제 이송시켰다.

당시 전 정권은 YS의 단식이 ‘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 측의 체크결과 YS는 오로지 물과 소금만으로 단식을 계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전 정권은 단식 10일째인 5월 27일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을 시켜 회유에 나섰다.

권 총장은 “대통령께서는 총재가 단식을 빨리 끝내고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건강이 회복되면 총재가 일본 미국 유럽 등 어디든지 가도록 주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 총장은 YS를 해외에 내보내고 주택 제공은 물론 생활비 일체를 넉넉히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YS는 “우리 국민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외국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없다. 나에 대한 연금해제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요구한 민주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이 정권도 이승만 박정희를 따라 결국 비참하게 될 것이다. 권 총장은 이 말을 전두환에게 꼭 전해라”고 맞섰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단식 12일째인 5월 29일.

권 총장은 병실로 YS를 찾았다.

“오늘 밤 0시를 기해 총재님의 연금이 해제되며 이제 국내외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나를 해외로 그렇게도 보내고 싶은가.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자 권 총장은 반색을 하며 물어봤다.

“어떻게 해주면 되겠습니까?”

YS는 이렇게 답했다.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

그리고 다시 단식 17일째인 6월 3일.

김영삼의 건강상태가 극도로 악화됐다. 병원 측은 최소한의 응급조치를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김수환 추기경까지 병원을 방문, 생명보존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로부터 다시 단식 23일째 YS는 병실에 누운 채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단식중단을 선언했다. 그의 성명서는 비서실장이던 김덕룡이 대독했다.

“국민여러분, 나는 부끄럽게 살기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나의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했던……(생략),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