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신민당 공천을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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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신민당 공천을 받으세요”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5.1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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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제9대 유신선거법과 나의 신민당 공천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 획책으로 짜여 진 유신정국은 갖은 우여곡절 끝에 제9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실시를 예정하고 있었다. 신민당도 엄청난 재난 후에 흩어져 남은 잔해를 모아서라도 이 나라의 운명을 파렴치한 독재자에게 맡길 수 없다는 참담한 심정으로 전당대회를 열어 유진산 총재를 새 총재로 선출하고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가해 총력을 다 해서 독재를 막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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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8대 국회의원선거 때부터 영등포 갑구에서 출마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5?6파동으로 박정훈 씨가 나가 낙선한 후 유진산 총재가 법정 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유진산 총재가 고향인 충남 금산에 가서 “내가 나고 자란 고향에 가서 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분들의 심판을 받겠다”고 금산으로 선거구를 옮겼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경옥에게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출마를 하면 돈도 많이 들고, 더구나 야당으로 나가면 눈에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엄청난 탄압도 각오해야 하오. 아내인 당신의 지지와 성원이 절대적인 요건이니 당신이 나를 도와주시오.”

경옥은 내 뜻을 받아주었다.
“당신이 언젠가는 국회의원 출마를 꼭 할 거라고 나는 벌써부터 각오하고 있었어요. 인생이 한 번 났다 가는 것인데, 기회가 왔는데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억울하고 바보스러워요? 무소속은 안 돼요. 신민당 공천을 받으세요.”

나는 다른 가족들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이제 겨우 집을 마련한 정도인데 국회의원 출마라니, 우리 집이나 처갓집이나 흔쾌히 찬성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천이 결정될 때까지 우리 둘만 알고 공천경쟁에만 열중하기로 했다.

경옥의 지지와 성원은 나에게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아서 엄청난 힘과 용기,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경옥을 내 아내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머리 숙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당시 전국구출신 국회의원이자 신민당의 명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수한 의원을 비롯하여 야도여촌에 맛들린 전 현직의원들이 모두 서울로만 모여들어 영등포 갑구에서도 신민당의 공천경쟁이 만만치 않았다. 공천신청을 낸 사람들이 심사위원들의 집을 두루 도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상도동 총재 댁은 조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아침 일찍 온 사람 중에도 총재님을 만나기는커녕 총재님이 출입하실 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서로 앞 다투어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나는 이 지역에서 부위원장도 지냈고, 비교적 중앙당에서도 핵심부장을 역임하고 있었으며, 총재님 사모님까지도 나와 경옥을 귀여워했다. 그래서 신동준 실장을 비롯한 비서들과도 잘 지내고 있었으며, 그중에도 총재님의 연설문 등 각종 문서를 작성, 대필까지 하는 총재님의 조카 유창열 씨가 내 공천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총재님을 독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여러 번 총재님을 만날 수 있었고, 간청을 드렸다.
“총재님,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동안 소선거구제하에서는 서울에서 한 사람의 공화당 의원도 당선시키지 못했던 박정권은 유신선거법으로 한 선거구에서 두 사람씩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꾸어 모든 선거구에서 둘 중 하나는 여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원천적으로 민의를 합법적으로 조작하는 내용을 담아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예년 선거에서 나타난 결과를 가지고 보면 언제나 신민당 후보가 공화당 후보보다 2배 이상의 득표로 승리했기 때문에 거물급 현역의원과 거물급 전직의원들이 대거 서울 선거구를 희망하고 모여들어 신민당은 동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처럼 원외 지망생들의 서울 공천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너희 집은 참 이상하다”

그러다 보니 당에서는 공천희망자는 모여들고, 어차피 서울에서 한사람은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두 사람을 복수로 공천하면 잘만하면 둘씩 당선시킬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서울만 복수공천자를 내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런 방침에도 물러서는 사람은 없었다.
아내 경옥이 애가 달아 말했다.

“여보, 우리 둘이 함께 총재님을 뵙고 간청해봅시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총재님을 만났다. 나란히 들어서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총재님 앞에 앉아 경옥이 간청을 드렸다. 총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 집은 참 이상하다.”

그래서 내가 뭐가 이상하냐고 물었더니 총재님이 대답했다.
“다른 집은 사내가 공천 달라고 여기 오면 마누라는 목매달러 가는데, 너희는 두 사람이 함께 와서 공천을 달라고 하니 이상하지 않느냐? 그래, 알았으니 가봐.”
군사정부의 갖은 박해와 금권타락 부정선거로 가산을 탕진하고 낙선해서 가정이 무너지고 패가한 사람 중 자살을 한 사람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중앙당 근처에 가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더구나 원외 당원은 아예 심사대상도 안 되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고 말들이 많았다. 서울 시내 각 지구당 부위원장 중 동대문에 최승군, 서대문 쪽에 윤병익 등 여러 사람이 공천신청을 해놓고 몸이 달아 있었다.

나는 견딜 수가 없어 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 총재댁을 찾았다. 문을 열어준 뒤 들어가서총재님을 뵈어야겠다고 떼를 쓰는 나를 보고, 유창열 씨는 총재님이 조금 전에 들어오셔서 막 자리에 드셨으니 밝은 날 다시 오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막무가내로 총재님 방 앞에 가서 문을 두드렸고, 잠옷을 입은 채 기침하시는 총재님 앞에 엎드려 말했다.

“이상한 소문이 있어서 왔습니다. 원외 당원의 신청서는 보지도 않고 심사에서 제외한다는 말을 듣고 견딜 수가 없어서 왔습니다.”
“뭐야? 이놈아, 전쟁에 나가 전쟁하는 놈이 옆 사람이 이상한 얘기를 한다고 그 말을 듣고 전쟁터를 버리고 후방으로 쫓아온단 말이냐? 알았으니 가봐!”
“알았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는 말씀으로 알고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넙죽 절을 했다.

“늦었으니 딴 데 가지 말고 잘 가.”
총재님의 말씀을 뒤로 하고 나오면서 유창열 씨에게 “저, 총재님 말씀이 된다는 말입니까, 안 된다는 말입니까?”하고 물었더니 유창열 씨는 “내가 어떻게 알아!”했다.
드디어 공천자발표를 하는 날 일찍 중앙당에 들렀는데, 같이 공천신청을 했던 전직 지구당 위원장 출신 K씨가 차나 한잔 하자고 해서 당사 근처의 제과점으로 갔다.

“노 부장, 미안해요. 영등포 갑구는 공천가 결정이 났는데, 복수로 김수한 의원과 내가 됐다고 어제 유진산 당수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었어요. 노 부장은 다음에 기회를 보고 이번 선거에는 나를 위해 수고를 해주십시오.”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도 없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나도 총재님에게서 너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발표될 때까지 희망을 버릴 수는 없지 않소? 혹시 누가 압니까? 내가 될지도 모르니 당신이 되면 내가 당신을 밀고, 내가 되면 당신이 나를 밀어주기로 합시다.”
“그렇게 합시다!”
K씨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종로구 견지동 유진산 총재 개인사무실의 지하다방에 조그마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운데 놓고 수십 명이 모여 정오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신민당의 공천자를 발표 하겠습니다…….”
종로에서부터 시작해 영등포 갑구 김수한, 노병구라고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고 옆에 있던 K씨는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집으로 가서 뉴스를 듣고 기뻐하는 경옥과 얼싸안고 자축을 했다.
다음 날 일찍 상도동 총재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총재님은 축하의 말을 건넨 뒤 말씀하셨다.

“너는 죽으나 사나 서울만을 고집해서 할 수 없이 이번에 공천을 주기는 했지만 당선이 어려워. 박정희가 서울에서 둘 중 하나는 공화당이 차지하게 하려고 선거법을 저희 입맛에 맞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든 당선시키려고 기를 쓸 거야. 김수한은 현직의원인 데다가 대변인이고, 자금도 명성도 너는 아직 김수한을 따라갈 수 없으니 네가 당선 되기는 어렵다는 거야. 그러니 다음 선거에 대비한다는 생각으로 젊은 다리로 열심히 다녀 몇만 명이건 악수를 하도록 해. 돈도 네 돈은 쓰지 말고 비축해 둬. 얼마 안 되지만 네가 쓸 돈을 들여 얻을게 아니라 본동에 있는 내 지구당 사무실을 쓰고.”
그러면서 보자기에 싼 돈뭉치를 건네주셨다.

“총재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 당선이 어렵다고 말씀하시지만 당선이 되도록 해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 나는 경옥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자식을 앞에 놓고 걱정하시는 참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신 유진산 총재님의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잊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신민당 서울 시내 각 선거구의 공천자는 모두 현역의원들로 채워졌고, 한두 사람의 거물급 전직의원이 들어 있었다. 부위원장이나 원외 당원으로는 내가 유일하게 그 안에 들어 있었으니 당락을 떠나 공천만으로도 최대의 영광을 차지했다고 나는 서울시내 부위원장들의 부러움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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