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최초 對러 외교 튼 정재문의원
“YS, 특사로 나서야 한-러 경색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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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최초 對러 외교 튼 정재문의원
“YS, 특사로 나서야 한-러 경색 풀려”
  • 정세운· 최신형 기자
  • 승인 2010.08.3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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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문 한나라전의원
한-러 수교 처음과 끝에는 상도동係 인사 포진
6공, IMEMO 초청 박철언 앞세워 한수교 방해
‘YS특사’ 천안함 사태로 불편한 관계 푸는 묘안

오는 9월 30일로 한-러 수교 20주년을 맞는다.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인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구소련.
 
2월 혁명으로 인해 황제에 의한 전제 정치인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레닌이 10월 혁명을 주도하며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4월 테제를 통해 사회주의 완성을 이룬 혁명의 나라 러시아로 변신했다. 

냉전시대 공산주의 혁명의 심장이자 미지의 땅인 러시아의 첫 문을 두드린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 교과서에 나오듯 노태우 전 대통령일까, 아니면 6공 실세인 박철언 전 의원일까. 

아니다. 정치인으로서 러시아 땅을 처음 밟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재문 전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정 전 의원이 지난 1989년 3월 국회의원 역사상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면 YS는 한-러간 외교의 완성을 이루는 등 한-러 수교의 처음과 끝에는 상도동계 인사들이 있었다.
 
시사오늘은 지난 25일 종로구 필운동에 위치한 연구실에서 정 전 의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러 수교 20년, 그 매혹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 한국 국회의원으로 처음으로 소련 땅을 밟은 정재문 전 한나라당(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 당시 비화를 회고하고 있다.  ©시사오늘 권희정
 
-올해로 한-러 수교 20년을 맞았습니다. 한·러 수교로 인해 양국은 상호 신뢰를 바탕에 둔 포괄적인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20주년의 의미와 당시 소련의 문을 열었던 당사자로서 소회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오는 9월 30일이면 한·러 수교 20주년이 됩니다. 20년 전을 회고해보면 당시 소련의 공산당 정부는 대한민국을 적성국가로 분류하거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고 양국간 공식방문은 물론 아무런 상호방문도 없었지만 나는 방문 초청장도 없이 72시간 통과비자만 가지고 모스크바로 갔습니다. 그렇게 첫 방문이 YS의 모스크바 방문으로 이어졌고 한·러간 첫 공식문서라고 할 수 있는 소련과학원 산하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와의 공동성명서 작성에 합의하는 등 한·러 수교의 기초가 됐다는 점에서 보람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나의 모스크바 방문은 정부나 국회, 통일민주당 등과 사전 협의 없이 정재문 개인의 소신과 선택이었기 때문에 모든 비용을 자비로 부담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원외교로서 YS를 모시고 한·러 수교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1989년 3월 한국 국회의원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자결한 민영환 선생 방문 이후 93년 만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습니다. 많은 동구권 나라 중에 사회주의 국가였던 당시 소련의 문을 두드린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치적인 목적은 없었습니까.

“정부당국의 허가 없이 갔는데 왜 갔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1985년 12대 국회에 진출한 뒤 외무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무엇보다도 한반도 영구평화의 정착과 6.25로 인한 민족상잔의 해결을 위해 소련 땅을 밟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러던 중 소련과학원 산하 연구소(IMEMO) 프리마코프 원장과의 대담을 구상하게 됐습니다. 정치적인 목적을 물어보셨는데, 당연히 있었죠.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이 수권정당은 물론, 외교활동을 할 수 있는 정당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정치적인 목적이라면 목적이죠. ‘소련의 문을 열겠다’라는 생각으로 1989년 3월 당시 소련의 첫 방문 이후 그해 6월 YS의 제1차 소련 방문, 같은 해 10월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 공산당 간부들의 서울 방문 등 이런 역사적인 사건이 불과 6∼7개월 만에 이뤄졌습니다.”

정 전 의원은 7선이자 민주화 과정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해석(海石) 정해영 전 국회부의장의 장남이다. 지난 12대 국회에 정치권에 입문해 16대까지 내리 5선을 한 자타가 공인하는 외교전문가다.

그는 5선을 지내는 동안 국회 외무통일분과에서 위원과 위원장으로 의원외교에 앞장섰고 2001년 한·러 수교 10주년을 기념해 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국회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우호·친선 최고훈장을 수여받았다.

김영웅 전 구소련 최고회의 의원은 2003년 10월 정 전 의원의 저서 <소련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의 발간축사에서 “최초로 러시아를 방문한 한국의 정부인사라고 할 수 있는 민영환이 1896년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즉위식)에 참석했다면, 정재문 의원은 러시아 즉 소련을 개인적 소신에 의해, 그것도 야당의원으로서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사”라고 평했다.
 
▲ 정재문 전의원은 개인적 소신으로 구소련을 처음 방문해 어려운점도 있었지만 한-러 수교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1988년 2월2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북방외교대원칙인 7·7선언을 발표했고 대외적으로는 미·소 양국이 냉전을 넘어 데탕트를 지향했습니다. 소련 방문이 두 요인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노태우 정권이 도와주지도 않았고 당시 당에서는 6공화국의 북방외교 대신 ‘국민외교’라는 말을 썼습니다. 야당인 통일민주당이 수권정당으로 거듭나고 정부차원이 아니라도 미국이나 소련과도 접촉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의미였죠. 국민외교라는 말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 등 청와대의 지시, 또는 교감 등은 없었습니까.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가는 것은 실정법 위반인데 처벌 받지는 않았습니까. 처벌이 없었다는 건 6공과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소련 측에서 걱정을 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라고 걱정을 많이 해줬습니다(웃음).
 
-1989년은 임수경 씨가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위해 단신으로 평양을 방문했다가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등 공안통치가 극에 달했습니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부분인데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당시 통일원에 사후신고 절차를 마쳤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거든요. 비행기를 잘못타고 사회주의 국가에 갈 수도 있는 거고 어쩌다 본의 아니게 북한 사람들과 접촉할 수도 있잖아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신고되기 전에 체포되는 경우도 많지 않았나요.

“국가정보원에서 뭔가 수상한 일을 한다고 의심스러울 때 신고가 확실치 않을 때는 그런 경우도 있죠. 난 국회의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경우가 조금 달랐습니다.”
 
“소련 체제 변화 예상했었다”
 
-.1989년 3월 헝가리에서 ‘국제의원연맹(IPU) 회의’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그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모스크바로 갈 생각을 했는데 소련 입국 비자부터 시작해서 항공편, 묵을 숙소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걸렸어요. 근데 누구와 상의할 수도 없고 IMEMO측에선 아무런 연락도 없고 몇 날  며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던 중 국제의원연맹(IPU)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당시 국회 외무위원이자 IPU위원이었는데 1989년 3월 IPU 총회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습니다. 결국 혼자 시도해 보겠다고 결심을 한 뒤 YS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모스크바 잠행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헝가리에 도착해 IMEMO에 전화를 걸었는데 영어를 못 알아들었는지 불친절하게 전화를 받더니 몇 번씩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전화로는 안되겠다 싶어 IPU 소련 대표단을 찾아가 IMEMO에 내가 간다는 메시지를 전달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흔쾌히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럼 이제 소련 입국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겠군요.

“IMEMO 측과 연락하는 것까지는 됐는데 그 다음 통과비자를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통과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부다페스트 소련 대사관으로 갔지만 호텔을 예약하고 오라는 등 갖가지 이유를 들며 비자 발급이 지연됐습니다. 그렇게 소련 국영관광공사인 인투리스트를 몇 번이나 방문한 끝에 72시간짜리 통과비자를 발급받았습니다. 1989년 3월 18일 IPU 총회를 마치고 바로 소련 항공 아에로플롯트의 일류신 항공기에 몸을 싣고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기 2년 전의 방문입니다. 당시 소련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붕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확히 말하면 붕괴라기보다는 정치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당시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글라스노스트(개방)-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으로 인해 스탈린주의 독재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등 소련 민주화에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소련이 공산권에서 민주정부로 가기까지 냉전의 종지부를 찍을 것이란 점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의 심경은 어땠습니까.

“나는 비행장에 누가 마중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나왔더군요(웃음). 마중 나온 사람 하나 없는 모스크바 세레메티에보-2 공항은 공산국가의 낡고 허술한 콘크리트 건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레닌 묘와 국립역사박물관이 있는 붉은 광장은 적색(赤色)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1985년 3월 10일 체르넨코가 사망하고 고르바초프가 후계자가 되면서 개혁-개방을 통한 탈냉전주의 기조 아래 화해와 협력의 길을 모색했고 볼셰비키, 공산주의에 대체하는 신사회 건설에 박차를 가할 시점이었습니다. 3월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추운 모스크바를 둘러보며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묵을 숙소인 벨그라드 호텔로 향했습니다.”

 
-소련 첫 방문 당시 IMEMO에서 프리마코프 원장 등 간부들과 면담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내용이고 당시 소련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소련 측에서는 내 방문을 두고 ‘잠입’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뭐 몰래 들어왔다는 의미겠지요(웃음). 소련은 당시 대한민국의 미국의 앞잡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국회 외무위원장 직함이 있어서 그런지 정중하고 반갑게 나를 맞아하며 예우를 해줬습니다. 프리마코프 소장은 고르바초프의 외교특보이자 신사로, 외교노선의 오른팔 역할을 했는데 나를 보고 ‘왜 이 곳에 왔느냐’고 묻기에 ‘이웃나라와 잘 지내고 싶다. 왕래를 하자’고 답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민주화 투사이자 통일민주당 총재인 YS를 모시고 있다’고 말하자 ‘그 사람 여기에 올 수 있느냐’고 되물었고 ‘양국간 국교가 없는 현실이지만 나도 왔는데 YS가 못 올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YS가 6월쯤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장을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속으로 이게 웬 떡인가 싶었습니다(웃음)."

▲ 왼쪽부터 수히닌 전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 쿠나제 전 주한 러시아 대사, 정재문, 이신범, 조용규 전 한나라당 의원 ⓒ사진제공=정재문
왜 정 전 의원은 다른 곳도 아닌 IMEMO 프리마코프 원장 등 간부들과 접촉을 시도했을까.
정 전 의원은 <소련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에서 IMEMO와 관련, “소련 과학원 산하 최대의 대외정책 연구기관이자 자본주의 국가와 개발도상국을 막론한 글로벌 차원의 경제, 외교, 군사, 정보 등 사회제도 간의 평화적 경쟁과 협력문제를 연구하는 소련 최대 싱크탱크 연구소”라고 기술했다.

또 “외교적으로 이 연구소는 1960년대 당시 서독의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당수였던 빌리 브란트를 초청해 동·  서독간 관계정상화와 동서 긴장완화를 위한 측면 지원을 했다”고 말했다.
 
“소련 방문 보고했더니 YS 굉장히 기뻐했다”
 
-YS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서울 마포 당사 총재실에 있던 YS에게 모스크바에 다녀왔다고 보고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조만간 YS 앞으로 초청장이 올 거라고 말했더니 놀라면서 믿기 어려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1989년 당시에는 이미 중국도 서서히 개방의 무드가 보이기 시작했고 소련도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개혁의 물결이 넘치는 등 세계역사 조류 변화에 적응하고 국가안보에 보탬이 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게 외교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89년 6월 IMEMO는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를 초청했습니다.

“1989년 5월 초 IMEMO 측으로부터 YS 초청 서한이 도쿄의 소련 대사관으로 왔습니다. YS에게 초청내용 등을 미리 합의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선발대를 파견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YS는 내게 모든 것을 협의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같은 달 25일 허용상 총재실 비서를 대동하고 소련을 두 달 만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IMEMO에 도착해 곧바로 YS 초청 절차 협의에 들어갔지만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타슈겐트 방문이나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의 면담도 거절당하는 등 지난 3월 부다페스트에서 통과비자를 받을 때처럼 일이 쉽게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협상에 협상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9박 10일 일정으로 YS의 소련 방문이 확정됐습니다. 결국 6월 2일 YS와 당시 김상현 부총재, 황병태 정책심의회의장, 박관용 국회통일특위 위원장, 서청원 총재 비서실장, 김광일 기획조정실장, 이인제 대변인, 이원종 총재공보특별보좌역, 김기수 총재비서관 등이 대표단을 이뤄 모스크바로 향했습니다.” 
 
-통일민주당과 IMEMO간 공동성명서 체결은 어떻게 결정된 겁니까.

“9박 10일 일정으로 있으면서 IMEMO에 있는 쿠나제 박사에서 공동성명서를 발표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대번에 거절당했습니다. IMEMO는 학술연구원인데 학술연구단체끼리 할 수는 있어도 어떻게 정당이랑 공동성명서를 발표할 수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는 재차 쿠나제 박사에게 다시한번 요청하면서 상부와 의논해 달라고 요청했고 장시간 토론 끝에 우리 측에서 먼저 안을 제시하면 소련 측에서 한번 검토해 보기로 합의했습니다. 쿠나제 박사는 내게 우리 측 제안 문건을 수정 없이 수용하기로 결정했다는 의사를 밝혔고 결국 이 공동성명서는 한·러 수교건 최초의 실질적인 협정문이 됐습니다.”

▲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공화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정재문 한나라당 전 의원(왼쪽) ⓒ사진제공=정재문
정 전 의원은 공동성명서와 관련, “1989년 6월 9일 프라하 식당에서 열린 공동성명서 서명식은 통일민주당과 소련의 대표적인 대외정책 국책기관인 IMEMO 사이의 공식교류를 공문서화한 역사적인 순간”이라며 “YS는 한국 정치지도자로는 최초로 소련을 방문하고 회담을 통해 폭넓은 교류를 하는 등 한·러 양국간 새로운 관계의 도래를 위해 매진했다”고 회고했다.
 
-통일민주당-IMEMO 공동성명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습니까.

“YS와 소련 측 대표자들은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특히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선린관계 강화를 지지하고 한반도 상황의 정상화, 남북간 대화 진전 등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습니다. 또 YS는 통일민주당을 대표해 IMEMO 측을 가장 빠르고 편리한 시기에 한국에 초청해주고 양측은 소련연방공화국 및 대한민국, 동북아시아 등 공동의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합의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북한이나 중국 측 반응은 어땠습니까. 비공식적인 연락이나 접촉은 없었습니까. 상당히 부담이 됐을 텐데요.

“1, 2차 소련 방문 당시 중국 사람들을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 방문이 소련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때는 아직 수교 전이고 한국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즉각적인 중국의 반응은 못 느꼈지만 내부적으로는 깜짝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중국은 한·러 수교를 좋아했을 겁니다. 한·러 수교가 결국 한·중 수교의 도화선이 됐으니까요.”

지난 24일로 한·중 수교 18주년을 맞은 양 국가는 1992년 첫 수교 이후 1997년 선린우호관계, 2002년 협력동반자관계, 2007년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를 거쳐 현재의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해왔다.

하지만 천안함 침몰 사태와 한미 동맹 강화 등으로 인해 최근 한중 양국의 관계는 경색되고 있다. 이에따라 지난 26일부터 28일까지 6자회담 재개를 협의차 한국을 방문한 중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 우다웨이 한반도사무 특별대표의 방한 결과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러 수교 20년 성과 미비”
 
-1989년 10월 통일민주당은 소련과학원 산하 연구소 IMEMO를 초대했습니다. 초대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하는던데요.

“YS가 소련을 방문한지 3개월 만에 IMEMO 마르티노프 소장을 단장으로 한 12명의 대표단이 답례차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근데 IMEMO가 한국을 방문할 당시 6공의 황태자 박철언 당시 정무장관이 방해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양국이 수교 전이기 때문에 비자를 일본에서 받아야 했는데 IMEMO 인사들이 입국하기 전날 차관이 와서 입국불가 통보를 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박철언씨를 앞세워 방해만 했지, 한·러 수교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6공 실세 박철언 전 장관에게 어떻게 대응을 했습니까.

“내가 단번에 모르겠다, 난 불러드릴 테니 쫓아내라고 맞섰습니다. 급히 YS를 찾아뵙고 도쿄의 한국대사관에 비자 내는 스탬프를 나리타 공항에서 찍어주든지 해야 한다고 도쿄에 사람을 파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허용삼 상도동 비서가 도쿄로 갔지만 영사가 이를 거부했습니다. 급히 YS와 외무부장관이 대사한테 전화를 걸어 부탁을 했고 영사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나리타로 갔습니다. 근데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습니다. IMEMO 측에서는 통일민주당이 야당인데 비서가 도쿄까지 마중을 나와 스탬프를 들고 대기하고 있으니 YS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3당 합당 선언 후 YS가 2차 소련방문을 하게 뙵니다, 당시 공식 대표단이 박철언 전 장관이 포함됐는데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YS의 2차 소련방문에서 소련 측 인사들은 통일민주당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변해 있으니까 양국간 수교의 길이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것으로 보고 내심 반가워했습니다. 다만 2차 방문에 대한 합의는 꽤 어려웠습니다. 먼저 대표단의 총인원수가 문제였습니다. 1차 협의 과정에서 IMEMO가 제시한 수용 가능 대표단 인원은 1차 모스크바 방문단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수교가 가시화되자 공식대표단 20명과 수행기자단, 비서진 등 30여명이 참가의사를 밝혔습니다. 또 대표단에 장관이 포함되는 것을 이해해달라고 했더니 안 된다고 거절의사를 밝혔습니다. 소련 측에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과 장관의 겸직이 가능하다는 점을 잘 설명해 겨우 양해를 받아냈습니다.”
 
-대표단에 포함된 장관이 박 전 장관입니까.

“귀국 후 YS가 어느 장관이냐고 물었고 박철언 장관이 좋을 거 같다고 말했더니 YS는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또 문제는 박 전 장관이었습니다. 박 전 장관이 자기는 수행원이 아니고 YS와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물의를 빚었습니다.”

 
-박철언 전 장관 회고록을 보면 한-러 수교는 6공의 작품이고 YS는 그냥 따라가기만 했다고 주장하는데요.

“박 전 장관은 국회 청문회에 나가야 바른 말을 하지(웃음). 통일민주당과 IMEMO간 공동성명서에 6공이나 박 전 장관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야당인 통일민주당과 여당인 민주자유당 시절 소련을 방문했는데, 대우가 많이 다르던가요.

“많이 달랐죠. 1990년 3월 20일부터 28일까지 8일간의 일정으로 시작된 2차 방소는 IMEMO 측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도착 다음날인 21일 소련 공산당 중앙당사에서 야코블레프 국제담당 정치국원과 역사적인 회담은 물론,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연방회의 의장, 카렌 브루텐츠 공산당 중앙위 국제부 제1부장 등이 YS를 비롯해 한국 대표단을 맞는 등 1차 방문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6공이 국내 실정의 책임을 북방외교를 이용해 벗어나려 한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80년 후반 북방외교를 할 때 국민들에게 납득할 만한 외교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박철언 등 6공이 돈으로 수교를 한다는 비판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소 정상회담 개최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노태우 대통령이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는 등 연이은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20년간 대(對)러시아 외교는 어떤 변화를 겪었습니까.
“총체적으로 보면 양쪽이 필요해서 수교를 했는데 러시아 쪽에서 보면 기대한 만큼 한국이 대(對)러시아 외교를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20년 이란 시간은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인데 앞으로 무엇을 해야 되느냐, 그건 바로 문화·교육의 교류입니다. 그간 무역통상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러시아를 봤기 때문에 그쪽에서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도 있고요. 어쨌든 문화, 첨단기술 등의 상호교류에 방점을 둔 외교정책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YS 러시아 특사 갔어야 했다”
 
-천안함 사태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됐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과연 중국과 러시아가 중립을 지켰는가.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천안함과 관련해 ‘북한을 곤란하게 하지 않겠다’, ‘한국을 유리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걸 외교통상부가 감지하지 못한 거죠.”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YS가 러시아 특사로 가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러시아, 중국 등 4대 강국과의 접촉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 특사를 통한 접촉은 아무래도 장관이나 정부 쪽 인사의 방문보다 국민의 지도자가 방문해서 관계를 푸는 게 낫지 않겠어요. 최근 중국특사로 거론되는 박근혜 의원의 경우도 긍정적으로 봅니다.”

 
-YS가 러시아 특사로 가면 악화된 러시아 관계가 풀릴 수 있을까요.

“천안함 침몰 사태라는 게 우리한테는 크지만 그쪽 입장에서는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YS가 러시아 특사를 받아드릴까요. 쉽지 않을 거 같은데요.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동양기질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작년에 YS가 러시아 특사로 갔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YS도 원하는 일이고 만일 성사가 됐다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굉장히 좋아했을 일이죠.”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미외교에 치중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한반도 평화 안정에 미국이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기에 대미외교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천안함 관련해 중국이나 러시아가 중립외교가 아니라고 했는데 이명박 정부는 중립외교입니까.

“이명박 정권이 천안함 사태의 대처 방안을 보면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비핵개방 3000’의 대북 정책도 실망스럽습니다. 차라리 같이 3만 달러가 되자고 하든지, 북한의 너무 아픈 부분을 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실질적으로 3000달러가 맞더라도 이를 공개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외교철학과 인터뷰 도중 못하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시죠.

“한-러 수교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번영, 남북한의 긴장완화 등 평화정착에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참으로 보람된 시간이었습니다. 또 YS가 전적으로 나를 신임해줘 한-러 수교가 가능했고 국민여러분들도 많은 격려를 주셔서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정재문 전의원은 자신이 러시아 수교를 맺는데 큰 역할을 해준 사람은 김영삼 전대통령이었다며 천안함 사태로 벌어진 한-러 관계 복원하기 위해서는 YS가 대러시아 특사로 나서야 한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정 전 의원과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식사 도중 필자가 "정 전의원이 러시아와 수교를 맺는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고 덕담을 건냈더니, 그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마당을 만들어준 분은 YS"라며 한-러 수교의 공을 YS에게 돌렸다.

아마도 천안함 사태로 삐걱거리는 한-러 관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YS가 대러 특사로 나서야 한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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