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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성지①] YS 상도동 ‘그때 그 시간’
3선개헌 비판했다가 집앞 골목서 ‘초산테러’
강제 정계은퇴 후 민주산악회 산실 역할
23일간의 단식투쟁도 상도동 자택서 시작
2017년 07월 01일 (토) 정진호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시대가 변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총성 없는 전쟁터였던 YS 사저는 이제 평화롭고 조용한 한 채의 주택이 됐다 ⓒ 시사오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1동 상도터널 사거리. 복잡한 거리를 지나 터널 옆길 언덕으로 올라가면, 고즈넉한 동네가 나타난다. 좁은 2차선 도로변에 친근한 간판의 치킨집과 문구점이 늘어선 곳. 여기서도 작은 골목을 서너 번 더 돌아가야 김영삼 전 대통령(YS) 사저를 찾을 수 있다. 앳된 얼굴의 경찰들이 지키고 서있지 않았다면,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저녁상이 차려지는 보금자리로 착각했을 작은 주택이다.

명패에 쓰인 金泳三(김영삼) 세 글자 외에는 전직 대통령 사저임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집은, 군화에 짓밟힌 대한민국을 참주인 품으로 돌려주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투사(鬪士)’들의 아지트였다. 1969년 YS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이래 초산테러, 가택연금, 민주산악회 조직, 단식투쟁, 민주화추진협의회 발족 등 역사적 사건의 주 무대가 됐고, 아직까지도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도동계’ 인사들의 산파 역할을 한 장소다.

그러나 각종 기념화사업과 복원사업이 이뤄지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사저와 달리, YS의 상도동 사저는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시사오늘〉은 6·29 선언 30주년을 맞아 민주화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는 상도동 사저의 의미를 되짚어 봤다.

1969년 6월, 상도동 골목길 초산테러

상도동이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치사 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1969년 6월이다.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이자 촉망받는 야당 정치인이었던 YS는 제70차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을 비판하는 대정부질의를 한다. 특히 그는 군사정권 최고의 실세였던 정보부장 김형욱을 “제2의 최인규가 되지 않기 위해, 민족의 영원한 반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리한 짓 하지 말라”고 질타하며 ‘요주의 인물’로 떠오른다.

‘요주의 인물’이 ‘타깃’으로 변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대정부질문 후 며칠 뒤, 신민당 중진 간부들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YS는 상도동 자택에서 50m가량 떨어진 골목길에서 피습을 당한다. 이른바 ‘초산테러’로, 골목길을 가로막고 싸우는 시늉을 하던 괴한 세 명이 YS가 탄 차문을 열려다가 실패하자 차에 질산 든 유리병을 던진 사건이다. 1969년 6월 21일자 〈경향신문〉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20일 하오 10시 5분, 서울 상도동 7의6 앞 골목에서 국회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41)이 서울 자2-2347호 크라운(운전사 김영수·36)을 타고 집으로 가다 괴한 1명으로부터 초산병(길이 13cm)으로 피습을 받았으나 인명피해는 없었고 차의 뒷문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졌다. 이날 밤 김 의원이 탄 차가 피습지점에 이르렀을 때 후리후리한 키에 흑색작업복을 입은 청년 3명이 길 가운데서 옥신각신하다 차를 세우고 그 중 1명이 차 뒤로 돌아와 김 의원이 타고 있는 차 뒷문을 열려고 했다. 문을 안에서 잠근 김 의원은 이상한 예감으로 차를 급히 몰라고 운전사에 지시, 1m50cm가량 달려갔을 때 이 청년이 주머니에서 꺼내 던진 초산병이 차 오른쪽 뒷문과 뒤창 사이의 철판에 맞으며 병이 박살났다.”

YS 가신 1세대로 불리는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의 증언은 좀 더 생생하다. 김 회장은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날 돌아오는데 상도동 골목길에서 두 사람이 싸우고 있었다. 보니까 큰 사람이 작은 사람에게 맞고 있었다. 이게 뭔가 하고 시선을 빼앗긴 사이 덜컥덜컥 소리가 나서 봤더니 누가 차 문을 열려 했다. 그런데 YS는 자동차의 창문을 열어도 조금만 열고, 문을 꼭 잠그는 습관이 있었다. 다행히 문이 열리지 않았고, YS가 운전수였던 김영수에게 ‘영수야, 빨리 가!’라고 소리쳐서 차가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내가 그 자동차를 봤는데, 페인트가 다 녹아서 벗겨졌더라. 사람이 뒤집어썼으면 그냥 그대로 죽는 거였다.” 

   
▲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YS 부인 손명순 여사는 항상 손수 끓인 시래깃국을 대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81년 5월, 상도동 자택 민주산악회 결성

박정희 정권 내내 민주화 투사들의 ‘작전상황실’ 역할을 했던 상도동 자택은, 전두환 정권에서 좀 더 드라마틱한 모습으로 한국 정치사에 재등장했다. 1979년 10·26으로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자, 전두환은 12·12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다. 그 후 전두환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내란음모죄로 몰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YS에게는 가택연금과 정계은퇴라는 칼을 휘둘렀다. 전두환에 의해 발이 묶인 YS는 상도동 자택을 중심으로 대(對) 군부정권 투쟁을 전개해 나간다.

상도동에서 민주화 투쟁의 싹이 다시 발아(發芽)한 것은 1981년 봄이다. 가택연금은 해제됐지만, 여전히 정치활동을 규제받고 있던 YS는 옛 동지들과 산행을 시작한다. YS는 김동영·최형우·김덕룡 등이 산에 올라 사람을 만나면서 기회를 엿보자고 제안한 것을 받아들여 산악회를 조직했다. 이것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의 모태가 된 민주산악회다. 민주산악회의 출발에 대한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YS가 1980년 5·18 이후 상도동 자택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했다. 거기서 YS가 ‘광주에서 지금 유혈사태가 발생했다’고 말해 처음으로 광주 유혈사태라는 것이 외신에 보도됐다. 외신에 보도가 나자 바로 전두환이 YS를 가택연금했다. 1980년 5월 20일로 기억한다. 1년여 후인 1981년 5월 30일에 연금에서 풀렸지만, 밖에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사무실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만나서 대화도 나누고, 뭔가 좀 활동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찾는데 ‘등산을 가면 어떻겠느냐’라는 제안이 나와 명륜동 김동영 의원 집에서 모여 등산을 했다. YS를 모시고 정채권 목사, 문부식, 김동영, 나, 원외위원장 몇 사람까지 해서 7~8명이 도봉산에 올랐다. 그것이 민주산악회의 시작이다.”

이후 등산은 YS의 일상이 됐다. 처음에는 채 10명이 안 됐지만, 한 사람 두 사람 자연스럽게 동참하면서 조직이 커졌다. 당시 김동영 전 의원과 함께했던 신용선은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처음에는 김동영 의원이 YS에게 산에나 가자고 권유한 것이었는데, 자연스럽게 김덕룡, 홍인길, 최기선 등 YS 비서진들이 동참하고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참여 인원이 많아졌다. 이러다 보니 식사를 할 때 준비물 분담과 연락 등이 필요해져 조를 편성했고, 조별 책임자를 뽑았다. 계속 조직이 커지면서 명칭, 임원선정, 조별이름, 회칙, 선언문, 회가까지 만들어지는 등 마치 정규 군대와 같은 체제를 갖추게 됐다”고 회고했다.

이런 방식으로 확대된 민주산악회는 단순 모임 수준을 넘어, 지방조직을 갖추고 주요 정치적 사안에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치결사체 역할을 했다. 민주산악회가 동교동계, 재야인사와 결합해 민추협이 되고, 민추협이 신한민주당의 바탕이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도동 자택이 민주화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 셈이다. 

   
▲ 상도동 자택에서 시작된 23일간의 단식은 시들어가던 민주화 열기를 되살리고 민주세력을 규합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983년 5월, 상도동 자택 단식투쟁

상도동발(發) 민주화 투쟁의 백미(白眉)는 YS의 단식투쟁이다. 1982년 4월, 민주산악회 서울지부 회합에서 YS는 동행한 뉴욕타임즈 도쿄지국장 헨리 스토크에게 “미국이 전두환을 버려야 한다”고 발언했다. 전두환은 이를 문제 삼아 ‘정치활동 금지조치’를 위반했다며 YS를 또 다시 가택연금한다.

2차 가택연금 중이던 1983년, YS는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이해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며 상도동 자택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 YS는 언론 통제의 전면 해제·정치범 석방·해직 인사들의 복직·정치활동 규제의 해제·대통령 직선제를 통한 개헌 등 5개항을 내걸고 단식에 돌입, 무려 23일 동안 목숨을 건 투쟁을 지속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야당의 거두(巨頭)인 YS가 단식 투쟁에 나선 사실이 알려질 경우 국민적 민주화 열망이 되살아날 것으로 우려했다. 때문에 전두환 정권은 단식 기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신문에는 ‘정치현안(政治懸案)’이라는 아리송한 단어만 반복 게재됐다.

실제로 1983년 5월 18일부터 6월 8일까지, 우리나라 신문에서는 ‘단식’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어렵다. YS 단식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6월 9일, YS가 단식 중단을 선언한 뒤다. 〈동아일보〉는 9일 신문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지난 5월 18일부터 단식을 벌여온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가 단식 23일 째인 9일 오전 입원중인 서울대학병원에서 단식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김 씨는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을 규제받고 있었는데, 지난달 18일 정치 피규제자 해금 등을 주장하면서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단식을 시작, 그달 25일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단식을 계속했다”고 썼다.

1983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 사설에는 당시 상황이 더 소상히 표현돼 있다.

“그동안 내용을 전혀 밝히지 못한 채 보도돼 왔던 ‘정치관심사’ 또는 ‘정치현안’은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의 단식 사태였음이 뒤늦게 공개됐다. 그것도 23일 동안에 걸친 단식을 중단한다는 그 자신의 성명을 계기로 국민이 궁금해 하던 진상의 일단이 공표된 것이다. 언론은 그의 단식을 지켜보면서도 20여 일 동안이나 그저 ‘관심사’와 ‘현안’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써왔을 뿐이다. 따라서 구구한 억측과 유언비어가 떠돌았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언론의 정상적인 기능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비정상의 ‘유언통로(流言通路)’를 확산시켜온 바를 자성한다.”

그러나 언론의 침묵과 관계없이, YS의 단식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YS의 부인 손명순 여사는 일일이 전화로 외신 기자들에게 단식 사실을 알렸다. 상도동계 인사들도 발로 뛰면서 YS 단식 투쟁 알리기에 나섰다. 신용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언론보도가 봉쇄된 가운데, 언론들은 제목을 ‘최근의 관심사’에서 ‘현안’, ‘모 인사의 식사 문제’ 등으로 바꿔 게재해 국민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이때 YS의 목숨 건 단식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민주산악회원들의 눈물겨운 활동이 있었다. 골목길에서, 버스 안에서, 등산길 입구에서 경찰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 다니면서 국민들에게 단식을 알리는데 전력을 다했다. 성명서 한 장을 문방구 등에서 몰래 복사하고, 이것을 뿌리다가 도망가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민주산악회원들이 체포돼 구류를 살았다. 이렇게 YS의 단식이 국민들에게 서서히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당황한 전두환이 민주정의당 권익현 사무총장을 YS에게 보내 단식 중단을 종용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나중에 건강이 우려할 정도로 악화되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단식 중단을 간곡히 권유한 뒤에서야 YS는 후일을 기약하며 단식을 중단했다.”

YS의 단식은 잠자던 민주화 열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 일을 계기로 결집한 민주 인사들은 1년 뒤인 1984년 5월 민추협을 발족했다. 민주화운동의 쌍두마차 YS와 DJ가 연합하고, 재야인사까지 힘을 모은 민추협은 신한민주당(신민당)으로 이어져 1985년 2월 초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선다. YS의 단식이 일으킨 나비효과는 박정태의 저서 〈김영삼의 사람들〉에 잘 기술돼 있다.

“김영삼의 단식투쟁은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5·17 후 군사독재의 폭압에 침묵했던 정치권 인사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고, 재야 정치인들을 하나의 민주세력으로 결집시키는 기폭제가 됐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투쟁은 1년 후 민주화 추진협의회라는 열매로 결실을 맺는다. 단식투쟁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정진호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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