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농단’ KAI, 사외이사제로 파국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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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농단’ KAI, 사외이사제로 파국 막을 수 있었다
  • 한설희 기자
  • 승인 2017.08.25 1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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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눈치보는 검찰·방만한 경영… 원인은 ‘정부 입맛대로’ 사외이사들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 방산비리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가 해외 수주 중단·사령탑 공석으로 경영정상화가 요원해지면서, 지역민과 노조의 '카이 살리기' 요구가 거세지는 상황이다. ⓒKAI

검찰 ‘뒷북 수사’는 정권 눈치보기 때문?

반복무상(反覆無常). 이랬다가 저랬다가 할 뿐 일정한 주장이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 검찰의 KAI 수사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어 보인다. 박근혜 정권 때는 침묵으로 일관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니 정계 로비 의혹도 수사범주에 포함시킨다며 바삐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하성용 사장은 KAI 경영관리본부장 시절 회사 자금을 횡령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에도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지난 2014년 경찰이 포착한 KAI 내부 비리 수사 내용도, 2015년 감사원에서 발표한 한국형 헬기 수리온 개발 과정에서 자행된 원가 부풀리기 등의 불법 행위 수사도 검찰에 넘겨졌지만 검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정권 교체가 이뤄진 올해들어 7월에야 검찰은 KAI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급작 수사에 열중했다. 그러나 KAI 임직원을 소환하려 했다가 영장이 기각돼 실패하고, 비자금 의혹 ‘키맨’으로 지목된 손승범 차장 행방도 놓쳤다. 현재 검찰이 내놓은 성과는 KAI 중심에 있는 임원진도 아닌, 협력업체 대표인 황모 씨 구속이 유일하다. 시급한 사안을 늑장 수사하니 증거 포착이 쉬울 리 없다.

검찰의 수사가 늘어지는 사이 KAI의 경영 사정은 절벽으로 몰렸다. 신용 등급은 ‘하향 검토 등급감시대상’으로 떨어졌고, 주가는 40% 폭락해 기존 7만 원대에서 25일 오전 기준 4만 원 가량에 그쳤다. 여·수신이 동결되고 금융기관의 채권회수로 유동성 위기는 시간문제다. 이대로 가면 협력업체까지 줄줄이 도산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년 전부터 KAI 관련 제보가 지속적으로 입수됐는데도 본격적인 조사가 이제야 이뤄진 것은 확실히 비정상적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박 정부와 하 대표가 모종의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검찰이 눈치보기 수사를 했다는 추론도 나오는 실정이다. 실제로 하 대표는 2012년 박 전 대통령의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법정상한액인 1000만 원의 정치자금을 후원한 바 있으며, 하 대표 부인은 박 전 대통령과 먼 친척 관계다. 수리온의 결함을 인지했으면서도 납품을 받은 장명진 방위사업청장 역시 박 전 대통령과의 동기동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권 눈치를 보는 검찰도 사태 악화의 원인이지만, 정권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도록 KAI 고위직을 친정부 인사가 장악하는 시스템도 문제다. 외환위기 이후 KAI 정상화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8조 원에 달하며, 고등훈련기 T-50·한국형 헬기 수리온 개발에는 국민혈세가 직접 투입됐다. 당연히 실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입증된 인물이 대표 자리에 앉아야 하고, 그의 일탈 행위를 감시할 수 있는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사외이사제 구멍 ‘숭숭’… 文정부 처벌보단 제도 개혁으로 예방에 힘써야

▲ 2014년 경찰이 KAI 내부 비리를 포착한 후 검찰에 내용을 넘겼지만, 검찰은 정권 교체가 이뤄진 최근에서야 KAI 임직원을 소환했다. 현재 검찰이 내놓은 성과는 협력업체 대표인 황모 씨 구속이 유일하며, 임원진 단계까지 구속수사망을 넓혀가진 못한 상태다. ⓒ뉴시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사외이사제는 기업 경영에 참여하지 않으며 대신 전문성을 가지고 내부 경영을 감시·견제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제도다. 미국의 경우 이사 가운데 절반 정도가 그 기업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외부이사로 구성돼 철저하게 기업권력의 집중과 횡포를 방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성용 전 사장 부임 이후 KAI는 친정권 사외이사를 대거 선임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하 사장 재임기간 동안 모든 안건에 100% 찬성표를 던졌고, 심지어 일부는 출석률이 절반에 머무르는 행태를 보였다. 2013년 하성용 취임 직후 주주총회에서 4명의 친정권 성향 사회이사가 선임됐다. 이들 중 한 명인 권오형 이사는 새누리당 총선 비례대표 후보 공천을 신청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를 선언했던 인물이었으며, 신규 선임 사외이사 모두 최경환 등 정권 실세와 연이 닿았던 인물이었다. 관료 출신도 3명이었다.

KAI뿐 아니라 우리나라 상장 그룹 대부분 사외이사들은 청와대·공기업·사법기관 출신의 비전문가 위주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상장 기업 정기주주총회 결과를 분석한 대신지배구조연구소의 리포트를 살펴보면, 새 사외이사 가운데 36.2%가 공정위·국세청·감사원·금감원·검찰 등 권력기관 출신으로, 오히려 지난해보다 2.4% 증가한 수치다. 관련 전문가는 거의 전무하다. ‘감투’쓰고 ‘낙하산’타고 내려온 셈이니, 축적된 업계 전문성으로 경영을 감시하는 사외이사제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방산비리는 적폐”라며 방산비리 척결과 국방개혁을 강조했다. 개혁의 적임자라는 송영무 국방부장관 임명까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했다. 그러나 KAI 차기 사장에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을 내정한 것은 갸우뚱한 일이다. 경제관료 출신인 안 전 차관의 항공산업 관련 전문성은 아직 입증된 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문 대통령 취임 이후 새 사외이사 중 관료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도 불안한 지점이다. 친정부 성향이 짙을수록 경영진을 견제하는 데 충실하기보다는 정부와의 관계 유지만을 바라기 쉽다.

KAI의 위기는 회사 내부와 몇몇 1차 협력업체의 위기만이 아니다. 경남 지역의 수많은 2·3차 협력업체가 연쇄적으로 부도를 맞는다면 그로 인해 지역경제도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또한 KAI가 개발한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이 비행 안전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밝혀져 결국 전력화 중단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만일 검찰의 주장대로 KAI가 수리온 등 군사무기 개발·납품 과정에서 최소 수백억 원대의 부당한 이득을 챙겼다면, 이는 국가안보의 근간을 뒤흔들고 국민의 안보를 우롱하는 중대 사태다.

북한의 잦은 핵도발로 남북 간 군사 긴장이 팽팽해진 현 상황에서 문제가 많은 군무기를 납품하는 방산비리는 국민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종의 국정농단이다. 비리가 있다면 반드시 밝혀내고 엄중한 법적 처벌을 내리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제는 개인이 아닌 체계, 일탈이 아닌 구조에 집중할 때다. 사건의 원흉을 벌하는 것보다 더 이상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민 혈세가 들어간 산업의 경영 사령탑에 능력이 입증된 인물을 배치하고, 사외이사제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사외이사의 전문성을 보장하는 등 제도를 정비할 때다. 방산비리 적폐와의 전쟁을 시작한다는 문 대통령이 칼 휘두르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담당업무 : 통신 및 전기전자 담당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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