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그릴] YS ‘옥살이’로 시작된 그 투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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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그릴] YS ‘옥살이’로 시작된 그 투쟁의 시작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7.09.30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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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민정이양 약속 파기 후 첫 시위 장소…지금은 정보 찾을 수 없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박정희의 군정 연장에 반대하기 위해 열렸던 시위 장면. 오른쪽에서 세 번째 YS의 모습이 보인다 ⓒ 김영삼민주센터

김영삼 전 대통령(YS)에 대해 세간에서는 흔히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 ‘민주화투쟁을 했지만 형무소에 간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심에도, YS는 시원한 답변을 한 적이 없다. 다만 대통령에 당선된 후 군복무 기간에 찍은 사진이 공개돼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라는 멍에는 벗었다.

그렇다면 YS가 형무소에 간 적은 없을까. 복진풍 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은 이에 대해 ‘오해’라는 답변을 내놨다.

“많은 사람들은 YS가 형무소에 간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꼭 하는 말이 있다. ‘당신은 역사공부를 더해야 한다. 내가 바로 YS 감방 동기생이다.’”

YS의 구속은 일명 ‘백조그릴’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시사오늘>에서는 사건이 있었던 ‘백조그릴’을 추적해 봤다.

▲ 현재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YS의 형무소 수감 기록 서류. 동그라미 안에 'YS의 이름'과 죄명인 '집회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 적혀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장교 250여 명, 부사관·병 3500여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서울 주요기관을 점령했다. 그러고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 정권을 장악하고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혁명공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의 재건에 총격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들의 과업을 성취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63년 3월 16일, 박정희는 민정 불참과 민정 이양 약속을 깨뜨리고 ‘군정을 5년 동안 연장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공포, 모든 정당 활동을 정지시켰다.

이러자 박정희의 본심을 알게 된 재야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백조그릴’은 반독재 투쟁의 시작점과 같은 장소였다. 같은 해 3월 22일, 윤보선 전 대통령과 변영태 전 국무총리, 백두진 전 국무총리, 박순천 민주당 대표위원, 유진산 의원, 김영삼 의원 등은 서울 종로의 백조그릴에 모여 군정반대시위를 벌였다. 

▲ 과거 종로 신신백화점 자리에는 SC제일은행 본점이 들어서 있다 ⓒ 시사오늘

당시 이들은 정보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약혼식이 열리는 것처럼 속여 백조그릴에 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3년 3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이때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이날 아침 일찍부터 이 대회의 지령을 받기 위해 여러 사람들은 대회장인 백조그릴 근처의 다방에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장소가 지정하달된 것은 대회시간인 12시가 거의 다 됐을 때였다. 11시 50분경부터 백조그릴의 문턱엔 모두 대회 참가 인사들의 발길이 바쁘게 오갔는데, 거리 쪽을 향한 그릴의 문에는 엉뚱하게 ‘김인오 군, 박숙자 양 약혼식장’이라는 위장표지가 붙어 있어 몇몇 참가자들을 웃겼다.”

이 사건으로 YS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복진풍 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은 2010년 <시사오늘>과 만나 백조그릴 사건의 준비 과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박정희는 당시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63년 초 다시 집권연장음모를 폈다. 야당과 국민을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YS를 비롯해 야당인사들이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주로 밤에 플래카드 등 시위도구 등을 만드는 등 극비리 속에 진행됐다. 백조그릴 사건은 워낙 극비사항이라 야밤에 주로 비상소집 등을 통해 진행됐고 그 과정 중 YS의 계획과 아이디어가 있었다.”

백조그릴 사건은 그리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감시와 통제가 워낙 삼엄했던 탓으로 추측된다. 이날 <경향신문>은 “종로 신신백화점 맞은편에 있는 '백조그릴'을 출발점으로 삼은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잠시의 군정연장도 결사반대한다’는 구호와 비라를 뿌리면서 로터리 쪽으로 약 10분 동안 100미터가량 행진했으나, 미리 대기 중이던 시경 기동대원들이 몰려나와 맨투맨으로 하나씩 버스 안으로 끌고 들어가 40여명 중 15명이 순식간에 종로서로 연행되고 말았다”고 썼다.

▲ 종로 신신백화점 맞은편에 위치했다는 당시 기사로 추측했을 때, 백조그릴은 現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시사오늘

이러다 보니 백조그릴에 대한 정보는 더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다. ‘종로 신신백화점’ 맞은편에 있었다는 언급이 전부다. 신신백화점은 현재 종각역 2번 출구의 SC제일은행 자리니, 現 종로타워 자리에 위치하지 않았을까 어림잡을 수 있을 뿐이다. 한때 정치인들의 주된 회합장소로 기능했던, 또 반독재 투쟁의 시작점이었던 장소치고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너무 오랫동안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한편, 경찰은 YS를 포함한 이들을 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법회의 관할관으로부터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했다. 당시는 계엄령으로 군인들이 모든 것을 장악한 살벌한 시기였다. 이들을 내란음모죄로 몰아 넣을 생각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YS와 함께 김동영·김상흠·복진풍·서정귀 등 10여 명이 큰 방 하나에 같이 있게 되었는데, 김상흠은 평소 ‘난 독립운동을 하다 함흥감옥에 갇힌 적이 있다’고 자랑삼아 무용담을 늘어놨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후 김상흠은 태도가 돌변했다. 면회자들이 오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겁먹은 표정으로 물어봤고, 수감 중이던 인사들에게 ‘우리 모두 내란음모죄로 사형 아니면 무기래요’라며 전전긍긍했다고 전해진다.

YS도 2009년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그 분 참 겁쟁이었어. 정말 사형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면회 오는 사람만 있으면 붙잡고 우리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어봤지”라고 말했다.

어쨌든 군사재판은 빠르게 진행됐고, 이들은 남산 근처에 위치한 군사재판정에 계속 불려 다녔다.

그러나 서슬 퍼런 쿠데타 세력도 미국 앞에서는 꽁무니를 뺐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구속정치인 석방’을 요구하자, 박정희 정권은 미국 눈치를 보느라 이들을 서둘러 석방했다. 결국 YS는 22일만에 ‘내란음모죄’가 아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적용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풀려났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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