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문, 이철승과 어울리며 김영삼 ‘배신’
스크롤 이동 상태바
고흥문, 이철승과 어울리며 김영삼 ‘배신’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09.07.13 12: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⑬ 고흥문의 변신

 
“유용근이가 배신이라도 했습니까?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나는 중앙당 총무 부국장으로서 매일 아침 중앙당으로 출근해 오전에는 당무를 보고 오후에는 그랜드호텔로 가서 그날 당에서 있었던 일들을 고흥문 의원에게 보고하고 지침도 받고 계보 내의 동향도 살폈다. 그러고 나서 약국으로 가거나 건축현장으로 가서 경제 활동을 했다.

계보요원 중에 개인사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녁 늦게까지 저녁을 먹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정치현안을 비롯한 계보 내의 여러 가지 일들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자니 고흥문 의원과 계보 내의 현역의원들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는 일이 많았다. 나는 나 나름대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또 혹시라도 출마의 기회가 온다든지 또 지역의 당원동지들과 다과회라도 종종 하려면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내 힘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돈 버는 일에 오후 시간을 보내느라 그들과 어울릴 시간을 자주 갖지 못했다.
 
 


 
그 당시 전당대회 후 중앙상무위원 선출에 문제가 생겨 이왕에 중앙상무위원이었던 동지 모두를 다시 중앙상무위원으로 재선임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런데 그중 내가 경기도 책임자로 추천해서 중앙상무위원이 된 유용근을 “고흥문 계보 내의 노 국장을 뺀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없으니 시켜서는 안 된다고 해서 빼기로 했는데 노 국장이 양해해주어야겠다”고 고흥문 의원이 강력하게 통고를 하는 것이었다.

“유용근이가 배신이라도 했습니까? 왜 안 된다는 겁니까? 경기도의 조직책임자가 없어서 서울에 있는 저에게 임시로 경기도를 맡기시고 사람을 골라 추천하라고 해서 경기도를 다 돌아다녀 겨우 그 사람을 추천해서 중앙상무위원을 한 번 시킨 것뿐인데, 제대로 써보지도 않고 버리는 것은 인사원칙에 있어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아, 이 사람아. 용근이는 계보요원으로서 소신도 없을 뿐 아니라 다른 계보의 다른 동지들의 애기야. 그래서 모두 용근이는 빼야 한다는데 자네만 고집을 부리면 어떡하나?”
그래서 내가 말했다.

“사람의 속을 버선짝처럼 뒤집어볼 수도 없고 제가 일일이 용근이를 따라다닐 수도 없고 하니 저도 어떻게 장담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배신했다는 확증이 없는데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을 단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는 어렵게 된 상무위원 자리를 한 번 빼앗기면 그 사람은 정치적으로 적어도 중앙무대에서는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유용근은 김형일 의원 추천으로 총무국 서무부장까지 지낸 사람인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역구에서 중앙당 파견 대의원에서 조차도 제외시켰으니 만약 고흥문계에서 상무위원까지 빼 버리면 그야말로 치명타가 되었다.

나는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자주 만났던 최영수·장승훈·유용근 세 사람을 앉혀 놓고 유용근에게 매사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나무랐다. 그리고 내가 다시 선임되도록 애는 써보겠지만 현재까지는 위태롭다고 알려주고 앞으로 정치를 하려면 소신을 가지고 박력 있게 하라고 일러주었는데, 유용근은 묵묵부답이었다.

고흥문 의원은 내 양해를 구하려고 사무실에 갈 때마다 며칠이나 유용근 문제를 이야기했다. 나흘째 되는 날인가, 고흥문 의원이 내게 말했다.

“노 국장, 오늘은 완전히 결정을 해야겠어. 이 사람 어떻겠나?”
“이 계보는 고흥문 계보입니다. 마음대로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용근이도 딱할 뿐 아니라 우리 계보도 앞으로는 경기도 책임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용근이가 부족하면 가르쳐서 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충정으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오야붕 생각대로 하십시오. 되든 안 되든 저는 승복하겠습니다.”

내 말을 경청하던 고흥문 의원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알았어, 이 사람아. 내가 졌어. 자네 말대로 하지.”
그렇게 유용근 문제는 끝이 났다.

그런데 참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인가 보다. 얼마 후에 화성 지구당 출신 국회의원 김형일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보궐선거가 치러졌는데, 고흥문 씨와 고흥문 계보에서 불과 얼마 전에 내쫓으려고 했던 유용근에게 고흥문 씨 몫으로 신민당 공천을 주어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다.
 
고흥문 의원이 계보를 창설하고 처음으로 그 지역에 고흥문 씨 몫으로 공천권이 떨어진 것이다. 만약 유용근이라도 그 지역에 없었더라면 고흥문 의원은 단 한 사람의 자기 사람도 공천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신체제 하에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 총재는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박정희를 상대로 거세게 정권투쟁을 하며 대통령직선 개헌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자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는 노골적으로 야당을 탄압해서 모두가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는데, 고흥문 씨는 선명성을 강조하면서도 김영삼 총재의 대여투쟁에 대하여는 슬쩍슬쩍 불평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흥문 의원은 고 조병옥 박사 밑에서 정치를 시작해 늘 민주당 구파로 알려져서 유진산·김영삼 총재와 함께 걸어왔는데, 중도통합을 주장하며 온건노선을 내건 이철승·신도환 씨 등과 어울리며 변신하고 있었다.
 
“전당대회 연설은 가장 졸작이고 부끄러운 행위였다”
 
1976년 5월 25일, 전당대회를 태평로 시민회관에서 연다는 공고가 났다. 2년 전의 전당대회 때만 해도 고흥문 의원과 김영삼 총재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로 서로 협력해 김영삼 총재가 당권을 잡고 박정희정권에 맞서 민주화와 정권투쟁을 강력하게 벌였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서 고흥문 의원은 이철승·신도환·정해영·정운갑 씨 등과 비주류를 형성하고 김영삼의 당권파와 맞서 치열한 당권경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전당대회를 주관하는 총무국 부국장으로서 그전까지는 주류측 당직자였는데, 고흥문 씨가 비주류에 가담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비주류측 당직자로 변신하고 말았다. 25일 전당대회 당일 아침, 나는 전당대회를 주관하는 주무국 부국장으로서 전당대회장에 갔다.
 
그런데 주류와 비주류 양측에서 동원한 청년들이 맞붙어 각목 등을 들고 서로 대회장을 선점하려고 싸우다가 주류가 비주류에 밀려 대회장은 비주류 차지가 되고 대회장에 들어온 비주류 대의원들만으로 반쪽 대회를 치렀다. 이날 대회를 각 언론은 ‘신민당 각목대회’라고 이름 붙여 보도했다.

전당대회 사회는 총무국장이 보게 되어 있는데, 당시 총무국장은 황명숙 의원이었다. 그런데 황 의원은 주류측이어서 대회장에 들어오지도 못해서 비주류만의 반쪽 대회 사회는 불가불 총무 부국장인 내가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회장 마이크를 잡고 부득불 김영삼 총재와 주류측를 비난하며 회의장을 정리했다. 내가 정당활동을 하면서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그때 내가 했던 연설은 가장 졸작이고 스스로 창피하게 생각하는 부끄러운 행위였음을 반성하며 나는 하나님께, 그리고 김영삼 총재님께 용서를 빈다.
 
1976년 9월 15일, 신민당 수습 전당대회가 공고되었다. 지난 5월 25일에 치러진 반당대회(각목대회)에서 두 조각 난 당을 하나로 묶어 수습하는 절차를 밟기 위해 양측에서 대표를 내어 3개월 이상을 보내고 어렵게 하나로 봉합하는 전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당헌을 집단지도 체제로 바꾸어 최고위원 6인에 1인의 대표최고위원을 두어 합의제로 당을 이끌어가기로 했다. 고흥문 의원은 최고위원에 나가기로 하고 계보요원들을 전국에 내보내 대의원들을 접촉하며 선거운동을 했다.
 
2년 전 전당대회 때는 전례대로 구파인 김영삼 쪽과 협력하여 서로 좋은 관계로 선거운동을 했는데 이번에는 정반대로 이철승·신도환 씨 쪽과 어울려 협력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당내에서 이철승, 신도환 씨를 잘 알지만 당을 같이하면서도 유진산계로 일관해 구파로 진산계를 오랫동안 함께한 김영삼 진영과는 스스럼없이 지내던 터라 갑자기 신파인 이철승 씨 측과 어울리려고 하니 서먹서먹하기도 했지만 계보에서 결정해서 하는 일이라 내키지 않아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김영삼 총재의 선명야당 노선에 뜻을 같이하고 야당이면 정권쟁탈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정책을 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도통합이라는, 뜻도 자세히 모르는 지도노선을 엉거주춤하게 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하지만 고흥문 의원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할 수 없이 따라갔다.

고흥문 의원도 그런 정서를 알았기 때문에 계보 전체를 모아 놓고 무조건 자기 의견을 따라달라고 강압을 했다. 연세도 높고 선배이신 함기환 씨는 고흥문 의원의 비서인 조규흥 비서에게 노골적으로 이렇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조 비서, 미안해. 나는 오늘부터 이 계보에 나오지 않을 것이니 길에서 만나면 인사나 하고 지내세.”
하지만 고흥문 의원의 의지가 워낙 강해서 별도리 없이 따라가는 상황이었다.

전당대회 때는 늘 하는 일이지만, 우리 측 대의원들을 모두 신촌 쪽에 있는 여관에서 합숙시켰는데, 함께 투숙하는 대의원들을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또 반대쪽에서 와서 우리 쪽 대의원들을 접촉하는 것도 막아야 했다. 내가 책임을 지고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우리 측 대의원들은 구파 성향이 강해서 지지파인 고흥문 의원의 최고위원 선출 때는 100% 시키는 대로 하겠지만 대표최고위원 선출 때 이철승을 찍는 것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방 대의원은 소문을 우려해 못했지만 계보 내의 중앙 대의원들은 공개투표를 하게 하자는 누군가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대로 하도록 특정한 감시원(?)을 두어 기표한 투표용지를 감시원에게 보여주게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전당대회 후 계보 중심으로 짜여지는 관례적인 인사개편 때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해서 가까운 사람끼리 수군대기만 할 뿐 내놓고 반발하지는 못했다.

나와 몇 사람은 기표한 투표용지를 감시원에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실제로 장모 씨는 투표용지를 보여주었느니 안 보여주었느니 하고 말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한 계보의 보스가 믿고 조직을 맡겼으므로 그 책임을 충실하게 보이든 안 보이든 고흥문 씨의 방침대로 최고위원에는 당연히 고흥문을 찍고, 대표최고위원에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이철승을 찍었다.

나는 군사독재의 연장인 반민주 정당 공화당을 규탄하며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대열에 서 있으면서도 알량한 나 개인의 정치적 이익이 손상될까 우려해 내가 진정으로 잘되기를 바라고 모시던 고흥문 씨의 잘못된 판단과 반민주적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간하고 제지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까지 후회하며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 수습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는 주류에서 이충환·유치송·김재광, 비주류에서 이철승·신도환·고흥문 여섯 분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치러진 대표최고위원 선출 때는 1차투표에서는 김영삼·이철승·J씨 순으로 득표를 했으나 과반수 미달로 2차투표에 들어갔을 때 J씨가 사퇴하며 이철승 씨를 밀기로 해서 이철승 씨가 김영삼 씨보다 20여 표를 더 얻어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2년 만에 당권이 김영삼 총재에서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으로 바뀌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