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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散策] 정병국 "YS가 잡으려던 호랑이는 박정희"
바른정당 정병국 의원
88년 1월 1일 첫 출근...'구두정리'하면서 정치 첫걸음
YS "혜영이 어머니를 맡아라"...손 여사와의 인연 시작
YS는 진정한 의회민주주의자...의원의 역할 늘 강조
보수정치 괴멸의 가장 큰 원인은 패거리 정치
YS 정치철학을 왜곡시키는 홍준표 대표...보수 망신
2017년 11월 26일 11:01:10 송오미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구술)=정병국, 정리=송오미 기자)

“띠리리리.”

방에서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비서였다.

“의원님, 기자들 도착했습니다.”

오전 10시 30분, 인터뷰가 예정된 시간이었다. 오후에는 YS 서거 2주기 추도식에서 사회를 보기로 돼 있어서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현충원으로 이동할 참이었다.

기자들이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자마자, 내 머릿속은 온통 상도동 비서시절로 가득 채워졌다.

인터폰이 울렸다. 사람들이 아무도 안 받길래, 멋도 모르고 내가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니, 알제?” YS였다. YS의 첫 마디가 무슨 말인지 몰라 “예?”라고 대답했더니, “한심한 놈”이라는 짤막한 한마디만 남기고 인터폰을 ‘탁’ 끊어버렸다. 1988년 1월 2일, 상도동으로 출근한 이튿날이었다.

기자가 물었다. “대표님은 YS 총재 비서로 정계에 입문하셨는데, 어떻게 YS랑 인연을 맺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YS가 그립던 요즘, YS에 대한 회상의 여정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아 일단 커피 한잔 마시고 편하게 시작하자고 했다. 원두를 직접 갈아, 커피를 내렸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군사독재 정권시절과 맞서 싸우던 나의 대학생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 그 어느 때보다 YS가 그립던 요즘, YS에 대한 회상의 여정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 같아 일단 커피 한잔 마시고 편하게 시작하자고 했다. 원두를 직접 갈아, 커피를 내렸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군사독재 정권시절과 맞서 싸우던 나의 대학생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1. 상도동 아닌 동교동에서 정치시작 할 뻔하다

80년도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구속과 강제 징집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는데, 강제 징집을 거부하고 그냥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제대하고 복학해서 그때부터 다시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졸업 후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87년도에 또 수배를 받게 됐는데, 그해 6월 23일 안기부에 붙잡혀서 남산으로 끌려갔다. 남산 지하실에서 며칠이 지난지도 모르고 계속 취조를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수사관이 들어와서 내 뒤통수를 탁 치면서 “야, 임마. 너는 참 운이 좋아”라고 말을 하더라.

그 다음날 머리를 짧게 자른 007 가방을 든 남자 두 명이 들어와서는 나보고 야전 침대에 엎드리라고 했다. 나는 고문을 또 하는 줄 알고,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등에 차가운 무언가를 올리더라. 돼지비계였다. 내가 맞아서 온 몸이 다 시커멓게 돼 있으니까 그 멍을 뺀다고 돼지비계로 마사지를 해줬다. 그렇게 멍을 다 빼고 나를 중부 경찰서 유치장으로 데리고 갔다. 이때까지 여기에 있었던 것처럼 서류를 작성하더니, 나를 서대문 구치소로 넘겼다.

구치소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100일을 보내고 나왔는데, 그 당시 재판받을 때 변론을 해준 게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소속의 조승형 변호사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비서실장과 헌법재판관을 지낸 분이다. 그 인연으로 DJ가 있던 동교동에 가게 됐는데, 거기서 정치를 시작할 뻔 했다. 그런데 동교동 분위기는 나한테 맞지 않았다. 딱딱하고 권위적이라고 할까. 그래서 중간에 나왔다. 이게 제도권이라서 그런가보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인 상도동이랑 비교해보니까 그냥 동교동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다.  

87년도에 직선제 쟁취를 하고 본격적인 대선 운동이 시작됐을 때다. 서울대 대학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홍승권이라는 친구가 세종문화회관 뒤쪽에 오피스텔을 얻어서 홍보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해서 도와주게 됐다. 나는 재야 운동을 하면서 언더페이퍼 제작을 주로 해서 그 분야에 대해서는 ‘빠꼼이’였다. 그런데 보니까 인쇄물을 발주하는 사람이나 업자들 모두가 도둑놈들이더라. 가격도 두 세 배로 뻥튀기고, 중간에 발주하는 사람들이 커미션도 먹고, 물량도 속이고, 시간도 제대로 못 맞추고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래서 내가 업자들 불러서 “내가 네고(협상)한 대로 하면 내일 현금으로 대금을 주고, 아니면 선거 끝나고 주겠다”고 하면서 가격 협상을 했다. 협상을 하고, 창고와 사람을 얻어 달라고 해서 내가 본격적으로 관리를 하게 됐다. 그 뒤로 어떠한 차질도 빚어지지 않았다.

그 당시 통일민주당 대통령 선거대책본부 재정국장을 맡고 있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그런 나의 일 처리하는 모습을 상당히 인상 깊게 본 것 같다. 대선 패배 후 며칠이 지나고 나서 당시 YS 실세비서였던 박종웅 전 의원이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같이 일을 하자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제도권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서 첫 만남에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 나를 옥바라지를 했던 결혼할 후배가 있었는데, 여자 집에서 내가 운동권이고 직업도 없고 하니까 결혼하는 걸 반대했다. 그래서 제도권 정치에 들어간 거다. 뭐, 물론 결혼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지금 내 집사람은 삼당합당 후 YS가 민자당 대표가 됐을 때, 여성정책 강화를 위해 여성 비서관을 공채로 뽑았는데, 그때 뽑힌 사람이다. 283대1의 경쟁률을 뚫은 거다. 내가 그때 대외협력 홍보담당이라 공채 문안을 작성하면서 ‘정병국 와이프 뽑는 것’이라고 했는데, 진짜 말이 씨가 됐다. 하하. 최종 서류에서 30명 정도를 뽑아서 면접을 보는 날이었는데, 토요일이었다. 내가 면접자들한테 오늘 다른 일정 때문에 빨리 마쳐야 하는 사람은 손 들어보라고 하니까, 다 손을 들더라. 그래서 내가 “비서는 자기 생활이 없다. 빨리 해달라고 하면 해주겠는데, 이것도 평가의 대상이다”라고 했더니, 딱 3명만 손을 들고 있더라. 그 중 한 사람이 내 집사람이다. 그때 아주 발칙하고 당차고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 덕을 지금도 많이 본다. 정치를 하는데 내가 비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집사람 덕이 크다. 나도 정치인이기 전에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집 사람이 이런 저런 요구를 했다면, 당당하게 정치를 못했을 거다.

   
▲ 1988년 1월 1일, 상도동으로 첫 출근을 했다. 새벽에 갔는데,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당시, 김상봉 비서가 나한테 구두주걱을 주면서 현관에서 구두 정리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구두주걱을 들고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라고 하면서 신발정리를 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2. 88년 1월 1일 첫 출근…‘구두정리’하면서 정치 배우다

87년 대선 패배 후 비서실을 구조조정 했다. 원래 20여명 정도였는데, 홍인길, 김희완 선배 등 5명만 남겨놓고 다 내보냈다. 2명을 새로 뽑았는데, 그때 내가 들어갔다. 그 뒤에 내 동년배 사람을 3명 더 뽑았다. 그렇게 해서 비서그룹이 시니어와 주니어 그룹으로 구성됐다. 

1988년 1월 1일, 상도동으로 첫 출근을 했다. 새벽에 갔는데,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당시, 김상봉 비서가 나한테 구두주걱을 주면서 현관에서 구두 정리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구두주걱을 들고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라고 하면서 신발정리를 했다.

그 다음날(2일)이었다. 아침에 인터폰이 막 울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도 안 받았다. 그래서 멋도 모르고 내가 받았는데, YS였다. 첫 마디가 “니, 알제?”였다. 내가 “예?”이러니까, “한심한 놈”이러면서 바로 탁 끊어버렸다. 어리둥절했다. 재정 담당 비서관을 하고 있던 홍인길 선배한테 물어봤더니, “너, 정병국이 이제부터 시작이다”라고 하면서 껄껄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YS가 인터폰을 하면, 무조건 첫 마디가 “니, 알제?”였다. 홍 선배가 김기수 수행실장 선배한테 물어보라고 해서 물어보니 몇 시에 누가 오는지를 안내해 드리면 된다고 했다. 그 뒤로 자신감을 얻고 인터폰이 울릴 때마다 내가 딱 잡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인터폰 잡는 걸 기피하지 않은 이유는 상도동에 누가 오고, 가는 지를 빨리 파악하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랬더니 다른 누구보다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입수할 수 있었고, 상황 판단을 잘 할 수 있었다. 그래서 YS가 “니, 알제?”이러면, 몰라도 “예”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몇 마디를 더 해줄 때가 있고, 보통 “오면, 올려 보내라이”라고 말씀을 했다. YS가 이름을 말 안 해주면 김기수 선배한테 물어봤다.

YS와의 첫 대면은 첫 출근하고 한 달이 지나서였다. 홍 선배가 나를 YS가 있는 2층으로 데리고 가서 정식으로 인사를 시켰다.    

그 이후 92년도에 대선 준비를 할 때 여의도에 선거 캠프를 차렸는데, 김무성 전 대표가 그 당시에 행정실장을, 김윤환 전 의원이 선대위원장을 맡았었다. 나는 캠프 건물 뒤 삼보빌딩에 사무실을 얻어서 민주계 중심의 ‘비선 캠프’를 관리했다. 그때 YS가 사무실 운영하라고 정치자금을 줬는데, 절반을 다시 되돌려드렸더니 “이거, 미친놈 아이가. 내가 여태까지 정치자금을 줬는데 되가지고 온 놈들은 니들이 처음이다”라고 하셨다. 하하. 그러고는 그걸 다시 돌려주지는 않고, 돈 담당하고 있는 홍인길 선배한테 주더라. 하하.

   
YS가 민자당 대선 후보가 돼서 본격적으로 선거 운동을 하고 있던 어느 날, YS가 날 부르더니 “혜영이(장녀) 어미니를 맡아라”고 했다. 홍 선배가 “정병국이는 참 안 됐다”고 했다. 홍 선배는 YS 인척이라서 누구보다 손 여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손 여사는 일하는 부분에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다. 원칙을 딱 정하면 절대로 안 바꾸는 분이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3. YS “혜영이 어머니를 (병국이가) 맡아라”…손 여사와의 인연 시작

YS가 민자당 대선 후보가 돼서 본격적으로 선거 운동을 하고 있던 어느 날, YS가 날 부르더니 “혜영이(장녀) 어미니를 맡아라”고 했다. 홍 선배가 “정병국이는 참 안 됐다”고 했다. 홍 선배는 YS 인척이라서 누구보다 손 여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손 여사는 일하는 부분에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다. 원칙을 딱 정하면 절대로 안 바꾸는 분이다.

YS가 기독교 장로였다. 그래서 87년 대선 운동 당시에는 주말에 선거 유세를 안했다. 전국에 어디를 가든 아침 조찬기도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표를 헤아려보니까 기독교보다 불교표가 더 많이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판단하기에는 선거 패배의 이유가 종교적 차별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서 이번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손 여사한테 분석된 통계 자료를 보여드리고 선거 패배 원인을 설명하면서 “이번에는 불교, 타종교 중심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했더니, “하죠”라고 대답했다.

일단, 손 여사를 절에 모시는 데에는 성공을 했는데, “나는 사람한테는 절을 하지만,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우상숭배는 안 한다”고 하면서 대웅전에는 절대로 안 들어갔다. 그랬더니 반대편에서 이걸 가지고 공격을 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손 여사를 대웅전에 모시고 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같이 차를 타고 가던 중에 내가 “우리나라 문화재 중 70%가 불교 문화재인데, 우리나라 문화재 잘 되라고 대웅전 가셔서 기도하는 게 어떠시냐”고 했더니. “그래요, 하죠”라고 대답을 했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400여개의 절에 다니면서 대웅전으로 모실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하니까 그해 10월쯤 불교계에서 공식적으로 지지선언을 하더라. 이게 대선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손명순 여사와 당시 정병국 청와대 제2부속실장 ⓒ 정병국 의원실 제공

4. 청와대 제2부속실장으로 임명되다

대통령 취임식 전날 이었다. 홍 선배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 장소로 갔더니, 홍인길, 박관용, 김무성 이렇게 셋이 앉아 있었다. 당시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관용 선배가 “병국이 니가 부속실장을 하겠다고 했다면서?”라고 묻더라. 나는 그때 부속실장이 뭔지도 모르고 “네? 부속실장이요?”라고 대답을 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나를 부속실장으로 이미 임명을 해놓은 것이었다.

원래는 인사지침이 대통령 되기 전 비서실의 시니어는 비서관급, 주니어는 행정관급으로 들어가는 걸로 정리가 돼 있었다. 근데 나는 주니어임에도 불구하고 비서관급인 제2부속실장으로 지정이 되니까, 나머지 주니어 비서들이 “왜 정병국이만 청와대 비서관 하느냐”며 난리가 났었다. 그 과정에서 현철이(YS 차남)가 아버지, 어머니랑 대판 싸웠다. 나를 반대하던 몇몇 인사들이 현철이 주변에 맴돌면서 “정병국을 제2부속실장으로 시키면 안 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추천했다. 근데 결국 현철이가 추천한 사람은 안 됐다.

5. “병국이”에서 배지 다니까 “정 의원”으로…YS는 진정한 의회민주주의자

YS는 정말 국회의원을 존중하셨던 분이다. 평소에는 “병국아, 병국아” 이렇게 부르다가 내가 배지를 다니까 “정 의원”이라고 불렀다. 그 정도로 의회 민주주의자였고,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늘 강조했다. 

YS 밑에서 정치를 배우면서 한국 정치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심도 있게 목격했다. 첫 번째는 군사독재정권이 장기집권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정치지형은 이념적 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다. 오랜 기간 동안 독재 대 반독재, 민주 대 독재 이러한 이분법적인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되고,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그때부터 민주세력이 YS와 DJ로 분화가 됐다.

YS는 90년도에 삼당합당을 하면서 결과론적으로 군사독재 정권이랑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때 YS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명언을 남겼다. YS는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와 지방자치선거 실시를 하면서 진짜 호랑이를 잡은 분이다. 이렇게 해서 YS는 공화정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보수를 대변하는 정당의 중심에 서게 됐다고 본다. 그런데 YS가 호랑이를 잡았지만, 어쨌거나 독재세력이랑 손을 잡았다는 것에서 보수의 출발이 태생적 한계를 갖게 된 것 같다. 그게 지금까지 보수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군사정부의 종식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DJ는 재야단체들이랑 손을 잡으면서 진보 정당을 대변하는 중심에 서게 됐다. 이렇게 해서 진보 대 보수 국면이 된 거다. 

두 분 모두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그런데 그분들이 집권해 나가는 걸 보니, 계파 정치, 패거리 정치, 패권 정치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내가 정치를 하면 이것부터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정치를 시작하고 패거리 만드는 것을 안 했다. 내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난 뒤, 지방선거를 치르는데, 나한테 충성하는 사람들한테 공천해주고 심복을 만드는 그런 것을 안 했다.

   
▲ 지금 보수정치는 괴멸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패거리 정치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유독 바른정당에 애착을 많이 갖는 이유는 지금까지 정치사를 보면 인물중심, 지역중심으로 다 흘러갔다. 그래서 이걸 깨부수고 가치 중심의 정당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만든 게 바른정당이다. ⓒ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6. 보수정치 괴멸의 가장 큰 원인은 패거리 정치

지금 보수정치는 괴멸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패거리 정치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유독 바른정당에 애착을 많이 갖는 이유는 지금까지 정치사를 보면 인물중심, 지역중심으로 다 흘러갔다. 그래서 이걸 깨부수고 가치 중심의 정당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만든 게 바른정당이다. 요즘, “유승민 당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현재로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패거리 정치는 세를 모아서 자기 맘대로 전횡을 하는 거다. 그런데 유 대표는 그렇지 않다. 나는 오히려 유 대표한테 당당하게 앞으로 나와서 책임지라고 했다. 유 대표가 위기를 극복하면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고, 극복하지 못하면 아웃되는 거다. 만약에 유 대표가 당을 전횡한다고 하면, 유 대표를 몰아내던지, 당을 깨든지 할 거다.

유 대표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유 대표는 그냥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다. 이게 장점일수도, 단점일수도 있다. 그리고 유 대표는 지난 대선 때 구태의 방법이 아닌 본인이 능력으로 그 정도의 지지율과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유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한테 반기를 들면서 일거에 스타가 됐는데, 그 정신을 대선 과정에서 일관성 있게 국민들에게 보여줬기 때문에 거기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생긴 거라고 본다. 유승민의 자산이다. 그걸 가지고 패거리 정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탈당할 생각 없다. 탈당하고 한국당으로 간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또, “보수가 위기인데 왜 남(남경필)·원(원희룡)·정(정병국)은 나서지 않고, 후신 세력을 양성 안 하냐”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외적 요인에 의해서 차단이 된 측면이 크다. 16대 때 미래연대, 17대 때 새정치수요모임, 18대 때 민본21 등을 하면서 개혁보수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의논하고 그랬다. 그런데 19대, 20대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공천했다. 지금 한국당에 있는 초재선 의원들의 면면은 모두 훌륭한 범생이들이다. 그런데 전혀 정치력이 없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인 행위를 못한다. 이 사람들이 종종 나한테 “선배들이 들어와서 바꿔주셔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을 한다. 그러면 나는 “당신들이 바꿔야지, 당신들은 뭐하고 있나”라고 말을 한다. 이 사람들도 정치판에 문제가 있는 걸 알면서도 행동을 못 하는 거다.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이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는 게 아니다.

7. YS 정치철학을 왜곡시키는 홍준표 한국당 대표

한국당 여의도 당사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을 쭉 걸어놨더라. 한국당은 그렇게 YS의 정치철학을 이용하고 왜곡시키면 안 된다. YS가 잡으려고 했던 호랑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홍준표 대표는 친박도 잡고, YS 세력도 잡겠다는 것인데, 홍 대표가 YS에 대해서 뭘 아느냐. 보수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같이 정치를 한다는 게 정말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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