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 선출후 최형우 불러
“당신이 민주산악회 맡아줘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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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 선출후 최형우 불러
“당신이 민주산악회 맡아줘야겠소”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07.28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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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 “당내 최측근 없다, 최형우로 대선 치르자” 결심
200만 회원가진 거대 ‘민산’조직 맡기고 2인자로 키워

⑨민주산악회와 최형우

92년은 14대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였다. 그해 3월31일 오후 6시. 민정계 중진 9명이 모여 ‘김영삼 호보추대’를 결의했다.
 
이후 4월 28일 민정 민주 공화계의 다수 현역의원을 포함한 240 여명이 ‘김영삼 지지’를 선언했다. 압도적 세를 확보한 김영삼은 5월19일 전당대회에서 민자당의 14대 대통령후보로 선출됐다.
 
하지만 김영삼은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민자당은 여러 계파들이 모여 있어 자신을 위해 발 벗고 뛰어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김영삼은 자신의 최측근이던 김동영이 세상을 떠나자, 최형우 중심으로 14대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결심한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유세 중인 YS 사진제공=김영삼

92년 6월 16일.

YS는 최형우를 상도동 자택으로 불렀다.

“최 의원, 우리가 대통령후보 자리를 따내기는 했지만, 시작은 이제부터요. 어차피 민정계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발 벗고 뛰어주지 않을 거요. 당신이 민주산악회를 맡아줘야겠소. 난 이번 선거를 민자당이 아닌 당신이 중심이 되고 있는 민주산악회로 치를거요.”

당시 정무장관직을 내놓고 방황하던 최형우는 YS의 제의에 군 말없이 “예”라고 만 했다.
최형우가 상도동 내 2인자를 굳히는 자리였다.

최형우는 마침내 이민우 김명윤에 이어 민주산악회(민산) 3대회장에 취임했다.

5공 시절 민주화투쟁을 이끌어냈던 민주산악회는 최형우가 회장에 취임하자, 조직보강에 착수하며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뛰었다.

최형우는 조직보강을 위해 박태권 박종률 서청원 등을 만나 조직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기로 결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최형우는 “30년 전우를 모두 모아, 민자당 이상의 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민산 조직은 부회장단과 본부장 중심체제로 확대 개편됐다.

부회장으로는 황명수 김덕룡 서석재 강인섭 황병태 김동규 박종률 이우태 등이 선임됐으며, 박태권을 본부장으로 백영기 박정태 오사순 등이 부본부장을 맡았다.

여기에 시도협의회장을 인선해 92년 10월 민산 회원은 200만 명으로 증가됐다.

민산이 예상외로 조직을 확대해 가자, YS는 또 다른 비선조직을 만든다.

실무 작업을 맡은 사람은 김무성과 김현철.

이후 김무성 김혁규 김영춘 김현철 등이 모여 ‘나라사랑실천본부(나사본)’라는 이름을 지어, 정식 발족하기에 이른다.

사실 YS는 민산과 나사본을 하나로 통합해, 최형우 중심으로 선거를 치르기로 결심했었다.

때문에 총괄본부장에 최형우가 임명됐고, 92년 7월 원효로 원통빌딩에서 정식발족을 올릴 때 최형우가 인사말을 했을 정도다.

하지만 최형우가 민산과 나사본을 총괄하며 독주하자, 나사본 조직본부장을 맡고 있던 서석재 의원은 불교계를 잡겠다고 나서며 나사본과 일정거리를 뒀다.

한마디로 최형우와 서석재 간의 알력싸움으로 번진 것. 급해진 건 YS였다.

YS는 상도동 자택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이 나를 대통령후보로 만들어 놓고, 이런 식으로 하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민정계에 기댈 수도 없는데…….”

이어 YS는 “어차피 우리는 하나요. 산악회는 최 의원이, 나사본은 서 의원이 맡아 주력해 주시오.”

이렇게 해서 최형우는 민산에, 서석재는 나사본에 전념하게 됐다.

하지만 민산과 나사본은 YS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해체명령을 받았으나 최형우와 서석재의 사조직으로 변질돼, 운영됐다.

특히 YS 집권 후 대권을 향해 질주하던 최형우는 민산을 활용, 민자당 내 1인자로 부상하게 된다.

민산은 이후 ‘최형우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고, 나사본은 97년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서석재가 탈당하게 되면서 ‘이인제 대통령 만들기’로 급선회했다. <계속>
 
 
 
<민주산악회와 최형우>

“30년 전우들을 다 끌어 모아,  조직을 확대하자”

민주산악회(민산)는 5공 시절 김영삼이 정치규제에 묶여 있을 때 만든 민주화투쟁의 상징적인 조직이었다.

하지만 3당 통합 후 청와대와 민정계의 견제로 시군지부가 30여개 밖에 안 되는 초라한 조직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때 최형우가 3대 회장으로 취임한 것.

92년 김동영이 세상을 떠나자 상도동 제2인자가 된 최형우는 민산 3대회장을 맡았다. 이민우 김명윤에 뒤를 이었다. 회장에 취임한 최형우는 곧바로 조직보강에 착수했다.

최형우는 회장취임 직후 박종률 박태권 등과 만나 “조직을 무한대로 확대시키자. 국회의원이든 아니든 우리의 30년 동지를 모두 끌어 모으자”고 제안했다.

최형우의 야심찬 계획에 힘입어 민주산악회는 2개월여 만에 30개 지부가 300여개 지부로 늘어놨다.

▲민주사악회 회원들, YS의 모습과 김덕룡 최형우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제공=김영삼

이 같은 조직 확대는 최형우의 노력도 있었지만, YS가 최형우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산악회 부회장을 맡았고 문민정부에서 주택공사 사장을 역임했던 김동규 의원은 “민자당 대통령 후보였던 YS가 최형우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동지들을 규합하기 수월했다”고 회고했다.

민산의 중앙조직은 부회장단과 본부장 중심체제로 개편됐다.

부회장으로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이 임명됐다. 황명수 김덕룡 서석재 강인섭 황병태 김동규 박종률 이우태 등이 선임됐다.

본부장에는 충남지사를 역임한 박태권이 임명됐다. 백영기 박정태 오사순 등은 부본부장을 맡았다. 연수원장에는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노병구가 임명됐다.

사무실도 확대했다. 무교동에서 관철동으로 옮기고 YS가 직접 쓴 ‘친필’을 사무실 입구에 걸었다.

빠른 속도로 지방조직을 확대해 나가던 민산도 한계에 부딪친 곳은 바로 호남이었다. DJ의 거센 바람 때문에 조직을 확대할 수 없었다.

 

이 때 나선 인물이 전북출신인 김덕룡과 박종률이었다. 이들은 악전고투 끝에 호남지역 대부분의 시군에 지부를 결성했다.

민산은 선거직전 전국 3백8개의 시군구 단위 지부를 결성, 선거직전 약 2백만명의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YS는 민산의 조직을 앞세워 14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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