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명철 자유기고가)
요즘 자유한국당은 ‘박정희’와 ‘김영삼’ 논란에 빠져 있다. 당사에 걸린 두 전직 대통령의 사진을 놓고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이 터진 것이다.
필자는 이 논란을 지켜보면서 조선의 건국세력인 ‘혁명파 사대부’와 당시의 민주화 세력인 ‘사림’을 떠올리게 됐다.
조선의 건국 주체세력은 혁명파 신진사대부다. 정도전을 비롯한 혁명파 신진사대부는 이성계를 새나라 조선의 왕으로 추대해 고려를 무너뜨렸다. 반면 고려 왕조를 사수하던 정몽주, 길재와 같은 온건파 사대부는 암살을 당하거나 향촌에 은거하며 조선 개국을 비통한 심정으로 지켜만 봤다.
혁명파 사대부는 부국 강병을 국시로 삼아 대대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특히 태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통해 재상 중심의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정도전을 척살하며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태종과 세종의 치세를 거치며 조선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여진과 왜구를 정벌하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현재의 한반도 지도를 만든 이들이 혁명파 사대부다. 하지만 혁명파 사대부도 세조를 거치면서 훈구파로 변질됐다.
이들은 어린 단종을 강제 퇴위시키며 권력을 쟁취하자 무소불위의 전횡을 저지르며 부패의 온상이 됐다. 훈구파의 선택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훈구를 견제하기 위해 온건파 사대부의 후예인 사림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치세력이 생긴 것이다. 연산군과 중종 시기는 훈구와 사림의 치열한 권력투쟁의 시기였다. 네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은 끈질긴 정치적 생명을 이어갔다. 선조가 즉위하자 훈구는 몰락하고 사림의 천하가 됐다. 하지만 권력을 공유할 순 없는 법, 사림도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해 붕당정치를 펼치며 처절한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했고, 서인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하늘의 뜻인가?
사림의 거듭되는 분열과 부패로 조선은 519년의 역사를 마감했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35년 간의 치욕적인 식민통치를 마치고 대한민국으로 새로 태어났다. 하지만 남과 북으로 분단된 것도 억울한데 김일성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6·25는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을 세계 최빈국으로 몰락시켰다.
하지만 5·16이 터졌다. 박정희·김종필과 같은 군부 엘리트들이 무능한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 정부를 수립했다. 이들의 집권 방식은 ‘쿠데타’였지만, 내용은 ‘혁명’ 그 자체였다. 이들은 조선 개국 공신인 혁명파 사대부들처럼 부국강병을 모토로 삼아 ‘한강의 기적’을 창출했다. 대한민국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면서 근대화의 역사를 새로 썼다. 개도국의 롤모델이 된 대한민국은 못사는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이들도 부패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고 정경유착의 온상으로 변질됐다. 그동안 박정희 철권통치에 숨죽이며 민주화를 갈망하던 세력들이 김영삼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대한민국판 ‘사림’이 형성된 것이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했던가? 박정희 대통령은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은 짧은 서울의 봄을 만끽도 못하고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에 의해 다시 기나긴 동면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박정희와 전두환을 거치며 형성된 중산층이 신군부를 무너뜨리는 주역이 됐다는 점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주역은 다름아닌 ‘넥타이부대’였다. 신군부도 중산층의 민주화 요구를 외면할 순 없었다. 이들은 6·29라는 깜짝 쇼를 통해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문제는 민주화 세력들이다. ‘양김’으로 상징된 이들은 조선의 사림들처럼 권력투쟁에 목매달아 후보단일화에 실패해 노태우 대통령의 탄생을 지켜만 봤다. 80년에 이어 또 양 김의 과도한 정치욕이 민주화를 무기 연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과 달리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 여소야대의 불리한 정치지형을 극복하고자 김영삼·김종필을 끌어들여 3당 통합이라는 정치실험을 시도했다. 소위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력의 화학적 결합이 시도된 것이다.
철저한 승부사 김영삼은 군부와 산업화세력이 득실거리는 민자당에서 갖은 고생 끝에 평생의 꿈인 집권에 성공했다. 집권 초반부터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와 같은 개혁을 단행하며 군부의 정치개입을 전면 차단했다. 전두환·노태우는 감옥에 갔고 민주화를 차근차근 진행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도 부패의 사슬을 끊지 못했고, IMF체제라는 사상 초유의 국난을 초래하며 정권연장에 실패했고, 사림의 또 다른 후예인 김대중 정부의 출범을 지켜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개혁을 추구했지만 대한민국 정치 특유의 현상인 ‘정권말기의 저주’를 피할 순 없었다.
보수 정치권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탄생시키며 기세를 올렸지만 지난해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치욕을 당하며 정권을 내놓았다. 현재는 홍준표 대표 체제로 초라한 제1야당으로 정치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한 마디로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의 결합체다. 박정희를 외면하는 것은 산업화 세대를 부정하는 것이고, 김영삼을 외면하는 것은 민주화 세대를 부정하는 것이다. 조선의 민심은 훈구를 외면했지만 대한민국 보수권은 산업화 세대를 외면해선 안 된다. 현 보수 정치권의 한 뿌리인 박정희 대통령을 외면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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