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짝퉁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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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짝퉁에서 대가의 반열에 오르다
  •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18.02.2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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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의 지구촌 음악산책(26)> 피아졸라(PIAZZOLLA Foreve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 피아졸라(PIAZZOLLA Forever)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신은 신동을 일찍 죽인다. 그래서 천재들은 요절하는 경우가 많다. 신들이 시기해 천재들을 일찍 데리고 가는 것은,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게 누설할 수 있는 영민함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BC6 세기 공자(BC 551~479년)에게 가장 뛰어난 제자 안회도 젊은 나이에 요절해 공자는 "슬프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하며 대단히 비통해했다고 한다. 세간에서는 안회가 장수했다면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 됐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수학에서는 대체로 갈로아(Evariste Galois,  1811~1832년)를 요절한 천재라고 한다. 갈로아는 일찍이 미래 수학자들에 영향을 준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짧고 비극적인 생애를 보낸 프랑스 수학자다. 그 역시 21살에 이상한 결투에서 바보처럼 죽었는데 살아있을 때는 입시에서 몇 번 낙방도 하고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시인들도 그렇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의 푸쉬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년 6월 6일~1837년 2월 10일) 이나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 인물 랭보(Jean-Arthur Rimbaud, 1854~1891년)를 비롯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또 우리나라에도 김소월(음력 1902년 8월 6일~1934년 12월 24일), 이상(음력 1910년 8월 20일~1937년 4월 17일) 이나 윤동주(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 김유정 (1908년 1월 11일~1937년 3월 29일), 이효석(1907년 2월 23일~1942년 5월 25일) 역시 요절한 천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분야에 요절한 천재들은 수없이 많지만 대중음악에 있어서도 그런 인물들은 비교적 많다.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희귀병에 걸려 살아 생전에 빛도 못보고 죽은 에바 캐시디를 비롯해서 비행기 사고로 죽은 짐 크로스도 요절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상하게 가수들은 비행기 사고로 요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탱고 역사에 있어서도 그런 인물이 있다. 탱고를 싸구려 선술집 음악이나 길거리 음악의 수준에서 클래식에 버금가는 세계적 음악 수준으로 끌어올린 당대 최고의 작곡가 겸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1887년 12월 11일~1935년 6월 24일)이다.

그의 본명은 샤를 가르델로 프랑스 태생이다. 네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주해 와서 노래와 기타를 익힌 후 1910년 가수로 음악계에 첫발을 디뎠다. 1917년에 최초의 음반 '나의 슬픔의 밤'을 레코딩했고 연이어 그의 노래가 히트하면서 대가수가 됐다. 1923년부터 1933년까지는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화려한 활동을 계속하다가 1935년 콜롬비아의 메데진 공항에서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신이 그의 재능을 시기해서 일찍 데려간 것 같기도 하고, 인물이 너무 잘생겨서 질투 때문에 일찍 데려간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사진을 보면, 필자도 질투가 날 정도로 멋진 모습이다.

이 요절한 가르델의 음반은 정말 아쉽게도 1910년대 말과 1920년대, 그리고 1930년대 초에 녹음돼서 음질이 썩 좋지 않다. 대체로 과자처럼 잘 부서지 78RPM의 SP판에 녹음돼 재생을 해도 축음기 수준으로 재생된다. 이 SP판을 리마스터링 해서 발매된 CD 중에는 베스트 20곡만 모아서 내놓은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중역대에 소리가 몰려 있고 음질도 썩 좋지 않아서 시쳇말로 '옛날 고물 라디오 소리' 난다. 그러나 그 열악한 음질 속에서도 가르델의 노래는 역시 가슴에 파고드는 대가다운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고 남음이 있다. 그래서 음질 따지기 이전에 꼭 한번은 들어봐야 할 음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카를로스 가르델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여기 피아졸라의 음악을 소개하기에 앞서서 카를로스 가르델을 먼저 소개하는 것은 탱고의 역사에 있어서 그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며 또한 피아졸라의 음악에 있어서도 가르델의 영향이 아주 컸기 때문이다. 가르델은 초기 탱고 역사의 초석을 다졌을 뿐 아니라 피아졸라에게 아주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다.

본래 탱고는 매우 관능적이고 반복적이며 충격적이다. 인간 내면에 잠자고 있는 원초적 본능과 욕망을 흔들어 깨우는 것 같고 또한 반복되는 중단리듬과 다이나믹한 리듬은 임팩트를 남긴다. 탱고의 어원은 아프리카의 어떤 장소를 뜻하는 말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칸돔베(Candombe)를 추는 장소를 말한다. 현대적 의미의 '탱고'라는 말은 19C 중반 일반적으로 쓰이기 했다는 것이 지배적 견해이다. 그리고 탱고의 음악적 원류는 이탈리아 남부의 뱃노래와 스페인의 플라멩코, 쿠바의 아바네라, 아프리카 탱가노 리듬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당시 남미의 정치적, 민족적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

▲ 탱고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1880년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빈민지역 춤인 밀롱가는 새로운 세대의 전환에 앞서 오늘날과 같은 완전한 탱고의 면모를 갖추며 변화돼 갔다. 1870년대에 탱고를 완성시키는데 기여한 것은 인디오와 니그로 그리고 스페인의 혼혈인 가우초(Gaucho, 아르헨티나 초원의 목동이나 카우보이)의 후예 콤빠드리토(Compadrito)들이다. 이들은 1870년대 말 밀롱가를 바탕으로 해서 탄생한 새로운 춤과 음악을 탱고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역설적인 것은 흑인들이 춤을 추는 장소를 부르는데 썼던 탱고라는 용어를 콤빠드리토들은 밀롱가가 변화된 춤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탱고를 추는 장소를 '밀롱가'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주로 유럽에서 하층민으로 살다가 배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건너 온 유럽의 이민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항구에서 탱고를 들으며 향수를 달랬다. 탱고의 전통적인 악기 반도네온은 하층민이었던 이민자들의 고된 생활에 걸맞게 구슬프고 여운이 길게 남는 소리를 낸다. 거꾸로 탱고가 유럽으로 역류한 것은 1906년경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도 영국에 소개돼 비교적 사랑을 받았지만 프랑스에서 유난히 탱고는 큰 인기를 끌었고 몇 몇 음악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새로운 탱고의 면모를 갖춰 다시 아르헨티나에 소개됐다. 이 무렵의 탱고는 이제 수준 높은 탱고가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온 가르델은 탱고를 세계의 음악으로 만들고자 했고, 가르델의 영향으로 초기 탱고의 거장인 프란시스코 카나로(Francisco Canaro), 오스발도 프레세도(Osvaldo Presedo) 등이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과 또 다른 중남미 국가와 북미에까지 탱고를 전파시켰다. 바로 이런 면에서 가르델이 높이 평가되는 점이다.

지금 아르헨티나에서는 다양한 탱고가 연주되고 있고 거의 클래식 수준의 탱고도 쉽게 접할 수 있으며, 또 대중들에게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탱고 마에스트로'(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 까페 사운드 트랙) 등과 같은 음반은 이런 수준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게다가 요즘은 특히 탱고에 전자음악을 결합한 일렉트로닉 탱고까지 나타나서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영화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 까페 사운드 트랙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이제 피아졸라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1950년대 중반 탱고의 변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중음악의 변혁을 일으키고 자신의 음악을 누에보 탱고(Nuevo Tango), 뉴 탱고(New Tango)라 불렀다. 이것은 바로 남미에서 식당이나 사창가, 길거리에서나 연주되던 싸구려 춤곡 정도의 음악으로 인식되던 탱고를 가르델에 이어 다시 한 번 세계적인 음악의 장르 반열에 올려놓은 역사적인 업적이기도 하다.

192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처, 마르 델 플라타(Mar del Plata)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 뉴욕의 노동자 지역에서 살았다. 피아졸라의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이자 미용사였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피아졸라는 부모의 노력으로 어렸을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피아졸라의 나이 열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사다주었다. 이 악기는 아코디언과 비슷한 것으로, 후에 아르헨티나 클래식 탱고 밴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악기는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연주자가 있을 정도로 대중화가 됐다. 피아졸라는 반도네온을 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연주회에 나가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1933년에는 헝가리 피아니스트 빌다(Bela Wilda)에게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젊은 피아졸라를 만나게 된 당대 최고의 탱고 가수이자 영화 제작자 가르델은 스페인어를 구사하며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한 어린이를 자신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El dia que me quieras)에 신문팔이로 출연시켰고, 피아졸라는 이 영화에서 연주도 맡게 된다. 1935년 가르델이 사망하기 전에 만든 마지막 영화가 바로 이것이다.

1937년 피아졸라의 가족은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온다. 젊은 피아졸라는 유명한 밴드 리더이자 작곡가인 아니발 트로일로(Anibal Troilo)가 이끄는 작은 탱고 앙상블에 들어가 반도네온 솔로주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Alberto Ginastera)의 제자가 되기도 했고, 프랑스에서는 교육자로 잘 알려진 나디아 블랑제(Nadia Boulanger, 1887~1979)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피아졸라가 블랑제를 처음 만났을 때, 피아졸라는 그동안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작곡해놓은 악보들을 들고 가 블랑제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당시 블랑제는 그 악보들을 살핀 후 "이 부분은 스트라빈스키의 곡과 비슷하고, 또 저 부분은 라벨의 곡과 비슷하고, 또 어떤 부분은 바르토크의 곡과 비슷한데 과연 피아졸라의 음악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하고 반문했다. 그리고 피아졸라에게 자신 있게 연주할 수 있는 것을 연주해보라고 했다. 피아졸라는 그 때까지 만해도 하류 음악으로 치부되던 탱고를 블랑제 앞에서 연주하기 싫었으나 어쩔 수 없이 탱고를 연주했고, 블랑제는 바로 그것이 피아졸라의 음악의 진수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탱고 음악에 전념할 것을 권했다. 바로 이 만남이 없었다면 피아졸라는 어쩌면 그저 클래식 음악 대가들의 짝퉁 정도의 음악가로 남아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1955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간 그는 밴드를 결성하고 작곡과 연주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만들어낸 음악은 올드 가드 탱고의 요소에 재즈, 클래식 음악에서 받은 영향을 가미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음악으로 젊은 청중을 사로잡았으나, 전통적인 탱고 리듬을 포기했다는 이유로 일부 전통 탱고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탱고의 암살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55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서 밴드를 결성하고 작곡과 연주에 힘쓰던 중 전통적인 탱고음악에 식상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1958년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1960년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5중주단(Quinteto Nuevo Tango)을 결성했다. 이때부터 피아졸라는 자신의 탱고를 새로운 탱고, 즉 누에보 탱고로 부르며 기존의 탱고와는 다른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부마저도 그의 음악을 두고 너무나 진보적이라고 비난했으며, 비평가들은 피아졸라를 광대나 편집증환자 정도로 비난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피아졸라를 더욱 더 홍보해주는 격이 됐다. 이것이 요즘 말하는 이른바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목적을 두고 누에보 탱고를 노이즈 마케팅 한 것은 아니었다.

1974년 피아졸라는 아르헨티나를 떠나 유럽으로 건너가 10년간 파리·암스테르담·빈은 물론, 뉴욕·도쿄 등 세계 각국을 오가며 자신의 음악을 널리 알렸다. 이 시기는 유럽에서 탱고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때로 피아졸라의 새로운 탱고 역시 클래식 음악계의 관심을 모았다. 특히 1992년 크로노스 4중주단이 발표한 피아졸라의 작품집 '다섯 개의 탱고 센세이션'(Five Tango Sensation)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피아졸라를 '탱고의 황제'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후 피아졸라는 1990년 파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1992년 7월 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망했다.

피아졸라는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는 클래식 탱고를 비롯해 전통적인 클래식 악기(피아노, 현악기, 플룻, 기타)를 위한 작품도 작곡했는데, 엄격한 올드 가드의 리듬과 노래 형식을 버림으로써 그는 정체기에 있던 탱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정말로 옛 것을 다 버려서 새로운 것을 얻은 셈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수준 높은 작곡 활동과 레코딩, 연주로 전 세계 음악 애호가 모두에게 사랑받은 것이다. 반도네온 연주자로써 피아졸라는 미국의 재즈 비브라폰 연주자 게리 버튼이나 이탈리아 스타 가수 밀바 등과 같은 대중음악들과도 함께 연주와 녹음 활동을 했으며 성 누가 오케스트라나 크로노스 현악 사중주단과 같은 클래식 앙상블과도 레코딩 작업을 했다.

▲ 탱고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여기 수록된 음반은 피아졸라의 수많은 곡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만 추려서 베스트로 뽑은 것이다. 때문에 이 한 장만으로도 피아졸라의 진수를 모두 맛볼 수 있는 대단히 경제성 있는 음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어느 작곡가나 연주자의 곡을 이해하려면 수많은 음반을 들어보고 그 가운데 대표곡을 한 음반에서 한 두 개 씩 골라내게 되는데, 이 경우 음반 구매 비용이 엄청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여기 소개한 음악과 음반은 그 수고를 미리 해서 에센스만 뽑아놓은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우리 같은 이들을 위해서 음반의 부제 그대로 'Forever' 즐기도록 만든 음반이라고나 할까.

* 반도네온

19세기 유럽에 아코디언이 생겨나고 얼마 후에, Band라는 사람이 아코디언처럼 고정된 화음을 연주하는 대신, 오르간처럼 코드에서 각 음을 분리할 수 있고, 키보드 대신 스위치가 달린 악기를 만들어 냈다. 아코디언과 달리 키보드가 없고 상자모양 양쪽에 30~40개의 동그란 버튼이 달려있다. 이 버튼은 공기가 들어갈 때와 나갈 때 다른 음을 내므로 120~180가지 다른 음을 낼 수 있다. 이 악기는 콘체르티나 등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반도네온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독일에서 주로 생산되는데 Saxony 지역의 Alfred Arnold가 제작한 Doble A는 반도네온의 명기로 알려져 있다. 19세기의 말 독일의 이민자들과 함께 아르헨티나에 유입된 반도네온은 20세기 초 탱고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Simom Collier (1997) Tango!: The Dance, The Song, The Story Thames & Hudson p.102

▲ 반도네온 ⓒ김선호 음악칼럼니스트

* Milonga(밀롱가)

아르헨티나 초원에서 발생한 민속음악에서 발달한 2박자의 빠른 리듬의 춤, 그리고 음악. 춤추는 행위, 노래, 춤추는 장소, 탱고에 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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