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代散策] 이상수 “야권통합 추진하다 DJ 눈밖에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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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代散策] 이상수 “야권통합 추진하다 DJ 눈밖에 났다”
  • 글=이상수 정리=김병묵 기자
  • 승인 2018.03.31 22:1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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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 전 노동부장관
˝국본, 인권변호사들이 민주화운동 더 강경했다”
˝후배들 권유에 정계입문…율사대변인 시대 열어˝
˝노무현 대통령 만들었지만 비서실장 제의 거절˝
˝추징금 0원…억울해도 세상위한 희생이라 생각˝
˝숙의민주주의로 개헌안 내야 진정한 사회 변화˝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글=이상수 정리=김병묵 기자)

헌법은 나와 쭉 함께했다. 내가 정치권에 뛰어든 순간부터 말년의 소명으로 삼기까지, 그 화두는 개헌(改憲)이었다.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2018년에는 헌법개정국민주권회의에서 나는 계속해서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고 있다. 28일 사무실을 찾아온 기자와 차 한 잔을 나누며 법조인, 민주화 운동가, 정치인 이상수가 가져온 고민의 뿌리를 더듬어봤다.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일명 국본은 정치권부터 재야까지, 다양한 민주화 세력이 뭉친 최대 규모의 연합군이었다. 목표는 개헌이었다. 그동안 쭉 쌓여 온 민주세력이 총체적으로 결합해서 ‘정면승부를 걸자’고 결성됐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일명 국본은 정치권부터 재야까지, 다양한 민주화 세력이 뭉친 최대 규모의 연합군이었다. 목표는 개헌이었다. 지금 논의되는 개헌과는 당연히 달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를 강조하면서 독재를 시작하며 진정한 인권의 탄압이 시작됐고, 이에 맞선 민주적 절차회복을 위한 운동은 쭉 이어져 왔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격화되고, 부마민주항쟁으로, 6월 항쟁까지 연결된 거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국본이었다. 그동안 쭉 쌓여 온 민주세력이 총체적으로 결합해서 ‘정면승부를 걸자’고 결성됐다.

나는 법조계의 대표로, 변호사들 그룹이 단체로 들어갈 때 합류했다. 주축은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의 고발인이었던 아홉 사람의 변호사였다. 이영돈 변호사를 위시해서, 홍성우, 조준희, 황인철, 조영래, 김상철, 이상수, 박원순 등이 핵심이었다.

사실 인권변호사 그룹에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고,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데 변론만 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같이 참여해서 투쟁하자’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돈명, 한승헌, 고영구, 김상철, 김상철, 박용일 등은 참여파였다. 반면, ‘변호사의 본질은 뭐냐. 민주화운동하다 구속당한 이들을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이들이 홍성우, 황인철, 조영래, 박원순 등이다. 그래서 참여파가 들어가서 이돈명 변호사가 상임공동대표를, 김상철, 이상수, 박용일은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이 상임집행위원이 이사회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상당히 중요했다. 나중에 국회에서 만나게 되는 이재오 전 의원도 재야 대표 자격으로 들어와 있었다.

재미있는 건, 이 법조인들로 구성된 상임집행위원들이 오히려 훨씬 적극적이고 강경했었다는 거다. 재야 출신들은 구속 경험도 있고 해서 그런지 상당히 신중했다. 6·29 선언 직전에, 6월 26일에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할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설훈 의원이 와서 ‘정부에서 위술령 내지는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잘못 나갔다간 민주화 운동이 지연되는 꼴이 날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겁도 없이, ‘과감하게 나가고 국민적 열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우겼다. 그래서 6·29 직전의 집회를 주도했던 인사들은 국본의 변호사들이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소위 ‘총대를 잘 메는’사람이었다. 6·29 직후인 8월에 대우옥포조선소 사건이 터졌다. 이석규 씨가 최루탄에 직격당해서 죽는 사고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의 분개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씨를 비롯해서, 내가 대표로 조문과 진상조사를 겸해서 내려갔다. 노무현 변호사가 이미 와있더라. 돌이켜보면 전국의 노동운동가들이 다 모였었다. ‘전국 민주노동자장’으로 하기 위한 장례준비위를 결성, 유족으로부터 장례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그런데 정부의 반대가 있어서 타협을 하고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운구차 앞에 첫 번째 차에는 이석규 씨의 직업학교 동기들이 결사대로 탔다. 그 다음에 운구차가 탔고 이제 세 번째 차가 나를 비롯해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탄 차였다. 그런데 고성까지 갔는데 갑자기 1번 차가 보이지 않았다. 차가 고장 났다고 고치러 갔다 하고 사라졌다. 그러더니 운구차가 갑자기 고성삼거리에서 남원 쪽으로, 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거다. 운구차를 빼돌리는 거였다. 누군가 항의해야 하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내가 내려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악을 쓰니까 경찰이 나를 포위해서 고성서로 데리고 갔다. 일단 나만 구속되고 나머지는 몸을 피했다.

평화민주당

▲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정부에서 위술령 내지는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잘못 나갔다간 민주화 운동이 지연되는 꼴이 날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이야기를 전했지만, 6·29 직전의 집회를 주도했던 인사들은 국본의 변호사들이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언젠가는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렇게 빨리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1988년의 상황이 내 등을 떠밀었다. 직선제는 이뤘지만 군정종식엔 실패하고 너무 비통한, 처참한 마음이었다. 고생해서 6·29를 얻어냈는데, 김영삼(YS) 전 대통령과·김대중(DJ) 전 대통령 중에 한 사람이 1987년에 대통령이 돼서 민주화를 제대로 실현해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단일화가 안 돼서 졌다는 의견이 많았다. 후배들이 땅을 치며 통곡을 했다. 후배 한 사람이 “죽 쒀서 개 준 겁니다. 양김은 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선배님들이 나가서 정치를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해 치러지는 13대 총선은 소선거구제로 치러질 전망이었다. 재야를 중심으로, 민주화 세력 일부에선 ‘대선은 끝났지만 총선에서라도 양김이 단일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 하지만 DJ는 단일화 생각이 없었다. 소선거구제로 하면 영호남을 나눠가져가면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중선거구제가 유지됐다면, 야권 전체로는 패배였을 것이라고 본다.

한겨레당이 만들어지는 시기였다.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평화민주당에 들어갔다. 간혹 내 고향이 여수라서 DJ와 함께했냐고 묻는데, 이는 반 정도만 맞다고 보면 된다. 나는 YS보다 DJ가 이념적으로 더 맞아서 평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6·29 선언 이후 YS가 우리 변호사 그룹을 만나자고 해서 본 적이 있는데, 이미 정권을 잡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나는 DJ에게 더 끌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엔 출신 지역별로 모두가 양분되는 분위기였다. 나와 인권변호사 활동을 같이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때 YS 쪽으로 갔다.

나도 출마를 해야 하는데 고향인 여수에는 당시 김충조 선배가 여수본부를 맡고 있었다. 이미 2번 낙선해서 낭인생활을 하던 차였다. 내가 가면 당선확률이 높겠지만, 김 선배는 그럼 재기의 기회를 영영 잃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이 가는데 제가 붙을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전했다. 당시엔 패기도 있었고, 어려워도 서울에서 붙어보겠다고 했다.

그러자 DJ가 "이상수가 참 대단하다. 여수를 버리고 서울로 왔다“면서 추켜세워줬다. 그런데 동대문에서 나오려고 하니 DJ가 나를 불렀다. 동대문에는 자신이 신뢰하는 최훈 동지가 있으니, 중랑이 어떠냐고 했다. 그래서 양보하고 중랑갑에 갔더니 이번엔 김덕규 선배가 중랑을로 가면 어떠냐고 했다. 그래서 양보할까 했는데 이번엔 당에서 나를 도와주는 후배들이, ’동대문에서 이미 양보했으니 또 하면 안 된다‘고 난리가 났다. 결과적으론 나와 김덕규 선배는 각각 갑을에서 당선됐다.

당선된 뒤에 DJ가 나를 불렀다. 독대한 자리에서 “이 변호사, 대변인을 좀 맡아 줄랑가”라고 제의했다.

당시 당의 대변인은 언론인 출신, 재선 이상 의원이 관례적으로 맡는 중책이었다. 지금보다 당내 지위가 훨씬 높았다. 민정당엔 김중위, 통일민주당은 서청원, 평민당엔 이상수가 대변인이 됐다. 나 말고는 모두 언론인 출신 재선 의원들이었다. 당내에선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주위의 눈은 신경 쓰지 않았다. 5공 청산 시절, 느낀 대로 발표하고 논리적으로 성명을 냈다.

사실 더 경험이 많았으면 그 자리를 이용해서 정치적 입지를 더 다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때 정치적으로는 너무 어수룩했다. 주변에선 “이상수가 순수해서 잘 한거다. 이리저리 재고 좌고우면했으면 대변인을 그렇게 잘 못했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내가 인기를 끌고 잘한다는 평을 내자 YS도 법조인 대변인을 내세웠다. 그게 이인제다. 민정당도 박희태를 내면서 우리 셋이 함께 대변인을 한 적도 있었다. DJ가 나를 파격 기용하면서 법조인 대변인 시대가 열린 셈이다.

재선과 서울시장

▲ ˝내가 인기를 끌고 잘한다는 평을 내자 YS도 법조인 대변인을 내세웠다. 그게 이인제다. 민정당도 박희태를 내면서 우리 셋이 함께 대변인을 한 적도 있었다. DJ가 나를 파격 기용하면서 법조인 대변인 시대가 열린 셈이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대변인을 하다가 야권통합운동을 했다. 우리 정치판이 갈라져선 안 된다고 하면서 조윤형, 정대철, 이해찬 등과 야권통합을 주장하다가 DJ 눈밖에 났다. DJ는 야권통합을 원치 않았다. DJ는 한번 눈 밖에 난 사람을 밀어주지 않는다. 손주항 선배 같은 경우가 그랬다. 그는 말도 잘하고, 당에서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청문회 때 한순간에 무너졌다. DJ도 손주항도 처음에는 청문회의 중요성을 몰랐다. 그런데 청문회 스타가 등장하고, 평민당은 소위 ‘죽을 쑤고’있으니 보강해야겠다고 했다. 처음에 너무 흥분만 해서 잘 못했던 손주항이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해서 줬는데, 그 다음날 나가서 정주영 회장에게 ‘증인님’이라고 불러버렸다. 당당하게 호통치는 노무현과 대비됐다.

DJ가 나를 밀어주지 않은 것과 별개로, 나는 지역구에서 힘겨운 싸움을 했다. 상대는 유명 배우인 이순재 선배였다. 이순재가 ‘대발이 아빠’역으로 출연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전국적 인기를 얻고 있을 때였다. 나는 발로 뛰는데 유권자들의 안방에서 매일 나오니 당할 재간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게 법적으론 선거법상 문제가 되기 때문에, 내가 강하게 항의하면 방영이 안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 ‘크게 인기를 끄는 드라마를 내가 중단시키면 그것도 국민들에게 못할 짓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관뒀다. 지금 돌이켜보면 약간 아쉽다. 14대 총선은 그렇게 졌다.

15대 총선에선 이순재가 이번엔 <목욕탕집 남자들>로 똑같은 구도를 만들려고 하는 거다. 이번엔 나도 참지 않고 아예 6개월 전에 그런 문제를 지적했다. 그래서 이순재는 선거나 드라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자 이순재 선배가 고민을 좀 하더니 영화계로 돌아갔다. 나중에 들으니 처음에야 선거에서 져서 절치부심하면서 붙었지만, 막상 국회의원을 해보니까 자신과 잘 맞지도 않고 큰 미련도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나는 재선의원이 됐고, 당에서도 다시 입지가 탄탄해졌다.

국민의정부도 끝나가던 2002년, 당에선 재선인 나와 김민석이 서울시장에 나서게 됐다. 경선을 했는데 당시 서울 25개 선거구에서 내가 22곳을 이겼지만, 3곳에서 몰표가 나오면서 졌다. 이해찬의 관악, 우상호의 서대문, 그리고 노원구였다. 깨끗하게 승복하고 김민석을 밀어주면서 칭찬도 많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그때 이상수가 나갔으면 어땠겠나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애초에 구도가 어려웠다. 상대는 홍사덕과 이명박이었다. 내가 나갔다고 해도 힘든 선거였을 거다. 만약은 큰 의미가 없다.

노무현을 만들다

나는 국본에 있었을 때도 그랬지만, 사람들이 잘 나서려고 하지 않는 어려운 일을 덥석 맡는 경향이 있다. 이번엔 노무현 캠프에서 그랬다.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의 사람들이 다들 풀이 죽어있었다. 심지어 김민석은 정몽준에게 갔다. 그러다보니 사무총장도, 후원회장도 맡을 사람이 없었다. 둘 다 내가 맡았다. 사무총장은 돈을 쓰는 자리, 후원회장은 돈을 모으는 자리다. 나 혼자 모두 하게 생겼었다. 김원기, 장재식 다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내가 맡았는데 이번에도 본인들은 안하면서 ‘법조인 출신이 경제인들을 알겠나. 어떻게 돈을 모으겠어’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라.

지금은 작고한 이정일 전 국회의원이 있다. 내가 찾아가서 50억 원을 빌렸다. ‘우리가 못해도 2위는 하니까, 선거 보전비를 담보로 해달라. 반드시 갚아준다’고 부탁했다. 선거 보전비를 담보로 해서 내가 부탁을 밀어붙이니까 그렇게 해 줬다. 나중에 노 대통령이 이정일을 한번 불러서 식사라도 대접했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좀 아쉽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대선을 이겼다. 노무현 대통령을 인권변호사 시절부터 알아온 나다. 1987년에 조령새재인가에 인권변호사들이 전국에서 모여서 놀러가는데, 대구에선가부터 몇 명이 중간에 열차로 합류했다. 보자마자 ‘제가 노무현입니다’하면서 인사를 하던 기억이 난다. 구속도 같이 됐고, 그 때 문재인 변호사, 지금의 대통령이 우리 심부름을 많이 해 줬었다.

참여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맡게 됐다. 청문회에서 당시 야당의 첫 질문이 “당신 보은인사 아닙니까”라고 했다. 내가 그냥 허허 웃으면서 “보은인사인 면도 있죠”라고 답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보은인사였으면 총리를 시켜달라고 했을 것 아닙니까. 내가 노동전문가로 오랫동안 활동했기 때문에 된 겁니다”라고 답할걸 그랬다. 하하. 사실 나는 비서실장을 제의받았었다.

하지만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가야 하는 자린데, 내키지 않아서 ‘당에서 돕겠다’면서 말을 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정치적 센스 부족이다. 비서실장이 그렇게 막강한 자리인줄도 몰랐으니까. 그랬으면 내가 억울한 구속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대통령이 나와 김원기, 정대철을 부르더라. 노 대통령이 “SK 비자금 조사를 하다 보니 100억 원이 나왔는데, 검찰이 증거를 가지고 있다. 공개적으로 터트려서 조사할까 하는 게 문제인데 어떻게 할까”라고 물었다. 나는 당장에 “할려면 하시오. 우리가 뭐 비자금 받은 것도 없고 하니, 이참에 사회적으로 풍토도 좀 바꿀 겸 혼을 냅시다”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오산이었다. 세상엔 빛과 그늘이 있는 법인데, 막상 서로 털면 우리 쪽도 어느 정도 나올 수가 있었는데 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권은 우리에게 있지만, 국회도 한나라당이 다수고 검찰과 경찰도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도 조사하겠다면서 칼을 들이대는데, 이상수는 조사할 것이 없다고 나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찾다보니 영수증을 끊어주지 않은 게 나왔다. 선거 당시엔 이회창의 당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후원해준 사람들이 영수증을 끊어주지 말라고 한사코 거절했던 시절이다. 보기에 따라선 죄도 아니지만, 그래도 영수증을 끊어줘야 하는게 법이니까, 그래서 구속됐다. 실무자들한테 시켰는데 문제가 생겼다고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비겁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추징금이 0원이 나왔다. 당연했다 받은 돈이 없으니까. 그래서 2008년 구속사실로 인한 공천심사 탈락 때 ‘딱 한분 억울한 분이 보인다’고 했던 게 나다. 그래도 다른 추징금 받은 동지들 면을 생각해서 굳이 크게 항의하지 않았다.

내 희생이 있었지만 조금이나마 우리나라 선거풍토, 정치풍토가 개선됐다면 이미 의미가 있는 거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최근 뜨거운 ‘미투운동’도 사회가 변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사회가 고쳐지는 과정에서 희생이 따르는 일이고, 그래서 간혹 억울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안희정이나 정봉주도 그런 측면에서 본인들은 인정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확히 법에 따른 판결만 이뤄진다면, 그런 희생도 세상이 좋아지는 과정 중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

▲ ˝개인적으로 분권형 정부제를 선호하지만, 이러한 숙의과정을 통해 어떤 개헌안이 도출된다면 무조건 그것을 지지할 거다. 국민들의 결정이 나라의 방향을 잡아나갈 때가 됐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이제, 개헌

국본에서의 개헌투쟁과 달리, 이번 개헌의 목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의회통제권을 강화시키고 협치체제를 만드는 것이 결승점이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야가 지금 갈등을 빚는 모습을 보라. 정치권에선 진정한 의미의 타협안을 못 만든다.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시대정신은 그렇게 구현된다.

구체적으로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해서, 저번에 원전 문제를 논의한 것처럼 결정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숙의민주주의 과정이다. 청와대에서 나온 개헌안을 지지하는 게 지금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과 같은가. 전혀 아니다. 개헌에 대한 제대로 된 고민을 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분권형 정부제를 선호하지만, 이러한 숙의과정을 통해 어떤 개헌안이 도출된다면 무조건 그것을 지지할 거다. 국민들의 결정이 나라의 방향을 잡아나갈 때가 됐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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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진 2018-04-11 15:30:08
일기쉽게 객관적으로 팩트만을 전달할려고 하시는 기자님께 좋은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기사, 객관적기사, 팩트만을 전달하는 기사.. 부탁드립니다.
정치인 인터뷰가 정치탐사보도가 되었네요...
오랜만에 좋은 기사 봐서 오늘 하루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뚜벅이 2018-04-01 23:12:01
기자분이 문장을 짧게 짧게 잘 정리하셨습니다.인터뷰 대상자도 잘 선정하신 듯.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