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김병묵 기자)
침몰 직전이다.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보수는 방향도, 구심점도 모두 잃었다. 나침반과 새로운 선장이 필요하다. 많은 매체에서 보수가 살 길을 내놨다. 그런데 이는 방향에 대한 조언이다. 차세대 리더에 대한 언급은 모두가 말을 아낀다.
엄밀히 말해 아직 차세대 리더를 논하기엔 이른 것도 사실이다. 다만 보수진영에게 최악의 난이도였다는 지난 선거에서, 나름의 정답을 제출한 인물도 분명히 존재한다. 무소속으로 당선되면서 다시금 대권주자 반열에 이름을 올린 원희룡 제주도지사다. 원 지사의 승리에 착안해, <시사오늘>은 보수진영 차기 리더의 조건을 선거공학적으로 살펴봤다.
리더의 조건 1. 선거 승리가 정치인의 경쟁력을 말한다
선출직의 의미는 국민들에게 선택받았다는 점이다. 과거 정치권에서 관선(官選)보다 민선(民選)을 훨씬 명예직으로 여겼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방자치제가 처음 실시됐던 1995년,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은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경남지사 출마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김 회장은 지난 2016년 기자와 만나 “그 때는 아직 지자체장이 관선이란 이미지가 남아있어서 아무래도 민선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자리로 생각했었다. 정치하는 사람은 표로 선택받아야 힘이 있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선거야말로 정치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절대적인 척도라는 이야기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 역시 국회의원 당선을 기반으로 대권을 거머쥐었다. YS는 부산 서구에서의 7선, DJ는 고향이나 다름없는 전남 목포에서의 재선이 대권주자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됐다.
3김 시대가 끝나고, 정치인들은 여기서 한 단계 더 진화했다. 단순한 당선을 넘어, 정당지지도를 극복한 승리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 선구자 중 한 사람이자 이를 기반으로 대권까지 거머쥔 인물이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소명 중 하나로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웠다. 노 전 대통령은 1992년, 앞선 선거에서 5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됐던 부산 동구에서 32.25%에 그치면서 낙선했다. 민주자유당의 지지율이 압도적인 곳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도전한 대가였다. 뒤이어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1995년 부산시장선거에서도 37.58%로 2위에 그쳤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노 전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대권주자 반열에 오르게 된 계기는, 정치1번지라는 종로에서 당선된 뒤에 16대 총선에선 또다시 부산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17개의 부산 선거구를 한나라당이 완전히 휩쓴 이 선거에서 그는 35.69%라는 기록으로 낙선했지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그의 지역주의 극복 도전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여세를 몰아 노 전 대통령은 대권을 잡는다. 정당지지율에서 한참 뒤지는 험지 부산에서 의미 있는 도전을 함으로써 여권의 리더로 떠오른 것이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민주당이 정당지지율 1위를 달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민주당 후보들이 정당지지율과 같거나, 상회하는 득표율로 승리했다. 예외가 있다면 제주도다. 50%를 상회하는 민주당의 지지율을 뚫고 무소속 원희룡 지사는 승리했다. 사실 이는 YS나 DJ, 노무현도 도달해보지 못한 세계다. 정치 공학적으로, 차기 보수 리더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인물은 원 지사가 유일하다.
정호성 알앤비리서치 대표는 21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이번 선거에서 60%의 민주당 지지율 벽을 넘어 선택받은 원 지사가 보수진영의 리더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보수혁신을 꾸준히 외쳐왔다는 점, 외연확장성이 있다는 점,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에서 자유롭다는 점이 강점”이라고 전했다.
리더의 조건 2. 지역의 대권 열망을 읽어라
모든 정당이 기본적으로 수권정당을 지향하듯, 진영과 무관하게 정치 리더는 대권을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 출신 지역 유권자들의 열망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지역주의와 별개로, 유권자들에겐 자신들의 지역 출신 정치인이 대권을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 존재해서다. 최근의 사례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모였던 충청도민들의 기대와 실망에서 이와 같은 동향이 포착된 바 있다.
이러한 열망은 가시적인 득표로 나타난다.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인 DJ는, 15대 대선에서 광주 97.3%, 전남 94.6%, 전북 92.3%라는 경이로운 호남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원 지사의 승리에 대해선 이러한 측면에서도 분석이 가능하다. 제주도의 도의원 선거는 민주당이 사실상 싹쓸이했다. 45개의 의석 중 29석을 가져갔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이 17석, 민주당이 16석을 가져갔던 것과는 대비되는 민심이다. 교육감 역시 진보성향 이석문 교육감이 당선됐다. 이러한 선거결과는 제주도의 민심이 여당에 완벽하게 기울어진 상황임을 다시금 입증한다. 원 지사 당선에는 그의 대권도전에 대한 제주도민의 암묵적 지지가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때문에 제주도내 일각에선 원 지사가 선거과정에서 “도정에만 전념할 것”이라고 선을 그은 것에 대해 너무 섣부른 언사였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제주 정가의 한 관계자는 20일 <시사오늘>과의 통화에서 “지사에 뽑아줬지만, 같이 손발 맞춰야 하는 도의회는 거의 민주당 인사다. 이는 우리 도민들이 제주 도정에 대한 기대와 함께, 원희룡에게 한 번 더 중앙정치 기회를 줘야한다는 생각도 있는 것”이라며 “4년 전에 돌아올 때도 반기는 여론보다 서울서 더 큰 일을 했으면 하는 목소리도 많았었다”고 전했다.
리더의 조건 3. 혁신의 선봉에 서기에 적합한가
차세대 리더로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고 해도 정당의 뒷받침이 없으면 보수의 재건은 불가능하다. 해체론까지 나오는 자유한국당과, 기초단체장도 0명에 그치며 존재감을 잃은 바른미래당은 대대적인 혁신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구심점을 찾기가 어렵다. 비상시국을 이끌 정당의 혁신적 리더로 누가 적합한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원 지사가 지방선거에서 부상했다고 해도 무소속 신분이다. 보수 진영에 있음이 암묵적으로 확인됐을 뿐이다. 여권 정계의 한 핵심관계자도 20일 “원 지사는 재선했지만 당적이 없어 입지도, 운신의 폭도 상당히 좁은 상황”이라며 “당장 보수의 구심점으로 등판하긴 어렵다”고 주장했다. 정당 측면에서 당과 인물 간 가교 역할을 하면서 보수를 통합해 낼 인물이 따로 필요한 이유다.
물론 여기서도 정치공학상의 인물 선정 기준은 있다. 가장 먼저 고려할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경쟁력이다. 지난 20대 총선서 이미 불었던 수도권의 민주당 바람 속에서 생존하며 가치를 입증한 인물들이 지목된다.
다음으로는 이들 중에서도 개혁적인 성향이 드러나야 한다. 뜻밖에 보수진영을 통틀어도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이는 많지 않다. 중진들 중 상당수가 차기 리더로서는 부적합하다는 주장이 팽배해서다.
한국정치발전연구소 강상호 대표는 지난 20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현 시점에선 보수 진영 리더로 ‘누구는 안 된다’는 인물들은 많지만, ‘꼭 누구여야 한다’는 사람은 없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한국당 중앙위원회 및 수석부위원장단은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의 사퇴와, 심재철·나경원·정우택 의원 등 중진들의 전당대회 불출마 등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인물로 한국당 김용태 의원의 이름이 언급된다. 김 의원은 20대 총선 한국당의 서울 참패에서도 살아남아 3선을 달성했으며, 이미 한 차례 당의 혁신위원장으로 지목됐다가 친박계의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명박(MB) 정부에서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한 관계자는 2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용태 의원이나 김영우 의원 같은 젊고 개혁적인 인사가 대표나 비대위원장 직을 맡아야 살 길이 있다”면서 “물론 당내 역학구조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깨지 못하면 보수정당은 다 같이 죽는 수밖에 없다. 늘 똑같은 인물들이 궁리해 봐야 똑같은 결과만 나올 뿐”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한국당 김용태 의원은 22일 “(비대위원장을) 맡는 것에 대한 논의도 없었고 뜻도 없다. 지금은 자숙하고 당의 진로와 방향을 국민에게 맡겨야 한다”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현실가능한 보수 재건, 원희룡 대권 - 김용태 당권
다양한 변수, 가치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선거공학적인 측면에서만 봤을 때 보수재건에 결국 한 개의 시나리오가 도출됐다. 원희룡 제주지사의 대권도전, 그리고 김용태 의원의 당권도전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시나리오에 불과하고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선거 승리가 곧 정치인의 경쟁력을 입증하고, 보수는 그간의 극우 인사보다 혁신적인 인물을 원한다는 것은 예상보다는 팩트에 가깝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당의 한 관계자는 22일 <시사오늘>과의 만남에서 “내가 30여 년 보수정당에 몸 담았다. 보수당 안팎에서 나 정도 오래 정치를 봐온 사람들은 현실 가능한 대안적 인물이 원희룡 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면서 “하지만 현재 무소속이고, 정치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당장 원 지사를 리더로 내세울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젊고 혁신적인 비대위원장을 세우든가 해서 바른미래당을 포함한 범보수세력을 규합하는 것이 먼저다. 원 지사를 내세우는 것은 순서가 그 다음”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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