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형님(YS)하고 담판을 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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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형님(YS)하고 담판을 짓겠다”
  • 정세운 기자
  • 승인 2009.08.18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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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종, 최형우 만나 ‘대권행보중단’ 요구
최형우, ‘내 갈길 간다’며 거부의사 표시

 
⑩꿈꾸는 최형우, 저지하는 YS

YS가 마침내 ‘대통령’에 오르자 최형우는 최대의 권한을 누렸다.
 
최형우는 내무부 장관을 거쳐 ‘정동포럼’, ‘21세기 정보화 전략연구소’ 등 조직을 만들어 대권의 꿈을 키웠다.
 
이처럼 최형우는 ‘차기대권’을 노리고 세 확장 작업을 전개했다. 하지만 YS 생각은 달랐다. ‘최형우는 아니다’였다. YS가 최형우에게 차기대권을 주지 않으려 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왜’라는 의문부호만 따를 뿐이다.
 
92년 2월 한보사태로 정국이 어수선하던 어느 날.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은 최형우 의원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접니다, 한번 만나시죠.”

최형우는 청와대로부터 여러 차례 대선행보중단을 요구받고 있던 터라 불쾌하게 답했다.

“뭐, 할라꼬, 나 바쁜 사람이다.”

이 수석은 이에 대해 “그 바쁜 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라며 정곡을 찔렀다.

“알았다, 내 연락을 줄께”

그리고는 최형우는 급히 노승우를 찾았다.

“저쪽(YS)에서 만나자고 한다. 아마도 대선행보를 중단하라는 메시지를 들고 나 올 텐데….”

“고문님, 누가 나옵니까.”

“원종이가 보재.”

“…….”

노승우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있다고 이렇게 답했다.

“일단 만나십시오. 그리고 절대 중단 없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YS가 보자고 하면 절대 만나면 안됩니다.”

 

노승우는 YS를 알고 있었다. 누구든 YS를 만나면 설득에 넘어간다는 생각이었다.

“고문님, YS를 만나는 건 피해야 합니다. 지난 총선을 앞두고도 이회창, 박찬종 두 사람도 YS가 직접 만나 설득했습니다. 그 분들도 처음에는 YS와 같이 안한다고 공언했지만, 만나고 난 후 틀려졌습니다. 고문님이 대권을 잡으려면 일단 YS를 만나는 건 피하십시오.”

그리고 이틀 후 서울의 한 시내 호텔 커피숍에서 최형우와 이 수석이 만났다.

이 수석은 최형우를 만나자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형님, 자제해 주시죠. 이런 식(대권행보)으로 움직이는 것 각하께 도움 안 됩니다. 그러니 움직이는 것 좀 자제해 주시죠.”

“형님(YS)한테 전해라. 나는 그만 둘 수 없다고.”

최형우는 YS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대통령이 된 후 상도동 사단에 근무했던 인사들은 YS를 ‘총재’에서 ‘각하’로 바꿔 불렀지만, 최형우만큼은 그대로 ‘형님’이라고 불렀다.

이 수석은 말을 이었다.

“형님, 꼭 그만두라는 당부입니다. 각하인들 왜 형님을 염두에 두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본선에서 힘들 거라는 판단 때문에….”

이 수석은 최형우의 대권행보를 막기 위해 정곡을 찔렀다. 사실 최형우는 세를 확장하며 신한국당 내 대의원 3분의 2이상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는 했지만, 지지율은 한자리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만 둬라, 마. 나를 막을 수는 없어. 나는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이야. 형님한테 그렇게 전해.”
최형우는 신경질적으로 이 수석의 말을 받았다.

“두려울 게 없다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고(Go)라는 말이다. 스톱(Stop)이란 말은 내 사전에 없어, 나랑 정치를 몇 십 년 해보고도 몰라.”

“형님(최형우), 아예 이번만 하시고 정치를 그만두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정치를 계속할 분이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까. ‘두려울 게 없다’는 말은 제가 할 말입니다. 저는 YS함께 정치를 그만 둘 사람입니다. 형님이 두려울 게 없겠습니까, 제가 없겠습니까.”

이처럼 이날 두 사람은 심한 언쟁을 주고받았다. 두 시간여 동안의 심한 언쟁 끝에도 결론에 도달하지 않자 최형우는 이렇게 말했다.

“나 바쁘다. 일어나야겠다. 아무튼 중단은 없다.”

“못가십니다. 중단하겠다는 말을 듣기 전해는 못 일어나십니다.”

이 수석은 협박조로 말했다.

최형우는 이 수석이 결판을 지려하자, YS로부터 모종의 ‘메시지’를 가지고 자신을 만나고 있다고 판단했다.

“나 잠시, 화장실 좀 갔다 올께”라며 자리를 피한 최형우는 화를 누그러뜨린 후 이 수석과 다시 대화를 나눴다.

“너 솔직히 말해, 도대체 무슨 답변을 들으러 온 거야.”

이 수석은 좀 오버를 했다.

“각하께서 포기하겠다는 말을 받아오랍니다, 형님도 YS 성격아시잖아요.”

“좋다, 내가 들어가 형님(YS)하고 담판을 짓겠다.”

이 수석은 이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 주에 잡아놓겠습니다. 각하하고 약속입니다. 어기시면 안 됩니다.”
결국 얼떨 결에 최형우는 YS를 만나게 됐다. <계속>

 
[최형우의 ‘꿈 그리고 몰락’]
최형우, 온산계 형성하며 최대계파 이끌었지만,

YS 반대에 ‘킹’에서 ‘킹메이커’로 전략 바꿔
당권 잡은후 “이회창만큼은 대권 못잡게 하겠다” 결심
일부선 “당시 최형우는 김덕룡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
최형우 97년 ‘뇌일혈’로 쓰러지자 ‘온산계’도 사분오열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선두에 섰던 상도동 사단은 정권을 잡자 요직에 앉았다. 권력의 중심에는 이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형우는 최대의 권한을 누렸다. 최형우는 YS 집권 후 ‘정동포럼’, ‘21세기 정보화전략연구소’ 등을 만들어 조직을 확대해 나가며 대권의 꿈을 키워나갔다.

이인제 서청원 황명수 김정수 노승우 등 이른바 ‘온산계’를 형성하며 당 내 최다 계파를 이끌었다. 그는 한 때 신한국당 내 대의원 중 3분의 2이상 지지를 확보했다. 따라서 경선을 치를 경우 ‘신한국당 대선후보=최형우’라는 등식이 나돌았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좋지 못했다. 한 자리 숫자를 맴돌고 있었다.

 

청와대는 당시 대권을 향해 질주 중이던 최형우와 김덕룡에게 ‘대권행보 중단’을 요구했다.
청와대의 ‘경고’ 메시지에 김덕룡은 대권행보를 중단했지만, 최형우는 개의치 않고 대권을 향해 질주했다.

YS는 이원종 정무수석을 시켜 대권행보를 중단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최형우의 대권행보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마침내 최형우의 대권행보를 막기 위해 YS가 나섰다.

97년 2월 말 YS는 최형우를 청와대로 불러 ‘대권행보 중단’을 요구했다. YS가 직접 나서서 대권행보 중단을 요구하자 최형우는 어쩔 수 없이 ‘대권’을 포기하고, ‘당권’을 잡아 ‘킹메이커’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즉 당 대표를 맡겠다고 선회한 것. 대권을 꿈꿔왔던 최형우로서는 엄청난 양보였다.

그는 ‘킹메이커’로 선회하면서 ‘이회창’만큼은 대권을 못 잡게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최형우가 누구를 ‘킹’으로 생각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진 게 없다. 다만 그가 DR(김덕룡)을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은 할 수 있다.

그는 97년 3월 여의도 ‘아부끼’라는 일식집에서 대권후보 논의를 하기 위해 서석재 김덕룡 의원 등과 만난 후 ‘뇌일혈’로 쓰러져 정치전면에서 사라졌다.  최형우가 쓰러지자 ‘온산계’는 사분오열되며 흩어졌다.

서청원 등 일부는 이수성 지지로 돌아섰고, 다른 일부는 이인제 지지로 급선회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97년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했다.

이인제는 국민지지도를 앞세워 탈당을 감행, 대권에 나왔으나 3위에 그쳤다.

다 지난 일이지만, 정치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최형우가 뇌일혈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이회창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을까? 더 나아가 DJ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재미있는 과정이지만, YS는 지지도 등을 들어 최형우의 대권행보를 중단시켰지만 결국 정권을 유지하지는 못했다. ‘아이러니’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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