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로동선] ‘고깃집 사장 노무현’ 추억 살아있는 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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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로동선] ‘고깃집 사장 노무현’ 추억 살아있는 그 곳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8.07.26 2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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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총선서 낙선한 노무현·유인태·이철·박계동 등, 역삼역 부근 음식점 열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은 제15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경영한 경험이 있다. ⓒ뉴시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김원웅·이철 전 의원….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제15대 총선에서 낙선(落選)의 쓴맛을 본 정치인들이라는 점, 그리고 한때 ‘음식점 사장’으로 손님을 맞고 고기를 잘랐던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사정은 이랬다. 1992년 대선 패배 후 은퇴를 선언했던 DJ(故 김대중 전 대통령)는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정계로 복귀한다. 이러자 민주당 의원 95명 중 65명도 탈당을 결행, DJ 품으로 돌아갔다. 이때 DJ 정계복귀를 비판하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반대하는 인사(人士)들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하고 1996년 제15대 총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서울에서는 노무현·이철·박계동·유인태가, 부산에서는 김정길이, 대전에서는 김원웅이, 정읍에서는 김원기가 나서 ‘지역주의 타파’와 ‘보스정치 탈피’를 외쳤지만, 되돌아온 것은 쓰라린 패배뿐이었다.

총선 후 한동안 방황하던 이들은, 유인태가 우스갯소리로 꺼낸 “음식점이나 차리자”는 말에 착안해 고깃집을 열었다. 이 고깃집이 바로 서울 역삼동에 위치했던 ‘하로동선(夏爐冬扇)’이다. 하로동선이란 ‘여름 화로, 겨울 부채’라는 뜻으로,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처럼 낙선 의원들이 다시 쓰일 날을 기다린다는 의미다. 

▲ 김원웅·김홍신·노무현·박계동·박석무·원혜영·유인태·이철·제정구·홍기훈·장두환 등은 하로동선 운영 당시 경험을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라는 수필집에 남기기도 했다. ⓒ정음문화사

한보사건 등으로 정치인들의 부패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요즘, 스스로 노력해 돈을 벌겠다는 개혁 성향 정치인들의 색다른 시도가 관심을 끌고 있다. 제15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한 이철·김원웅·유인태·노무현·박석무·홍기훈·원혜영·박계동 전 의원 등 20여 명이 7일 서울 강남구 역삼 전철역 부근에 한우고기 식당을 개업한다.
이들은 ‘공동출자·운영·분배’의 원칙 아래 모두 4억 원을 출자, 2층 단독 건물(건평 150평)을 빌렸으며, 질 좋은 한우고기를 제공하는 것을 제1의 경영방침으로 삼고 ‘맛으로 승부한다’는 계획.
이미 실무책임을 맡은 김원웅 전 의원이 전국의 이름난 식당을 찾아다니며 경영기법을 배웠으며, 안정적인 ‘진짜 한우고기’ 공급처도 확보해 놓았다고. 이들은 ‘여름화로나 겨울부채처럼 당장은 필요 없으나 때가 되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운영한다’는 뜻에서 상호를 ‘하로동선’으로 결정했다.
1997년 3월 7일 <경향신문> ‘금배지 탈락 前 의원들 식당주인 됐다’

하로동선은 성공적으로 운영됐다. 제5공화국 청문회를 통해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으며, 이후로도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받았던 이철·유인태 전 의원, 풀무원 식품 창업자 원혜영 의원, ‘인간시장’ 작가 김홍신 전 의원 등이 뭉쳐 만든 음식점은 금세 입소문을 타고 ‘핫 플레이스’가 됐다.

화제성도 높았던 모양이다. 당시 하로동선 운영에 참여했던 김원웅·김홍신·노무현·박계동·박석무·원혜영·유인태·이철·제정구·홍기훈·장두환 등은 이때의 경험을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돼요?’라는 수필집에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하로동선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제14대 대선을 앞두고 정계 개편이 일어나며 통추 인사들도 저마다의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 당시 제정구·이수인·김홍신·이철·박계동·김원웅 등은 신한국당과 민주당 통합으로 만들어진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노무현·박석무·유인태·원혜영·홍기훈 등은 새정치국민회의를 선택했다. 그와 함께 하로동선 역시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인사들이 제 갈 길을 찾아 각 당으로 뿔뿔이 흩어지자 이들이 지난 3월 서울 강남에 차린 음식점 ‘하로동선’의 앞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름 난로, 겨울 부채’라는 뜻인 하로동선은 제정구·이수인·김홍신 의원을 비롯해 제15대 총선에서 낙선한 김원웅·이철·유인태·박석무·홍기훈·원혜영·박계동 전 의원 등이 공동출자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통합하자 제정구·김홍신·이수인 의원과 이철·박계동·김원웅 전 의원 등 6명은 한나라당 행을 선택했다. 반면 노무현·박석무·유인태·원혜영·홍기훈 전 의원 등 5명은 국민회의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이쯤 되자 관심 있게 하로동선을 지켜보던 사람들로부터 “음식점도 문을 닫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김원웅 전 의원은 24일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깨끗한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우리 뜻을 격려하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왜 하필이면 그 당으로 갔느냐’고 질타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며 주위의 시선을 부담스러워 했다.
노무현 전 의원은 “각 당으로 흩어졌으니 아는 사람들을 데려오면 오히려 손님이 늘지 않겠느냐”며 “통추의 틀은 깨지 않고 우리가 가졌던 개혁성향을 함께 실현할 날이 있을 것”이라며 애써 따가운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한 정보과 형사는 “매출이 각 당으로 흩어지기 전보다 반 정도로 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사실상 당번제로 식당을 운영하기도 어려워 머지않아 문을 닫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고 말했다.
1997년 11월 25일 <한겨레> ‘뿔뿔이 흩어진 통추 사람들…하로동선 운명 어떻게 되나’

▲ 20여 년 전 하로동선이 있었던 이 자리(역삼역 1번 출구 부근)에는 지금도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시사오늘

예상대로 하로동선은 어렵사리 명맥만 유지하다가, 1999년에 문을 닫았다. 그마저도 노무현·유인태 등이 실제로 가게를 관리한 기간은 1년 남짓이었고, 1997년 이후에는 사실상 명의만 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이 자리에는 ‘백두산’, ‘신(新) 하로동선’ 등이 간판을 바꿔 등장했으나, 예전만큼의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다.

한편, 20여 년 전 하로동선이 있었던 이 자리(역삼역 1번 출구 부근)에는 지금도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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