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노-진보신당, ‘통합시기-유시민 참여’ 놓고 이견 차
유시민, 통합 배제 서운함 피력…노회찬 “스스로 결정”
진보는 언제나 정치권의 뜨거운 화두다. 물론 보수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 이념이란 그 자체로 분열을 가져오는 논쟁거리다. 때문에 ‘친한 친구와는 정치나 종교 논쟁을 하지 말라’는 말이 절대명제처럼 돼 버렸다.
해방 이후 기득권 세력이 분단체제를 이용하며 진보를 배격한 채 하나의 지배사상에 국민을 복종시킨 결과다. 적어도 DJ정부 출범 이전까지만 해도 ‘좌파, 진보=주체사상, 빨갱이’였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제도권에 진입한 이후 진보에 대한 ‘빨간’ 이미지는 다소 희석됐지만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는 존재한다.
‘평등 평화 생태 연대’라는 새로운 가치의 추구와 올바른 자유주의 확립 등 갈 길 바쁜 진보진영은 현재 총체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MB정부 출범 이후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발, 시민들의 촛불항쟁이 100일간 지속됐지만, 진보정당은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투쟁의 장기화로 인해 촛불시민에게는 무력감을 느끼게 했고 애당초 촛불에 빨간 이미지를 덮어씌운 보수진영에게는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된, 현실정치를 모르는 운동권 정당이라는 비난의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진보진영은 “MB에 실망한 국민들의 변화와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안위만 채운 채 또다시 국민의 관심 밖으로 배제됐다. 정책의 콘텐츠를 실현시킬 수 있는 힘도, 대중적 지지를 받을 감동도 부족했다.
반면 MB정부와 한나라당은 야권과 시민들의 ‘MB! OUT’이라는 구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역설적으로 이 같은 MB의 파워는 야권의 ‘좌클릭화’, 그리고 ‘선거연대·연합’의 당위성을 긍정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참여정부 시절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을 따랐던 민주당이 진보를 당헌당규에 규정한 데 이어 급기야 정동영 최고위원은 ‘담대한 진보’를 표방하며 진보정당의 핵심 공약인 ‘부유세’를, 손학규 대표는 ‘새로운 진보’를, 이인영 최고위원은 ‘문익환 정신’을, 국민참여당 소속 유시민 참여정책연구원장은 ‘진보자유주의’를 주장, 그간 자유주의 정당으로 평가받았던 두 당이 모두 좌클릭을 선언했다.
또 범야권은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야권단일화는 유권자의 지상명령’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어느 정도 성과를 얻자, 2012년 총·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연대 연합 통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야권이 연대의 당위성만 긍정한 채 연대방식 등 각론에 대해 이현령비현령식 해석을 내놓자 정치권 밖 지식인들이 보이지 않은 연대 전선을 펼치며 범야권을 압박하고 나섰다.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진보집권플랜>을 통해 “진보 양당은 80년대 서클운동의 편향성을 깨야 한다”며 오는 29일 ‘비정당적 시민정치운동체’인 한국판 무브온 운동의 출범을 선언했다. 또 영화배우 문성근 씨와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은 각각 ‘백만 민란’과 ‘빅 텐트론’을 설파하며 야권단일정당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야권 내부의 속사정은 제각각이다. 민주당은 여전히 제1야당의 기득권 포기하라는 소수정당의 주장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국민참여당은 민주당을 제외한 비(非)민주 연대를, 민노-진보신당은 진보대통합엔 공감하고 있지만 민노당은 참여당을 통합 대상으로, 진보신당은 연대 대상으로 못 박았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인 셈이다.
단, 독자행동은 ‘필패’라는 점만은 범야권 모두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때문에 ‘뭉쳐야 산다’는 당위성을 깨트리는 쪽은 ‘한나라당 정권재창출’의 주범으로 몰릴 수 있다는, 일종의 야권연대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민노, 통합 ‘적극적’…“6월 말 결정”
“민주노동당은 침몰하기 시작한 타이타닉 호와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 당 대회에서 노동자, 서민은 없었다. 노동자 서민의 상식에 입각해 당을 운영하라는 소박한 요구는 동지에 대한 의리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묵살됐다. 조직논리에 갇혀 병폐를 묵인해온 과거와 결별하겠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는 2008년 2월 3일 국회에서 민노당 탈당을 선언하며 이같이 말했다. 민노당은 2006년 ‘일심회 사건’ 이후 NL(민족자주파)와 PD(민중민주파)간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한때 20%에 달했던 정당 지지율은 5%대로 추락했고 2007년 대선 때는 불과 3% 지지율에 그쳤다. 이때부터 당내 금기사항이었던 종북주의, 정파적 헤게모니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결별했던 민노-진보신당 간 합당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합당의 표면적 이유는 진보대통합을 통한 진보의 재구성이다. 하지만 지난 10년 간 어느 덧 패배가 익숙해져버린 결과, 분열시 공멸이라는 현실적 속내가 엿보인다. 종북주의에 대한 양당 간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진보대통합이 절체절명의 과제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적극적인 쪽은 민노당이다.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반MB연대로 기대이상의 성과를 얻는 학습효과와 진보대통합을 선제적으로 대응해 야권연대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민주노동당 산하 진보정치대통합 추진위원회를 맡고 있는 정성희 최고위원은 17일 <시사오늘>과의 전화통화에서 “진보신당과의 통합은 올해 6월 중 결정될 것”이라며 “진보대통합 1단계 안은 4월, 2단계 안은 5월, 3단계 안은 오는 6월 17일 당 대회에서 의결할 예정이다. 진보신당 역시 6월 말 진보대통합 안을 통과시킬 것으로 안다”고 못 박았다.
실제 민노당 등은 지난 1월 말경 그간 주장했던 민노-진보신당-민주노총 3자가 중심이 된 진보대통합에서 한 발 물러나 진보신당이 주장했던 사회당과 복지국가와 시민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 진보교연 등 8자가 참여한 <진보정치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안을 받아들였다.
정 최고위원은 이와 관련, “민노, 진보, 사회당과 시민사회단체 등 8자가 아래로부터의 진보대통합을 위한 실무협의를 하고 있다”며 “민노당 전체 당원 역시 ‘프러포즈 운동’을 통해 진보대통합 결의를 공동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분당과정의 상처가 남아있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정 최고위원은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진보대통합을 할 것이다. 새 진보정당은 친북, 종북이 아닌 민중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밝혔고 추후 야권연대에 대해서는 “국민참여당은 성찰과 좌클릭을 전제로 통합 대상, 민주당은 통합이 아닌 연대 대상”이라고 잘라 말했다.
진보신당, 통합 ‘긍정’…시기는 ‘글쎄’
진보신당의 상황은 복잡하다. 일단 문제는 당내 독자파의 반발이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심상정 당시 경기지사 후보가 당원들의 의사를 묻지 않은 채 유시민 국민참여당 후보의 지지를 단독으로 결정, 당내 상향식 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독자파의 반발심은 극에 달했다.
독자노선을 지지하는 진보신당 영등포 당원협의회 소속 한 당원은 “반MB연대가 남긴 게 과연 무엇이냐”고 다른 당원은 민노당 얘기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내며 “민노당 종북주의가 해결됐느냐”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호진 진보신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독자파와 당원들의 반발 때문에 통합과정이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모든 당원을 100%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소통과 토론을 통해 극복하는 방향으로 갈 것”며 다만 “지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 그리고 새로운 비전이 전제돼야 함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정 부위원장은 이어 새로운 진보정당과 관련, “과거 분당은 분명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민노-진보신당이 더 큰 공조 속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없다”며 진보대통합을 긍정했다.
정 부위원장은 ‘통합=도로 민노당’이란 비관적 전망에 대해 “도로 민노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노당과의 합당은 새로운 진보정당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이지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당위성에는 여전히 긍정한다”며 “그래서 종북주의, NL-PD의 정파적 갈등 등 아픈 상처에 대한 불신을 불식시킬 수 있는 근거 있는 실천이 중요하다. 진보신당부터 반성과 성찰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신당 내부 여론도 통합 쪽으로 급속히 쏠리고 있다. 지난해 지방선거 당시만 해도 당 내부 여론은 노회찬 전 대표가 주장한 ‘가치 중심의 연대’가 우세했다. 하지만 독자노선을 고수하며 치른 지방선거에서 노 전 대표가 3% 안팎의 지지율에 그치며 참패를 당하자 여론이 반전됐다.
실제 진보신당이 지난 1월 9일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C&C>에 의뢰해 진보신당 당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오차한계 95% 신뢰수준에 ±4.4%p)를 보면, 독자노선을 지지한다고 답한 당원은 불과 10.4%에 그쳤다. 진보+민노+사회당이 26.6%로 1위를 기록했고 진보+민노+사회당+참여당이 24.2%, 진보+민노+사회+참여+민주당이 16.8%를 기록했다. 예상을 뒤엎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박용진 진보신당 부대표는 여론조사 직후 “진보정치세력은 역사적 책임에 대해 오만했다”며 “진보신당 내 현실정치파가 등장했다”고 평하는 등 여론은 통합 쪽으로 급속히 쏠렸다.
하지만 이 같은 당원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민노당과의 협상과정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이미 진보 양당은 통합에 대한 구체적인 안이 나오기도 전에 파열음부터 냈다.
연석회의를 구성에 합의한 이정희 민노당 대표는 지난 14일 이와는 별도의 진보 양당 간 ‘진보대통합 실무협상단’ 구성을 공식 제안했다. 이에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즉각 “오는 3월 27일 당 대회 안건으로 당내 추진기구 구성안이 이미 들어가 있는데, 민노당이 잘 모르고 제안했다”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진보대통합 시기와 관련해서도 노 전 대표가 “올 여름을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노당 입장에 동조했지만, 진보신당 내부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6월 내 통합은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또 있다. 바로 조승수 대표가 2008년 민노당 분당 사태 당시 ‘선도 탈탕파’였다는 점이다. 조 대표는 이정희 대표가 참여당과의 통합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도 “국민참여당은 통합대상이 아니다”라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향후 진보대통합이 성사된다하더라도 참여당을 놓고 NL-PD 간 갈등이 불가피한 셈이다.
이봉규 시사평론가는 민노-진보신당의 통합에 대해 “합당을 하지 않으면 당 존립이 어렵기 때문에 선거를 위한 합당에 불과하다”면서 시너지 효과와 관련, “합당을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만 아주 미비하다. 지금 노출된 인물들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끝났기 때문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한 시너지 효과는 없을 것”이라고 평가절하 했다.
유시민, 진보 양당에 적극적 대시할까?
유시민 원장이 소속된 국민참여당의 향후 행보도 관심사다. 유 원장은 오는 19일 수원 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전국당원대회’에서 사실상 당 대표에 오른다. 본격적인 ‘유시민號’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2000년대 초 개혁당에 이어 두 번째로 당 수장을 맡지만, 그 당시엔 실험정당적 성격이 강했다. 유 원장 스스로 정치 입문부터 열린우리당 시절까지 “책임 의식이 부족했다”고 고백했듯이, 개혁당은 정당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기존의 질서를 배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유 원장 앞에는 4·27 재보선 때 원내진입→야권연대 성사→정권교체→선거구제 개편→지역구도 해소라는 과제가 놓였다. 또 야권 성향의 유권자들은 유 원장이 팬덤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인에서 벗어나 ‘한나라당 영남’-‘민주당 호남’ 구도 판을 뒤흔드는, 정치개혁을 주문하고 있다.
유 원장은 우량주다. 핵심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 블루칩이다. 그래서 범야권은 ‘유시민’을 불편해한다. 동시에 긴장한다. 2007년 민노당 경제정책 공약을 만드는 데 참여한 한 경제학 박사는 “유시민 원장이 개혁당 시절 보여준 독자행동 때문에 국민참여당 창당 시절 민주당 친노세력들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취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만큼 민주당 내 ‘유시민 비토층’은 상당하다.
여기에 김두관 경남지사는 “참여정부의 지분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광재 전 강원지사 안희정 충남지사에게 있다”고 ‘노무현 후견인’이었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시사인>과의 인터뷰에서 “유시민 원장은 친노가 아니다”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나 유 원장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진보대통합에 참여하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실제 유 원장은 지난 1월 25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진보대통합에 오라는 얘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보진영의 새 판짜기에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천명한 셈이다.
하지만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지난 13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참여당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통합에 대한 결단을 밝히는 게 우선”이라고 반박했다.
그렇다면 유 원장은 향후 진보대통합에 참여하겠다는 적극적인 시그널을 보낼까.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낮다. 유 원장은 지난해 1월 연합정치 관련 토론회에서 “야권연대는 유권자의 지상명령이지만 연합 연대를 구걸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라고 최근에는 “참여당은 민노-진보신당에 우클릭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라며 진보자유주의 노선을 변경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자유주의자’ 답게 각 정당의 선택에 맡기는 셈이다.
양순필 국민참여당 대변인도 <시사오늘>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야권이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해 연대 연합하는 과정 속에서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면서 “19일 전국당원대회를 앞둔 시점에서 진보대통합 참여 여부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서른 살의 자화상>을 통해 “사회와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고 그 선택에 기초를 둔 가운데 인간과 역사에 대한 신뢰를 배웠다”던 유 원장이 2012년 총·대선을 앞두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