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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8.10.0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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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청와대로 권력 몰리는 문재인 정부…권력 집중의 폐해 기억해야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적폐 청산’을 모토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그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더욱더 청와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기묘한 방식을 택했다. ⓒ뉴시스

2017년 4월 23일. 그러니까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약 보름 앞두고 열린 토론회에서,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책임총리제·책임장관제를 통해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틀을 깨고, 권력을 내각에 분산시키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2017년 5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업무를 시작하고 이틀째인 이날, 문 대통령은 청와대 직제 개편을 단행하면서 장관급인 정책실을 부활시켰다. 그리고 장하성 고려대 교수를 정책실장 자리에 앉혔다. 청와대 직제상, 정책실장 밑에는 경제수석과 일자리수석, 사회수석, 경제보좌관, 과학기술보좌관이 있다. 내각에 권한을 주겠다는 취임 전 공언과 달리, 청와대가 모든 것을 틀어쥐는 형태의 만기친람(萬機親覽)형 조직을 꾸린 것이다.

청와대의 힘이 강해지면, 필연적으로 내각의 위상은 약화된다. 지난해 7월,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여러 차례 “법인세와 소득세의 명목세율 인상은 현 단계에서 고려하고 있지 않다”면서 증세에 미온적 입장을 드러냈다. 하지만 추미애 당시 대표가 증세안을 제안하고 문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면서, 법인세와 소득세 최고세율은 조정됐다. 결국 김 부총리는 “시장에 일관된 메시지를 주지 못한 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지난 6월에는 김 부총리가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과 시장·사업주의 수용성을 충분히 고려해 목표 연도를 신축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며 ‘속도조절론’을 꺼내들자,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이목희 부위원장이 나서 “최저임금 인상 속도조절론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은 그 말을 할 때가 아니다”라며 “책임 있는 정책당국자가 할 말이 아니다”라고 작심 비판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이 사건 이후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앞으로 장하성 정책실장이 주도해 관련 부처 장관들과 함께 경제 전반에 대해 회의를 계속 개최해 나가기로 했다”는 브리핑까지 내놨다. 논란이 커지면서 청와대는 ‘장 실장 주도’라는 표현을 수정했지만, 김 부총리와 장 실장의 갈등 국면에서 문 대통령이 장 실장의 손을 들어줬다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 2일에도 이런 모습이 반복됐다. 김 부총리는 국회에서 열린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 참석해 “최저임금의 지역별 차등화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4일에는 홍영표 원내대표가 YTN과의 인터뷰에서 “(최저임금) 지역별 차등화는 정부와 좀 더 논의하겠지만, 개인적 판단으로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법인세·소득세 인상 때와 유사한 분위기다.

그나마 김 부총리는 사정이 나은 편에 속한다. 여러 ‘갈등설’에 휩싸이면서 이름은 널리 알렸으니 말이다. 반면 다른 장관들은 아예 이름조차 들어보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8월 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기요금 인하를 지시했다. 하지만 전기요금 인하는 전기위원회 심의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인가가 필요한 일이다. 청와대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패싱’한 셈이다.

북핵 위기 때는 외교부 장관이나 통일부 장관보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이름이 더 자주 언론에 오르내렸다. 남북정상회담의 주역 역시 통일부 장관이 아닌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지난 3월에는 청와대發 개헌안을 조국 민정수석이 발표, ‘법무부 장관 불신임론’까지 나왔다. 의심의 여지없이, 문재인 정부는 취임 후 일관되게 ‘청와대 정부’의 모습을 띠고 있다.

청와대 정부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문 대통령이 공약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내각 구성원들은 청문회를 거쳐 임명된다. 국민의 대리인인 국회의원들이 ‘검증’하는 절차가 존재한다. 반면 청와대의 실장이나 수석 자리는 대통령이 임의로 임명할 수 있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 과정이 없다. ‘정당성 없는 권력’이 국정운영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은 책임정치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

청와대로의 권력 집중은 이전 정부들의 폐해를 답습하게 만들 우려도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9일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는 어떤 정부보다도 대통령 중심의 국정운영이 특징”이라며 “그것은 대통령 권력과 청와대의 비대화를 불러오고, 대의제민주주의의 중심 제도들인 내각·국회·정당의 역할을 주변화시킨다”고 꼬집었다.

또 “권력은 제도적으로 작동하고 하향 분산되고 하위 단계의 관료·공직자들에게 책임이 분산되며 그들로 하여금 책임지도록 할 때 효과적이지, 정점으로 집중되면 비능률이 커진다고 생각한다”면서 “나아가 대통령으로 권력 집중은 법의 지배를 벗어나 전제정(專制政)화, 권위주의화할 수 있는 위험을 안는다”고 지적했다. 모두 이전 정부에서 나타났던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들이다.

우리는 박근혜 정부, 아니 이명박·노무현·김대중·김영삼 정부에 이르기까지, 청와대에 집중된 권력이 어떤 ‘적폐’를 낳는지를 목도해 왔다. 그러나 ‘적폐 청산’을 모토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그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더욱더 청와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기묘한 방식을 택했다. 과연 문재인 정부는 ‘청와대 정부’가 주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역사의 교훈을 거스를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정치’가 걱정스러운 이유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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