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병원 논란] 녹지국제병원 허가, 불가피했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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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병원 논란] 녹지국제병원 허가, 불가피했던 선택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8.12.21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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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소송과 국제신인도 하락…불허 시 기회비용 너무 커
선거 위해 공론화위원회 이용했다는 비판…정치적 책임 있어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12월 5일 녹지국제병원 개설을 조건부로 허가했다. ⓒ뉴시스

#가상 시나리오

제주도 녹지국제병원 개설에 관한 공론조사위원회의 도민참여단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에 따르면, ‘개설을 허가하면 안 된다’고 답한 응답자는 58.9%로 ‘개설을 허가해야 된다’를 선택한 응답자 38.9%보다 20.0%포인트 더 높았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공론조사위원회의 의견을 수용해 녹지국제병원 개원 불허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원 지사는 녹지국제병원에 비영리병원으로의 전환을 권고했다. 그러나 녹지그룹은 ‘비영리병원 전환 불가’라는 기존 입장을 견지하면서, 제주도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노무현 정부 때 제정된 제주특별법에 의거해 추진되고, 2015년 12월 보건복지부로부터 병원설립 허가까지 받은 녹지국제병원 개설 불허는 녹지그룹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이었다.

녹지그룹은 기반시설 투자비 778억 원에 지난 15개월 동안 매달 8억5000만 원씩 지출된 인건비·관리비 등을 포함, 1000억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녹지국제병원 자체가 제주도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의 적극적 투자 권유에 따라 유치된 시설인 만큼, 소송은 녹지그룹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뿐만 아니라 녹지그룹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투자자국가분쟁(ISD) 소송까지 제기했다. 투자자국가분쟁 소송은 해외투자자가 상대국의 법령·정책 등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경우 국제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도록 하는 제도다. 국내외 소송에 휘말린 제주도는 천문학적인 금전적 손해는 물론, 행정신뢰도에도 치명상을 입었다. 삼다도는 ‘이제 누가 제주도를 믿고 투자하려고 하겠느냐’는 푸념으로 가득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초 병원 설립 목적으로 토지를 내줬던 주민들은 병원 개설이 불허되자 제주도를 상대로 토지반환소송을 냈다. 토지주들은 제주도가 수용(收用)한 토지를 목적과 달리 사용한다는 이유로 토지반환을 요구했고, 헬스케어타운 사업 전망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주도, 어떻게 해야 했나

위 이야기는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녹지국제병원 개설을 불허했을 때 생길 수 있었던 가상 시나리오다. 그러나 절대 허무맹랑한 소설은 아니다. 녹지그룹 측은 공론조사 실시 전부터 결과 수용 거부 의사를 밝히고, 개설 불허 결정에 대비해 소송을 준비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제주도와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의 투자 권유에 따라 기반시설을 짓고, 개설 허가만을 기다리며 직원 134명의 인건비와 관리비를 지출해왔던 녹지그룹 입장에서는 소송이 불가피했다.

지난 10월 제주인재개발원에서 열린 ‘녹지국제병원 공론화를 위한 도민참여형 조사 숙의토론회’에 참석한 김기영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의료산업처장은 “녹지그룹은 병원을 운영할 계획이 없었다. 제주도와 JDC 등의 기관에서 병원을 운영해달라고 해서 추진된 것”이라며 “처음부터 문제가 된다고 하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녹지병원 건물이 다 지어졌고, 직원도 채용되고, 병원 운영비로만 매달 8억5000만 원을 지출하고 있지만 병원은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사업자 측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병원 개설이 불허된다면 당연히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나”라고 역설했다. 또 “녹지그룹이 최근 국내 대형로펌과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토지반환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도 높았다. 녹지국제병원이 위치한 제주 서귀포시 동홍동·토평동 주민들은 12월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10년 전 제주 발전을 위해 외자유치 핵심 사업이라는 제주헬스케어타운 조성사업에 조상들의 묘가 있는 토지까지 기꺼이 제공했다”며 “사업이 기존 계획과 다르게 진행되거나 지지부진하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타당하지 않느냐”고 했다.

아울러 “더 이상 마을 주변을 흉물로 만드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녹지국제병원 개원 지연 등 조속한 시일 내에 사업이 정상화되지 않는다면 토지 반환 소송은 물론, 이보다 더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주헬스케어타운 조성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토지반환 소송이 빗발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앞서 11월 19일에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윤춘광 제주도의회 의원이 제366회 제주도의회 정례회 도정질문에서 “녹지 측에 1000억 원 정도를 물어주는 것은 도민들의 반대 여론에 따라 감내해야겠지만, 애초에 병원 설립 목적으로 토지를 내준 주민들이 토지반환 청구 소송에 들어가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우려하기도 했다. ‘거부는 쉽지만 해결은 어려운’ 상황이었던 셈이다. 

▲ 시민단체들은 녹지국제병원 개설을 비판하며 원희룡 제주도지사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뉴시스

원희룡의 노력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점은 원 지사의 행보만 관찰해 봐도 알 수 있다. 원 지사는 앞서 소개한 윤춘광 제주도의회 의원의 문제 제기에도 “지적한 내용이 다 맞는 내용이고, 공론화토론 과정에서도 이 문제가 제시됐다. 그런데도 공론조사 결과 6 대 4의 비율로 불허하라는 권고안이 나왔다”며 “도민 여론조사를 볼 때 권고안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허가 2주 전까지만 해도 공론조사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대권을 꿈꾸는 원 지사가 져야 할 정치적 부담을 고려하면, 공론조사위원회의 뜻에 따르는 편이 보다 자연스럽기도 했다.

문제는 대안이 마땅치 않았다는 데 있었다. 원 지사는 공론조사위원회의 불허 권고가 나온 뒤, 녹지국제병원을 비영리병원으로 전환하는 방안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병원을 인수하는 방안 등을 놓고 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12월 3일 제주 서귀포시 동홍동·토평동 주민들과의 간담회에서도 원 지사는 “이미 고용된 직원과 건물 등을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대안을 찾고 있다”며 “비영리병원으로 운영하는 방안이나 국가·지방자치단체·JDC 등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인수하는 방안 등도 열어놓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 지사는 12월 5일 녹지국제병원 개설을 조건부로 허가하면서 “공론조사위 결정은 녹지국제병원을 비영리 의료기관으로 활용해 헬스케어타운의 기능을 유지하고, 이미 고용된 인력의 실직 사태가 나지 않도록 방안을 강구하라는 권고안이었다”고 했다.

이어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녹지국제병원 측에 비영리병원으로 전환할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거부됐고, 중앙정부나 국가기관의 인수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추진할 주체도 없고 감당할 수 있는 재정적·운영적 능력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또 “최악의 경우 제주도가 인수할 때를 대비해 시설을 점검한 결과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피부, 성형, 건강검진에 특화된 시설과 장비, 인력이 구비된 상태여서 제주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까지의 과정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공론조사위 불허 권고→녹지국제병원에 비영리병원 전환 권고했으나 거부→중앙정부·국가기관에 인수 가능성 타진했으나 무산→각종 소송 우려해 조건부 허가.’

영리병원 확대 우려…안전망 ‘촘촘’

물론 경제적 피해 우려가 면죄부일 수는 없다. 수천억 원을 들여서라도 막아야 할 일이 있다면 막는 것이 정치인의 미덕(美德)인 까닭이다. 녹지국제병원 개설 불허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이와 같다.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로 영리병원이 확산되면 공공의료체계 붕괴와 의료민영화가 이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1000억 원이 들든 2000억 원이 들든 원 지사가 불허 결정을 내려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는 이 역시 기우(杞憂)라고 일축한다. 현행 의료법체계 전체를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영리병원 확산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우리나라 의료법 제33조 제2항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는 주체는 △의사·치과의사·한의사·조산사 △국가·지방자치단체 △의료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 △민법이나 특별법에 따라 설립된 비영리법인 △준정부기관·지방의료원·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등으로 제한돼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외부 투자는 애초에 병원 설립 자체가 금지된다.

그럼에도 제주도에 녹지국제병원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노무현 정부 때 통과된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하 제주특별법)’ 덕분이다. 하지만 제주특별법하에서도 영리병원 설립은 쉽지 않다. 이 법에 따르면, ‘외국인투자 촉진법’ 제2조 제1항 제1호에서 규정하는 외국인이 설립한 법인은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야만 제주도에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다.

그리고 동법 제307조 제3항은 도지사가 외국의료기관 개설을 허가할 시, 보건복지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정해뒀다. 제주특별법과 유사하게 외국의료기관 설립 가능성을 열어놓은 ‘경제자유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아예 외국의료기관 개설 허가권자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못 박아뒀다. 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영리병원 설립을 막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는 충분히 마련돼 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12월 6일 국회에 출석해 “현 정부에서 영리병원이 더 추진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배경이다. 원 지사 역시 “국내병원은 영리화가 불가능하도록 의료법이 정해두고 있는데, 이것을 국회에서 고치지 않는 한 국내병원이 영리화로 갈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하기도 했다. 

▲ 녹지국제병원은 2017년 7월 병원으로 사용할 건물을 준공했고, 2017년 8월에는 운영인력 134명을 채용했다. ⓒ뉴시스

정치적 책임 논란

다만 원 지사가 정치적 비판을 자초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행정상의 불가피성이나 사법상의 적법성과는 무관하게, 본인 스스로가 정치적으로 비판 받을 여지를 제공했다는 이야기다.

12월 20일 <시사오늘>과 만난 자유한국당의 한 관계자는 “애초에 이렇게까지 커질 문제가 아니었는데 원 지사의 대처가 조금 아쉽다”고 했다. 그는 “녹지국제병원은 제주도가 적극적으로 투자 요청을 하면서 추진됐고, 보건복지부의 승인도 나왔던 만큼 현실적으로 제주도지사가 불허하기는 불가능했던 사안”이라며 “그런데도 이 문제를 공론화에 부침으로써 논란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를 공론화위원회에 던져 놓고 공론화위원회에서 나온 결과를 따르겠다고 약속한 것은 그 자체로 원 지사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면서 “지방선거를 앞두고 결정을 미루기 위해서 공론화위원회를 끌어들인 것 아닌가. 그러면 지금 나오는 비판은 원 지사가 정치적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녹지국제병원은 2017년 7월 병원으로 사용할 건물을 준공했고, 제주도로부터 사용승인을 받았다. 2017년 8월에는 운영인력 134명을 채용했다. 원 지사가 녹지국제병원 개설 허가 근거로 내세웠던 소송 가능성이나 인력 고용 문제 등은 이미 공론화위원회 논의 이전부터 결정된 사항이었던 셈이다.

제주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도 12월 6일 성명을 내고 “원 지사가 숙의민주주의 첫 사례로 녹지국제병원에 대한 공론조사를 수용한 것도 지방선거를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벌인 거짓 공약이었음이 만천하게 드러났다”고 성토하고 나섰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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