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山되짚기(2)] 이성춘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이사장“민산, ‘민주주의’ 산실…YS가 구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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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山되짚기(2)] 이성춘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이사장“민산, ‘민주주의’ 산실…YS가 구심체”
  • 최신형 기자
  • 승인 2011.05.19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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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계로 정치 입문…1982년 민주산악회 가입민산 헌신으로 민주화 가능…“YS는 의회주의자”“DJ, 겉과 속 달라”…YS 역사적 재평가 필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최신형 기자]

5·18 민중항쟁이 올해로 31주년을 맞았다. 고종 31년 때인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일제강점기의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으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민중민주운동은 그렇게 유신체제에 저항한 5·18 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
 

▲ 이성춘 민주화추진협의회 부이사장.

뿐만 아니라 5·18은 1987년 6월 항쟁의 단초로 작용, 아래로는 깨어있는 시민과 재야 세력이, 위로는 개혁적인 제도권 세력이 ‘더 나은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섰다. 이 같은 연대의 정신은 우리 모두가 승화시켜 나가야 할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민주화의 유산, 과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직도 민주화의 가치는 우리에게 유효한 것인가. 그래서 민주화의 정신을 복원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유신정권 시절 민주화의 기수로 우뚝 섰던 ‘YS와 민주산악회(민산)’를 통해서 말이다.

2011년 현재 민산의 재구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박경옥 민주동지회 운영이사에 이어 두 번째로 이성춘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 부이사장을 찾았다. 그가 풀어낼 YS와 민산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 궁금증을 간직한 채 이 부이사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11일 시사오늘에서 시작됐다.

 

-민산 가입은 언제 하셨습니까.

“1982년 3∼4월경 민산에 가입했습니다. 그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내린 정치활동규제법으로 인해 YS를 비롯해 야당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이 묶여있었습니다. 81년 6월 9일 YS를 주축으로 김동영 김덕룡 최형우 김수환 홍인길 김기수 등이 참여해 민산을 결성했고, 나는 이듬해부터 활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 활동 당시에는 모일 장소도 마땅치 않아 김동영 전 의원 자택에 모였어요. 민산 결성한지 1∼2년이 지났을까요. 야당의 각 지구당 위원장을 비롯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왔어요. 금세 회원수가 200여명으로 급증했죠. 민산 회원들에게 연락하는 것조차 쉽지 않더군요(웃음). 그래서 태백산조, 계룡산조 등 산 이름을 딴 조직을 만든 다음, 조장을 뽑고 회원들에게 연락하는 조직체계를 만들었습니다. 자연스레 YS와 함께 산행을 하면서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게 된 거죠.”

-민산 가입 전에도 정치와 연을 맺고 있었습니까.

“신한민주당(신민당)에서 본격적인 정당 활동을 하기 전, 1969년 진산(珍山)계에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충남 공주 출신의 박찬 의원이 있었는데, 같이 활동을 많이 했었죠. 이후 서울에서 정치 활동을 하려고 했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정치규제법에 발이 묶여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 민산을 통해 YS와 본격적으로 한배를 타게 됐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산행을 했으나, 사실상은 정치 활동을 한 셈이죠. 산행은 아무래도 제약이 덜 하니까….”

-진산계 시절, 정치인 YS를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정치는 진산계에서 먼저 시작했지만, 그 때에도 YS를 매우 존경했습니다. YS는 유신독재정권 시절 국민들의 꿈과 희망이었죠.”

“YS의 헌신, 민주화로 꽃 피워”

-YS와의 첫 만남에 대한 기억과 당시 정치상황을 회고하신다면.

“민산회원들과 산행을 하게 되면, 어른(YS)께서 민주주의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 때 ‘아! 이런 분이 나라를 맡아야 우리 국민이 행복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분이 23일간 단식투쟁을 했을 때도 뜻을 같이 했고, 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당했을 때도 ‘이성춘’은 YS가 가는 길을 따랐습니다.”

-YS의 정치철학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의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죠. 유신정권-전두환 신군부 시절 YS만큼 의회주의나 민주주의 등을 잘 실천한 정치인은 없었다고 봅니다. 숱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YS는 민주주의라는 한 길을 걸었습니다. 나라를 위한 그 분의 헌신으로 지금의 민주화가 꽃피게 된 거죠.”

YS는 1983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기해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YS의 ‘23일간 단식’은 전두환 신군부 폭압에 항거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또 YS는 1979년 10월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 이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신정권은 이에 격분해 YS를 제명, 부마항쟁을 촉발시켰다. 그렇게 YS는 민주화 운동의 격동기마다 역사의 한 가운데 서있었다.

-YS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신정권,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암흑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희망은 무엇이었습니까. 민주주의에 대한 YS의  신념과 헌신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거죠. YS의 단식투쟁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분의 순간순간 선택은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켰습니다. YS가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승부수를 던지지 않았다면, 군부정권이 종식됐을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이후 행보는 또 어땠습니까. 금융실명제 등 부패개혁은 물론, 군부의 통치를 봉쇄할 수 있는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습니까.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DJ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겠습니까.”

-일각에서는 YS의 3당 합당을 두고 야합이라는 비판을 하는데요.

“야합이라는 주장은 YS를 깎아내리기 위한 비판에 불과합니다. 3당 합당을 통한 군부독재의 종결은 그 당시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3당 합당이 너무 저평가됐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대한민국 정치에 있어 ‘민산’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민산은 민주주의의 산실입니다. 군부독재 시절 민산이 아니면 (야당 정치인들이)정치를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민산의 결성은 우리 정치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민산 활동 당시 군부독재 정권의 협박 등이 심했을 것 같은데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대단했지요. 산행이 시작되면 정보요원들이 따라왔습니다. 즉각 미행이 시작되는 거죠. 산행뿐 아니라 민산 해체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신민당 등을 결성했을 때도 정보요원들이 집에 상주하다시피 했습니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도청을 하고 회유와 협박 등이 일삼았죠.”

민추협은 YS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만든 새로운 정치결사체로, 1984년 5월 18일 DJ의 동교동계가 함께 참여했다.

YS와 DJ의 공동대표 체제로 출범한 민추협은 양김 씨가 가택연금을 당한 이후 동교동계 김상현 전 의원이 대표직무대행을 맡으면서 세를 확장, 마침내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이민우 이기택 등 구 신민당 중진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 결과 당시 총선에서 총67석을 획득, 제 1당으로 급부상했고 이후 민추협은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호헌철폐와 정권퇴진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군부정권의 탄압과 비례해 민산의 조직은 더욱 결속력이 강화됐을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민산은 비록 정당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정당 조직보다 더 컸습니다. 또 영향력만큼은 (정당과)비교가 안 됐죠. 당시 이민우 전 총재가 민산 회장을, YS가 상임고문을 맡았습니다. 그 밑으로 부회장에 최형우, 조직위원장에 김명륜, 조직위원에 노병구 심의석 최기선 이성춘 등이 있었어요. 나는 후에 민산 부회장까지 맡았습니다.”

 

▲ 민주산악회에서 식사를 하는 YS, 왼쪽이 고(故)김동영 전 의원, 가운데가 이성춘 민추협 부이사장.


“YS 민산 해체 결정…‘옳았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 YS는 ‘민산 해체’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동지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았습니까. 옳은 결정이었다고 보십니까.

“민산 해체는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국민들은 민산을 5공 시절 박철언 씨가 만든 월계수 조직쯤으로 생각했습니다. 완전한 오해죠. 그런 환경 속에서 만일 민산이 계속 유지됐다면, 아마도 숱한 인신공격성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겁니다. YS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좋지 못하고요. YS의 선견지명이 민산 해체로 이어졌다고 봐요.”

-민산 해체 이후에도 YS와 계속 함께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민주자유당(민자당) 때는 중앙당 대외협력국장을, 신한국당 때는 충남 사무처장과 서울 사무처장을 했습니다. 민자당 시절에는 당시 강상재 사무총장, 신한국당 시절엔 서청원 서울시지부장과 손발을 맞췄죠. 1997년 대선 전후로는 다시 충남 사무처장을 역임했고요. 계속 YS와 함께 했다고 할 수 있죠. 다만 1997년 대선이 기억에 남는데요. 당시 여당 후보였던 이회창 씨는 당원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병역비리도 그렇지만 대선 막판 ‘YS 화형식’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회창 씨는 신의가 없는 분입니다. 그 때 배신감을 느끼고 당직을 내려놓았어요. 도저히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해서죠.”

YS와 이회창 자유선진당 전 대표의 악연은 1997년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4월 총선 직전 YS에 의해 신한국당 선대위 의장으로 영입된 이 전 대표는 여당 대선 후보가 된 직후 아들의 병역비리가 터지면서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쳤다.

그러자 여당은 DJ의 비자금 의혹을 승부수로 꺼내들었다. 그러나 YS는 ‘공정경선’ 관리를 이유로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DJ의 비자금 수사를 대선 이후로 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당내 이회창계 인사들이 경북 포항에서 YS 마스코트 화형식을 자행했다. 이후 YS는 탈당을 감행했고 이 전 대표는 그해 대선에서 DJ에게 패했다.

-민산 이후 민주동지회가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사실 그 중간에 도산동지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YS가 대통령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민주동지회는 사무실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때 집권세력이었는데, 참 안타깝더라고요. 2000년대 초 도산동지회를 만든 이유도 민산의 가치를 계승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도산동지회 때 정기간행물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어요. 그러던 중 옛 민산 동지들이 다시 민산을 복원하자고 제안해왔어요. 다시 뜻을 모으고 민주동지회를 결성하게 된 거죠.”

대통령 취임 5일 만에 민산 해체 명령을 내린 YS의 결정은 사실상 대통령 사조직 철폐를 위한 첫 걸음이었다. 때문에 이후 지역별 친목모임 형태로만 그 명맥을 유지하던 민산 조직은 1999년 7월 21일 YS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산 재건을 시도했다. 하지만 정치권 안팎에서는 “3김 정치의 부활”이라고 비난, 사실상 민산의 재건은 불발됐다.

-도산동지회 결성 당시 상도동의 정치세력화가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순수하게 YS를 위해서 만든 조직이었습니다.”

“YS, 2012년 대선 때 反朴 지지 없을 것”

-민산은 1987년 6월 항쟁의 최대 정치적 결사체이지만, 20여년이 흐른 지금의 6월 항쟁은 사실 DJ쪽이나 진보진영의 역할만 부각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동교동계도 대한민국 민주화에 있어 많은 역할을 했지만 YS나 상도동계가 더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죠. 그 부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평생 YS와 함께 했는데, 정치적 라이벌인 DJ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DJ도 많은 역경 속에서 정치를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DJ는 겉과 속이 다른 측면이 있었습니다. 말의 진실성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죠. 일종의 언행불일치 같은….”

-YS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더불어 상도동 계보를 잇는 제도권 정치인들이 매우 적습니다. 민주계 인사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해 YS의 정신을 계승해야하지 않을까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시기가 오면 YS나 민주계 인사들이 지금보다는 정치적 스킨십을 넓히며 활동하지 않을까 싶어요. YS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YS는 사심이 전혀 없는 분입니다. 아니,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상도동 집에 물이 줄줄 샌 적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YS는 전혀 욕심이 없는 분입니다.”

-그나마 소수로 남아 있던 민주계는 지난 2008년 총선을 계기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요. 2007년 대선 때 YS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습니까. 결과는 어땠나요. 민주계가 몰살당하지 않았습니까. YS가 중립을 지킨 채 후보로 확정된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에게 힘을 실어줬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YS가 국민들과 한나라당 당원들의 지지를 더욱더 받았을 겁니다.”

-2007년 대선 당시 YS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한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겁니까.

“그때 내가 민주동지회 사무총장을 맡았는데, 대선 경선 과정에서 전·현직 의원들이 어른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김무성 전 원내대표가 18대 총선에서 당 공천에서 배제된 다음, 무소속으로 출마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YS가 어떻게 했습니까. 부산에 가서 김무성 지지의사를 밝혔잖아요. YS도 당시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2012년 대선 때도 YS가 대선 경선 과정에서 누군가를 지지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18대 총선 때도 민주계가 모두 죽지 않았습니까. YS가 이번만큼은 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않을까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어른을 잘 모셔야 합니다.”

-평생 YS와 함께 정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며 친박진영에 속해 있습니다. YS의 정치철학을 박 전 대표가 계승한다고 생각하십니까.

“YS의 의회주의,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등의 정치철학을 박근혜 전 대표가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전 대표만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현역)정치인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박 전 대표는 신뢰의 정치인 아닙니까.”

-민주동지회 인사들은 친박계보다는 친이계를 지지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인 지지라기보다 어른(YS)께서 지지를 하셨기 때문에 따라간 거죠. 자기 소신은 아닐 겁니다. 내가 신한국당 서울처장을 했을 때 종로지구당 위원장에 현 이명박 대통령, 은평지구당 위원장에 이재오 특임장관 등을 모시고 일을 해봤지만 박 전 대표만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치인은 없었습니다.”

-YS와 박근혜 전 대표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교역할을 할 생각은 없습니까.

“과거에는 두 분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가교역할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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