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과 박정희> "YS, 군사문화 적폐 털고 민주 질서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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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박정희> "YS, 군사문화 적폐 털고 민주 질서 확립"
  • 노병구 자유기고가
  • 승인 2011.06.0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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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문민정부의 업적-<上>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노병구 자유기고가)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로부터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군사통치 32년 동안 쌓이고 쌓인 군사문화의 적폐를 털어 내고, 새로운 민주질서 확립이라는 당면 과제 앞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했다.

열두채의 안가(安家) 철거

국민은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만 국정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가장 가까운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청와대 밖의 안가에서 살해됐다고 발표해 비로소 안가라고 하는 곳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청와대 안의 모든 곳을 순시하는 과정에서 안가를 돌아보면서 이곳이야말로 타락한 독재 권력의 비밀 아지트임을 알아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고 즉시 철거하라고 지시하고 그 자리에 서울 시민 누구나 쉴 수 있는 공원을 만들었다.

드디어 박정희가 만들고 전두환, 노태우를 거치면서 군사통치 32년 동안 독재정치와 부도덕 그리고 온갖 부정부패와 타락의 산실인 열두 채의 안가를 철거해 투명한 민주정치를 하기 위한 바탕을 만들었다. 박정희는 이상하게도 “나라의 안보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입만 열면 안보, 안보하다가 자기 자신의 안보도 책임지지 못하고 그가 만들고 즐기던 안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나님은 무심치 않았다.

대통령 집무실의 금고 철거

박정희가 시작해 전두환, 노태우까지 32년 동안 돈 많은 재벌 기업인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불법으로 막대한 돈을 강탈하듯 거둬들이거나 기타 부당한 방법으로 나라 돈을 갈취해, 이를 ‘대통령의 통치자금’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야말로 독재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조직폭력배들이나 하는 방식으로 통치를 했다.

모든 국민에 앞장서서 법을 지키는 모범을 보여야 할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법에도 없고 예산 회계법에도 없는 막대한 돈을 갈취해 버젓이 대통령 집무실에 대형 금고를 설치하고 보관했다.

▲ 1992년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때의 모습. ⓒ사진제공=이성춘

대통령의 금고, 이것이 부정부패의 시작이요, 원천이며 타락정치의 핵인 것을 간파한 김영삼 대통령은 이 못된 관행으로 인하여 미구에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파탄이 올 것을 걱정해 “합법적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당선된 대통령이 국회의 예산심의를 거쳐 합법적으로 청와대에 배정되는 예산만 있으면 됐지 무엇 때문에 다른 돈이 필요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이 깨끗하지 않으면 부정부패를 잡을 수 없고, 부정부패를 잡지 못하면 우리가 고생하며 수십 년 간 싸워 이제 겨우 이룩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자리 잡을 수 없다며 “먼저 대통령과 청와대가 법을 지키고, 깨끗하고, 투명해져야한다”면서 “나는 합법적으로 배정된 정당한 예산외에는 한 푼도 받지도 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 안에 있던 돈은 ‘통치자금’이 아니고 나라와 국민을 함께 썩게 하는 ‘썩은 자금’이라면서 박정희로부터 기나긴 32년 동안 이 엄청난 ‘썩은 돈’으로 신념 없는 정치인, 군 장성, 지식인, 일부 언론인들이 이 나라 미래를 짊어질 동량이 될 만한 인재들의 정기를 빼앗아 함께 썩게 만들고 급기야 전두환 노태우가 대를 이어 어루만지고 아꼈던 ‘청와대 안의 대통령의 금고’를 즉시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우리 말 사전에 있는 좋은 말은 모두 끄집어내 국민을 유혹했어도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는 비상조치 긴급조치 위수령, 계엄령이 아니면 그들은 발을 뻗고 잠을 자지 못했고, 국민은 하루도 편안하고 조용할 날 없이 긴장하며 살았다.

반면 6·10 민주항쟁과 노태우 전두환의 6·29 항복 후 민주헌법 개정으로 새로 탄생한 민주정권인 김영삼의 문민정부를 거쳐 20년이 지났지만 반란정권이 말하던 비상조치, 긴급조치, 위수령, 계엄령을 한번 선포하지 않고도 평화롭고 자율적 질서유지로 국정과 사회는 발전과 평화를 잘 유지해가고 있다.

그날 이후 거리에는 최루탄이 없어졌다. 얼마나 좋은가. 이것이 반란군이 이끄는 불법정권과 당당한 합법정권의 객관적 차이다. 한마디로 투명하고 합법적인 민주정치로는 하루도 버틸 수 없어,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처음부터 공작으로 한 것처럼, 부당한 돈으로 이를 ‘통치자금(統治資金)’이라고 이름 붙여 32년 동안 못된 짓을 자랑스럽게 한 것이다. 통치자금은 바로 부당한 독재권력 강화를 위해 부당하게 거둬들여 ‘정치공작(政治工作)’에 쓰여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군사정부의 부정부패의 대표적 상징인 대통령의 금고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등 외국의 대통령들과 정상 외교를 하는 사무실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금고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겠다. 그것은 금고가 아니라 ‘썩은 돈의 창고’였다.

요즘 많은 국민이 보릿고개를 없애고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만들고 비로소 산업화를 이룩한 박정희가 제일 훌륭하다고 말한다. 어처구니없는 얘기다. 정치공작은 불법을 부덕을 무리하게 덮어가는 수단이다.

모든 국민의 사표가 되어야할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부정부패의 정점에 서다니, 18년이나 그들의 영광스러운 잔치 상에 앉거나 초대받은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만 그 외의 국민들도 그들의 위세에 눌린 건지, 너무 오랫동안 그 속에 살다보니 알고도 더러워서, 무서워서, 좋은 게 좋다고 눈을 감은 건지, 그 잘못된 문화에 동화가 된 것인지, 박정희가 제일 깨끗했다고 한다.

부끄러움으로 영광을 삼는다고 했던가. 여기 유능한 박정희의 참모로 국무총리로 십수년 동안 충성을 바친 남덕우의 말을 싣는다

박정희의 돈 봉투

“박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면 그분이 여러 개의 누런 봉투에 무엇인가 쓰는 것을 나는 가끔 보았다. 그것은 정치자금으로 정치인이나 퇴역해 쉬고 있는 군부 장성들에게 돈을 보내는 봉투였다.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은 나 자신도 여러 번 그 봉투를 받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 이후의 대통령들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은 논외로 하고 박 대통령 식 봉투정치가 사라진 것은 민주화적 발전임에 틀림이 없다.” <2009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 중 일부>

남덕우도 김영삼 대통령 때 비로소 그 못된 관행이 없어졌음을 확인하고, 박정희 식 봉투정치가 사라진 것은 민주정치의 발전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Y씨는 대통령께 청와대에 배정된 예산 가운데 남는 돈이 있어서 “이 돈을 기간 안에 사용하지 않고 다음 해로 넘기면 남은 금액만큼 다음 해의 예산편성 때 그만큼 삭감됩니다. 그래서 “배정된 예산은 모두 사용해야 됩니다”고 설명을 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배정된 예산액 보다 적게 쓰고 남은 돈이 있어서 다음해에 예산이 줄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냐”고 그대로 두라고 지시했단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문제가 됐을 때 정상문 총무비서관이 청와대 총무실에 배정된 예산중(청와대공금)의 일부를 빼돌렸다가 노대통령 퇴임 후에 쓰도록 하려고 했다는 충성이 문제가 되었다. 그런 돈 말이다.
 
하나회의 척결

성스러운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군대 내에 박정희가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불법으로 운영했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군대 내에 자기의 사조직을 만들어 그 조직을 특별 관리한 것은 당연히 탄핵감이며, 하나회에 가입한 군인은 군법회의에 회부해 엄벌해야한다. 하나회원이 아니면 승진도, 요직 임명도 될 수 없었고, 박정희는 하나회원만 우대했다.

상명하복(上命下服)이 군의 생명인데, 하나회원들은 박정희의 배경만 믿고 하나회에 끼지 못한 상사를 우습게 보는 하극상(下剋上)의 무질서가 계속되었다. 박정희의 부당한 권력욕을 충족하기 위해 만든 잘못된 관행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우리 군대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32년이나 계속 잘못된 군사문화(軍事文化)는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끝이 난 것이다.

박정희의 사병화한 군대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것이 군대내의 부정부패의 온상이 됐고, 부당한 박정희의 독재권력 행사에 힘의 배경이 되어 군의 비리뿐 아니라 국정까지 문란하게 하다가 10·26이 오자 박정희의 수제자인 전두환 노태우가 대를 이어 헌정을 중단하고 모처럼의 민주화의 기회를 또 한 번 무산시켰다.

이것 하나만해도 공화당정권은 국정문란의 극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들 정치군인들을 그냥 두고는 안보도 민주헌정도 문란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집권 초기에 박살 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집권하자마자 하나회를 해체해 버렸다.

김영삼 대통령의 당당한 결단이 없었으면 하나회 척결은 불가능했다. 지금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때 과감하게 하나회를 척결하지 않았더라면 어느 정권도 그들의 위협과 작용에 의해서 올바른 정책 수행이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의 눈치나 살피는 암덩어리를 간직하고 불안하게 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공정한 민주군대로 출발 하는 토대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일제 침략의 뿌리이며, 우리에게는 이가 갈리는 원부인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여 친일 문화의 외형을 단숨에 혁파하였다.

공직자의 재산 공개

김영삼 대통령은 첫 번째 국무회의에서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고 모든 국무위원들이 솔선수범해 자신들의 재산을 진실하게 공개 할 것을 주문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6명의 대통령들이 있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먼저 공개하고 국무위원들에게 우리가 먼저 깨끗해지지 않으면 부정부패는 막을 수 없다고,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인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왜정 36년 동안 독립을 위하여 헌신했고, 국제정치에 발을 맞춰 남한만이라도 나라를 세워야한다고 건국에 앞장섰다. 민주국가의 기초를 다져 놓고 권력욕을 떨쳐버리지 못해 무리하게 3선 개헌을 하고 부정 선거까지 하다가 4·19로 무너져서 전공(前功)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3선 개헌만 안했더라면 국부였는데, 절반의 성공이었다. 아쉽다.

박정희는 왜정 때 일본군 장교가 되어 친일을 하다가 대한민국 군인이 되어 불법으로 5·16 軍事叛亂을 일으켜 18년 동안 온갖 부정부패 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오직 무력의 힘으로 제왕적으로 군림하다가 10·26으로 비극적 최후를 장식했고, 그의 수제자인 전두환, 노태우까지 불법으로 시작하여 겁 없이 부패행위를 하다가 비극적으로 감옥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불법(不法)으로 시작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3인의 군인이 본분을 망각한 대가는 3인 모두 비극(悲劇)으로 끝이 났다.”

민족적(民族的) 비운(悲運)이고 국가적(國家的) 망신(亡身)이다. 군사통치 32년은 박정희로부터 시작한 부정부패의 역사였고, 부정부패의 근본적 척결 없이는 투명한 정치를 할 수 없고, 투명한 정치 없이는 우리가 바라는 자유민주주는 없다고 확신한 김영삼 대통령은 공직자의 재산 공개를 시작으로 “부정부패 없는 투명한 민주정치 원년”을 선포했다.

우리나라의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기업인 또는 이해당사자에게서 돈을 받는 악습은 박정희로부터 시작해 32년이나 오랜 기간 공직 사회 전체에 만연돼 마치 그것이 자랑이고 능력이고 당연한 것으로 체질화되어 ‘자랑스러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심심치 않게 법망에 걸려들어 뜻있는 국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부정부패의 규모와 건수는 현저하게 줄었고, 우리 공직 사회도 많이 깨끗해지고 대민 자세도 훨씬 친절해지고 겸손해졌음을 본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사심 없는 김영삼 대통령의 용단에 고개 숙인다.
     
칼국수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먼저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청와대의 오찬 식단을 우리밀로 만든 칼국수로 하고 또 그것으로 대접했다.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이면서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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