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지난주 수요일 퇴근 무렵, 딸아이로부터 오늘 저녁 8시에 뭐하냐고 묻는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따로 약속은 없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싱겁게 대답을 한다. 괜한 걱정에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오늘 우리 학교에서 횃불 예배를 하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라는 것이냐고 했더니 오고 싶으면 500원만 가져오란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행사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다. 좋고 싫음을 내색하지 않는 딸아이 특유의 새침한 표현 방식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딸 하나가 있다. 소위 무남독녀다. 세월이 어느덧 흘러서 그 조그맣던 아이가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작년에 진학할 학교를 두고 그렇게도 고민하고 고민하더니 이 학교를 선택해 지원했다. 딸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금요일 저녁에 나와 주말을 보내면 일요일 밤에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야 한다. 그 주말마저도 딸아이는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작년까지만 해도 딸아이를 데리고 등산을 하기도 하고 함께 도서관도 가고, 여행도 갈 수 있었는데 요즘 애들은 뭐가 그리도 바쁜지….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여고이고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고 학교도 외진 곳이 아닌 서울 시내 복판에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기독교 미션스쿨이기도 하다. 종교 성향이 없는 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아이 역시 특정 종교에 대한 편향된 생각은 없어 보였다. 등산을 하면서 사찰에 들르면 합장도 잘 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캐롤이나 찬송가도 흥겹게 부른다. 나는 그런 아이의 성향이 싫지 않았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요즘도 학교에서 배운 것이라며 찬송가를 부르며 율동을 내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저 내 눈에는 귀엽고 예쁘기만 하다.
딸아이의 메시지를 받았던 그 날, 나는 퇴근을 하고 정동에 있는 이화여고에 갔다. 일요일 밤 아이를 기숙사에 데려다주기 위해 몇번 와봤던 그곳에는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려오질 않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어슴푸레한 교정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딸아이는 날 보자마자 500원을 가지고 왔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교문 근처로 데려갔고 네모난 박스에 동전을 넣으라고 하더니 진열돼 있던 전자식 양초를 내게 건넸다. 작년까지는 진짜 촛불이었지만, 안전을 위해서 올해부터 LED 양초로 바뀌었다고 했다.
예배가 있던 노천극장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교복을 입은 재학생들도 있었지만, 외부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내 옆에도 중년의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길래 나처럼 학부모인가 했는데 가만히 보니 이곳 동문이었다. 개교기념일을 기념해 전야에는 이렇게 횃불 예배가 있고 다음 날에는 학교 축제가 이어진다고 했다.
어둠이 내려앉자 행사 안내가 있은 뒤 기도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노천극장의 객석에는 무대 맞은편 십자가 대형으로 앉아 있던 합창단으로 향하며 촛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든 객석에 불이 켜지더니 무대 중앙에 설치돼 있던 대형 십자가가 횃불이 돼 타오르자 환호와 탄성이 터지며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성경 구절을 낭독하기도 하고 목사님의 설교도 있었지만, 이날의 예배는 지루함 없이 흥겹기만 했다. 아이들의 박수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함성이 터지기도 했다. 이렇게 횃불 예배는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던 아이들에게는 해방구를, 졸업생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그리고 나와 같은 학부모들은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여름밤의 흥겨운 콘서트 같았다.
딸아이도 행사 내내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 표정으로 내 옆에 앉아 예배에 참여했다. 두 손을 모으고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기도를 하기도 했고 찬송가를 흥겹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행사 말미에 이 학교 교훈인 자유, 사랑, 평화를 주제로 한 각자의 기도 시간이 주어지자 교정은 침묵에 휩싸였다.
아름다운 별똥별이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마치 우리들이 지금 막 들은 구슬픈 울음소리가 그 빛을 이끌고 가는 것처럼.
"저게 뭐지요?" 스테파네트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저건요,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이랍니다" 하고 나는 십자 성호를 그었다. 그녀도 그었다.
난 그 조용했던 기도의 시간에 알퐁스도데의 소설 〈별〉이 떠올랐다. 사모하는 여인의 갑작스러운 방문, 그리고 뜻하지 않게 모닥불 옆에서 그녀와 단둘이 함께했던 그 밤, 목동은 하느님께 스테파네트를 향한 자신의 순수한 사랑의 증인이 돼 달라고 기도했다.
조용한 기도의 시간, 교정을 밝혔던 수많은 등불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온 별들처럼 빛이 났다. 그리고 하느님은 오늘 아이들이 기도하며 다짐했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 영원하도록 허락하고 항상 함께하는 증인이 돼 주실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기도가 끝나고 이화여고의 교가가 흘러나왔고 별빛 같았던 촛불이 하나둘 꺼지며 횃불 예배는 끝이 났다.
딸아이는 교정을 걸어 다시 학교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이는 지금 걷는 저 길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그리울지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서 얼마나 다시 걷고 싶은 길이 될지를 아직은 알 수 없겠지….
그렇게 딸아이 고교 시절의 추억도 하나둘 쌓여가고 있는 듯했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