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텔링] 2004년 김덕룡과 2019년 심재철…공통점은?

호남 출신·비주류·5선 중진…보수정당 위기 속에서 탄생

2019-12-17     정진호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자유한국당이

자유한국당이 심재철 의원을 새로운 원내대표로 선택했습니다. 심 원내대표는 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신임 원내대표·정책위의장 선출을 위한 의원총회’에서 강석호·김선동·유기준 의원을 꺾고 임기 4개월짜리 원내대표로 선출됐는데요. 이로써 한국당은 15년 만에 ‘호남 출신 원내대표’를 배출하게 됐습니다.

영남을 핵심 지지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보수정당에서 호남 출신이 원내대표로 뽑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실제로 보수정당에서 호남 출신 원내대표가 나온 것은 2004년 김덕룡(DR) 전 원내대표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의원 대다수가 영남에 지역구를 두고 있는 당내 역학구도상, 아무래도 호남 출신은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죠.

그렇다면 그 ‘드문 일’이 왜 하필 지금 일어난 것일까요. 실마리는 DR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DR이 원내대표로 당선된 것은 2004년 5월 19일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도 많으시겠습니다만, 2004년 초는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시기입니다. 3월 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때와는 달리, 노 대통령 탄핵은 여론의 엄청난 역풍에 부딪혔습니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를 다룬 기사 한 토막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MBC가 여론조사기관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14일 하루 동안 전국의 만 20세 이상 유권자 2천25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44.4%가 열린우리당, 14.8%가 한나라당, 5.8%가 민주노동당, 5.4%가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열린우리당 지지율은 탄핵 이전인 지난 2월24일 MBC 여론조사에서의 지지율(25.8%)보다 두 배 가까이 상승한 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은 5%포인트 가까이 떨어진 수치다. 특히 여론조사 실시 최초로 민주당은 민노당보다도 지지율이 낮아졌다. (중략)
KBS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15일 하루 동안 전국의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에도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지지율을 크게 앞섰다. KBS 여론조사 결과 각당 지지율은 열린우리당 39.6%, 한나라당 16.4%, 민주당 5.9%, 민노당 2.5%의 분포를 보였다. (중략)
SBS가 여론조사 기관인 TN소프레스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1천명을 상대로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는 열린우리당 지지도가 더욱 높아, 이번 총선에서 어느 당 후보에게 투표하겠느냐는 질문에 53.8%가 열린우리당을 꼽았다. 이는 한나라당 15.7%, 민주당 4.4%, 자민련 1.1 % 등 야3당의 지지율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두배 이상 높은 수치다. (후략)
2004년 3월 16일자 <프레시안> ‘우리당 지지율 40~50%대로 급상승’

이처럼 역풍이 거세게 불자, 탄핵을 주도했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내에서는 ‘탄핵 철회론’이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 좀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가운데 22일 한나라당과 민주당내에서 탄핵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어 주목된다.
2야(野) 내부의 이 같은 기류는 탄핵안 가결이후 당 지지도가 급락하는 등 거센 역풍을 타개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 이뤄질 경우 총선 국면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김문수 후보가 이미 탄핵 철회 검토 입장을 공식 천명했으며, 남경필 권영세 의원 등 수도권 소장파들이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탄핵 고수입장을 취해왔던 홍준표 의원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노 대통령과 국회가 동시에 대국민사과를 한 뒤 탄핵을 해소하는 정치적 타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건부 탄핵철회론’을 내놨다.
경남 사천이 지역구인 이방호 의원도 “탄핵철회에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밝히는 등 탄핵철회론이 수도권을 넘어 영남권으로 번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민주당은 이날 설훈 의원이 의원회관에서 삭발 단식농성에 돌입하며 탄핵철회와 지도부 사퇴를 촉구하고 나서는 등 당내 소장파를 중심으로 탄핵철회론이 확산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설 의원의 탄핵철회 주장에 정범구 의원이 동조하고 나섰고, 이낙연·김성순 의원도 노 대통령의 사과를 전제로 탄핵철회를 검토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후략)
2004년 3월 22일자 <연합뉴스> ‘2野, 탄핵 철회론 확산’

보수정당에서

탄핵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선거 결과로 나타납니다. 2004년 4월 15일 열린 제17대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과반이 넘는 152석을 얻어 완승을 거뒀습니다. 박근혜 대표의 분투(奮鬪)에 힘입은 한나라당도 121석을 획득하며 참패는 면했지만, 국민으로부터 탄핵이 ‘심판’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했죠.

여론이 이러니,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였습니다.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예상대로 탄핵소추안을 기각합니다. 한나라당의 원내대표 경선은 그로부터 5일 뒤, 그러니까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서 열렸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변화’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당과 맞설 수 있는 정치력과 협상력을 갖춘 원내대표를 필요로 하기도 했습니다. 이게 바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중진이면서도 호남 출신의 비주류, 그리고 민심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수도권을 지역구로 둔 DR이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뽑힌 배경입니다.

심 원내대표가 맞은 상황도 DR과 매우 유사합니다. 한국당은 여전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여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 실시해 16일 공개한 여론조사에서는, 한국당 지지율은 전주 대비 1.9%포인트 하락한 29.5%로 나타났습니다. 총선이 4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여론이 호전(好轉)되기는커녕 오히려 지지율이 뒷걸음질 친 겁니다.

여기에 읍참마속(泣斬馬謖)을 말했던 황교안 대표는 친황(親黃) 위주 당직자 인선, 나경원 원내대표 임기연장 거부 등으로 비판에 휩싸여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총선을 치를 경우 한국당은 완패가 불가피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한국당 의원들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만한 시점이죠. 2004년 한나라당의 김덕룡과 2019년 한국당의 심재철. 15년 사이 보수정당이 배출한 ‘호남 출신 원내대표’ 사이에 발견되는 ‘평행이론’이라고 할 만합니다.

* 본 기사에 인용된 여론조사의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http://www.nesdc.go.kr)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