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시대, ‘샤이닝’은 어디에 있나

〈기자수첩〉 비이성적 사회구조·시스템, 이성적 인간만이 정화할 수 있다

2019-12-25     박근홍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명언으로, 오늘날까지 널리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명언이 그리스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정치적'(πoλιτικόν)이라는 표현을 '사회적'으로 오역돼 전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 사이의 의견차나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혼자 사는 게 아닌 타인과 함께 사는 인간(人間)이기에 갈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필연적이다. 이 같은 다툼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인간은 자기 편를 만든다. 조직을 구성하고 공동체를 꾸린다. 갈등이 필연적이기에 정치도 필연적이다.

갈등은 본능적 욕망에서 기인한다. 모든 생물의 삶은 제한된 시간(수명), 한정된 자원(권력, 경제력 등)을 더 많이 얻으려는 다툼의 연속이다. 욕망 충족을 위한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즉 정치는 보통 평화롭지 않다. 수많은 생물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는다. 때로는 전쟁정치라는 고비용·저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여기서 다른 생물과 인간을 가르는 개념, 그리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평하게 된 이유, '이성'이 등장한다.

혹자들은 이성이 태생적이라고 말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태초부터 인간이 이성을 지녔다면 하와는 절대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이며, 전 세계를 붉게 물들인 세계대전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본능적 욕망에만 충실하면 자신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다른 생물과는 달리 두뇌가 발달한 인간은 학습했고 모두가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를 평화롭게 도출할 수 있는 정치를 모색했다. 바로 법, 도덕, 윤리 등이다. 오늘날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이성은 사회구조와 시스템으로 고착화된 정치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 이성은 없고 욕망만 그득하다. 정치권에서는 내년 차기 총선을 앞두고 한정된 권력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선거법을 둘러싼 당파적 욕망이 썩은 내를 풍기고 있다. 재계에서는 세대교체라는 명분 아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세습경영과 경영권 분쟁이 판을 치고 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채 1년도 안 돼 욕망에 눈이 먼 형제들의 갈등이 특히 눈에 띈다. 언론계에서도 국내를 대표하는 언론사에서 특정 기업으로부터 광고 협찬을 약속 받고 기사를 삭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본의 욕망에 휘둘린 경언유착의 사례가 됐다.

국민들도 본능적 욕망에 기인한 사회적 갈등에 피로감이 높아지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논란은 수저론으로 대표되는 한국사회 계급구도에 다시 한번 불을 지폈고, 집값 고공행진과 일부 고위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 사건은 다주택자와 무주택자 간 갈등을 야기했다. 지역과 세대, 남녀 차이에서 불거진 해묵은 갈등들도 점차 심화되는 양상이다. 욕망의 시대, 갈등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하 내용에는 영화 〈샤이닝〉과 〈닥터 슬립〉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영화 해석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왼쪽부터)

얼마 전 스티븐 킹 원작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걸작 〈샤이닝〉의 속편 〈닥터 슬립〉이 개봉했다. 두 영화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병들게 하고, 어떻게 이를 극복해야 하는지 잘 알려준다. 닥터 슬립의 주인공 '대니 토렌스'(이완 맥그리거)는 초능력 '샤이닝'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어렸을 적 '오버룩호텔'에서 작가로서의 성공이라는 욕망에 미쳐버린 부친 '잭 토렌스'(잭 니콜슨)의 광기 어린 도끼질을 간신히 피해 살아남았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샤이닝을 외면하고 30년 간 본능적 욕망(술, 폭력, 매춘 등)에만 충실해 왔다.

그런 대니에게 어느날 자신보다 더 강력한 샤이닝을 지닌 12살 소녀 '에브라 스톤'(카일리 커란)이 찾아온다. 에브라는 다른 샤이닝 능력자를 먹어 치워 영생이라는 욕망을 채우는 데에 혈안이 된 세력 '트루 낫'의 위협을 느끼고 대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대니는 트루 낫과의 마지막 싸움을 위해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의 근원인 오버룩호텔을 다시 찾는다. 그곳에서 부친과 재회한 대니는 아버지가 건넨 술잔(욕망)을 거절하고 자신의 샤이닝을 재발현시킨다. 그렇게 트루 낫을 물리친 대니는 에브라를 구한 뒤 욕망을 정화시키기 위해 오버룩호텔과 함께 스스로를 불태운다.

두 영화에서 나오는 오버룩호텔, 트루 낫은 본능적 욕망에 매몰된 공간과 조직이다. 오버룩호텔은 외부로부터 고립된 환경을 악용해 호텔을 찾은 사람들의 사회적 욕망을 부추겨 자기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파멸에 이르게 하는 공간이다. 트루 낫은 다른 능력자의 샤이닝을 나눠 마시며 생명 연장이라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채우는 조직이다. 이들은 대니와 에브라를 욕망의 세계로 끌어내리기 위해 유혹하고 포섭하려 들었으나, 두 사람은 선량한 샤이닝의 힘으로 이성의 끈을 끝내 놓지 않았고 오버룩호텔과 트루 낫을 정화시키는 데에 이른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바벨탑 공화국: 욕망이 들끓는 한국 사회의 민낯〉에서 "개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비도덕적인 사회구조와 시스템이 문제다. (중략) 특정 구조와 시스템이 오래 지속되면 학습화 현상이 일어난다. (중략) 건물주들이 시세를 따르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고 느끼는 심리는 그들의 평소 선량함을 압도한다. 상생을 거부하는 탐욕을 건전한 상식으로 만든 사회, 그 상식을 지키지 않는 게 오히려 문제가 되는 사회, 이게 바로 대한민국의 민낯"이라고 꼬집는다.

인간의 본능적 욕망에서 기인한 사회적 갈등,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인 정치로서의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회구조와 시스템은 어느 순간부터 비(非)이성화되기 시작했다. 특정 정치세력을 옹호하지 않으면 빨갱이나 토착왜구로 조롱을 받는 사회구조,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으면 바보 같고 고지식하다며 손가락질하는 사회구조, 옳은 말을 하면 모난 사람이라고 욕을 듣는 시스템, 용기를 낸 내부고발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몰락하는 시스템, 그 안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비이성화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을 강요받는 현실이다.

영화 닥터 슬립에서 봤듯 비이성적인 사회구조와 시스템을 정화할 수 있는 건 결국 이성적인 인간이다. 물론,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권선징악이 아니라 유전무죄가 시대정신이 된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노력해야 한다. 본능적 욕망에 충실한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자멸했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 구성원 하나하나 스스로가 자신이 가진 샤이닝을 올바른 방향으로 발현시켜 비이성적인 사회구조와 시스템, 즉 정치를 바로 세웠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리고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