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정치] 조선 망국의 주역 명성황후와 김여정
족벌 청치로 망국의 길 걷고, 자주 외치면서 외세의존적인 태도 닮은 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짐(朕)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중에 왕후(王后) 민씨(閔氏)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
이는 <고종실록> 고종 32년 8월 22일 기사에 실린 왕후 민씨(후일 명성 황후로 복권)를 서인으로 강등시킨 이유다. 또한 고종은 을미사변이 터진 지 이틀 만에 내린 조치다. 물론 을미사변 직후 허수아비 국왕 고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내린 조치이긴 하지만 왕후 민씨가 우리 근대사에 끼친 악영향을 비교적 상세히 적은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고종은 민씨에 대한 자신의 실책도 인정하는 글을 남겨 인상적이었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려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난해 12월에 종묘(宗廟)에 맹세하기를, ‘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일제에 의해 시해되고 서인으로 강등된 민씨는 1851년 경기도 여주의 몰락한 양반의 딸로 태어나 시어머니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가 된 신데렐라와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총기가 넘쳐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하지만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갈등으로 정치적 반대 세력을 주도했다. 결국 대원군의 하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제일 먼저 며느리를 죽이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는 한 집안의 비극뿐이 아닌 조선의 비극이기도 했다.
민씨는 임오군란을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외세의 힘을 빌려 정적을 제거하고 자국민을 학살한 비정한 여인이었다. 실제로 임오군란 발발의 직접적인 신호탄은 민씨 정권의 부정부패와 비리에 있었다. 구식군대의 월급을 가로채고 온갖 수탈로 경제를 망쳐 서민을 괴롭혔다. 겉으로는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실상은 권력욕에 빠진 비리 집단의 전형이 민씨 정권이었다.
1884년에 터진 갑신정변도 민씨와 급진개화파와의 정치적 한판 승부였다. 급진개화파의 기습으로 수세에 몰린 민씨의 선택은 역시 청나라였다. 청군이 개입하면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종식됐지만, 일본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군대를 파병해 한반도는 전쟁의 위기에 빠졌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민씨는 조선을 전쟁의 위기로 몰았던 나쁜 정치인이었다. 특히 민씨는 대궐에서 굿을 하거나 치성 명분으로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국고를 낭비했다.
동학농민운동은 반외세·반봉건 운동이다. 흔히들 반외세 즉, 반일(反日)만 생각하지만 조선 백성의 주된 적은 민씨 정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외세만큼 반봉건 중심에 서있던 민씨 정권이 남긴 폐해는 한민족의 재앙이 됐다. 결국 민씨는 을미사변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조선 망국에는 무능한 군주 고종과 민씨를 비롯한 외척정치가 가장 큰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김여정이 최근 공식석상에서 실종된 김정은을 대신해 한반도 위기 국면에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문재인 정권을 겨냥한 특유의 독설로 전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김여정은 김정은 유고시 북한을 이끌 제2인자로 인정받고 있다.
한민족 현대사의 최고 비극인 6·25 남침의 주역 김일성의 손녀이자 김정일의 딸인 김여정은 백두혈통이다. 겉으로는 한반도 평화를 외치지만 실상은 적화통일의 꿈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백두혈통이다. 이들에 의해 2천만 명이 넘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은 철저히 외면됐다. 또한 이들은 겉으로는 자주를 부르짖지만 중국에는 경제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전을 구걸하는 외세의존적인 집단이다.
공산주의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전근대적인 족벌정치로 한반도를 넘어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 김여정을 보면 19세기 말 근대화의 조류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족벌 정치로 망국의 길을 걷고, 외세를 끌어들여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했던 왕후 민씨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