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대 대선] 노사모와 이뤄낸 승리…“열정과 진심이 조직을 이겼다”
<대통령이 본 정치史>2002년 그날, 김대중 노무현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스물여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2002년 제16대 대선이다.
‘대통령 회고사’는 대통령의 입을 빌려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이번 회고사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도 참고했다.
2000.04~06月. 16대 총선, 그리고 노사모 등장
노무현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다. 부산에서만 세 번째 패배였다. 그는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가 아닌, 부산 북‧강서구 을을 택했다. 그 결과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 1만3328표(17.53%포인트) 격차로 졌다.
그는 낙선 직후 <시사저널>에 ‘부산 시민들을 욕하지 마십시오’란 제목의 특별 기고문을 올렸다. 다음은 기고문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승리니 패배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누구와도 싸운 일이 없습니다. 상대 후보와 싸운 일도 없고 부산 시민들과 싸운 일도 없습니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목표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뿐입니다. (중략) 감히 말씀드리면, 저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부산으로 갔습니다. (중략) 1990년 3당 통합 당시 김영삼 총재가 여당으로 가고 나서 저는 (부산에) 야당을 다시 살려 보려고 동분서주해 보았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가 말한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목표’란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 통합이었다. 그의 무모한 도전은 ‘바보 노무현’을 탄생시켰다. 이 별명은 ‘청문회 스타’ 이래 그가 가장 좋아했던 별명으로 알려졌다.
낙선 직후 시민들은 그의 홈페이지 ‘노하우’를 찾았으며, 이후 이들 가운데 60여명이 만났다. 여기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즉 노사모가 탄생했다. 이들의 목표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였다. 다음은 노무현이 자서전을 통해 평가한 노사모다.
노사모는 민주당 국민경선 승리의 주역이었고, 대선 승리의 견인차가 되었다. 대통령을 하면서 국민들의 신임을 잃었을 때도 변함없이 나를 지켜 주었다. (중략) 심지어는 나의 잘못과 흠결이 드러났을 때에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 (중략) 노무현을 버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끝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내 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노사모였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66~167쪽.
2002.03~04月 새천년민주당 국민참여경선
새천년민주당은 최초로 일반 국민들도 참여하는 ‘국민참여경선’을 도입했다. 당원과 국민이 50대 50의 비율로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당시 200만 명이 참여 신청을 했으며, 이 가운데 2만 명을 무작위 추출해 선거인단이 선정됐다.
후보는 총 일곱, △이인제 △김근태 △정동영 △한화갑 △김중권 △유종근 △노무현이 참가했다. 여론은 당시 한나라당 총재였던 이회창에게 기울었으며, 소위 ‘이회창 대세론’이 형성됐다. 반면 민주당에서는 일곱 명의 후보 중 ‘이인제 대세론’이 앞서던 상황이었다. 두 대세론은 1997년 한나라당의 경선대회를 떠올리게 했다. 1997년 15대 대선 막전막후는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662)
그러나 선거 결과, 이인제 대세론은 뒤집혔다. 2002년 3월 9일, 제주도에서 첫 경선이 시작됐다. 결과는 1위 한화갑, 2위 이인제, 3위 노무현, 4위 정동영이었다. 다음날 울산 경선에서는 노무현이 1위를 하며, 첫 주말 경선의 합산 결과 종합 1위는 노무현이었다.
다음 주 광주 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했으며, 이인제와 한화갑이 그 뒤를 이었다. 언론은 노무현과 이회창의 가상 대결 결과가 광주 경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했다. 당시 <문화일보>의 정기여론 조사에서 처음으로 노무현이 이회창을 1.1%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이인제가 대전과 충남에서 압도적인 1위를 거두며 결과는 또 뒤집혔으나, 강원에서 7표 차이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했다. 이후 경남, 전북, 대구 등에서도 노무현이 연달아 1위를 기록했다. 결국 전남을 끝으로 이인제는 사퇴를 선언했다. 시작은 일곱 명이였으나, 16개 지역 경선 이후 노무현과 정동영 두 후보만이 남았다.
두 달 간의 경선 결과, 노무현이 70.5%의 득표율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그는 “노사모가 일당백의 활약을 했다”고 회고했다.
어떤 후보는 호텔방에 선거인단을 한 사람씩 불러 돈 봉투를 쥐어 주었는데, 같은 시간에 부산상고 동문 선후배의 부인들은 선거인단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노무현 지지를 읍소했다. 열정과 진심이 돈과 조직을 이긴 것이다. (중략) ‘이인제 대세론’은 언론과 정치인들이 만든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들은 기회주의자를 용납하기는 하지만 지도자로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83~184쪽.
한편 한나라당 역시 4월 경선을 치렀다. 여기에 이회창뿐만 아니라 △최병렬 △이부영 △이상희 등도 출마 선언했으나, 결과는 이회창의 승리였다. 이회창은 민주당 내 노무현의 승리에 대해 “당시 나는 ‘노무현 부상현상’은 조만간 깨질 바람이라고 봤다”고 회고했다.
뒤늦게 정치권에 들어온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정치에 들어온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그 연륜에 알맞은 기반을 잡지 못했다. 변방으로 돌며 전두환 전 대통령 청문회에서 보듯이 뛰어난 언변과 돌출적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정치를 해온 것으로 보았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의 바람이 일어날 때 민감하게 이에 편승해 부상하는 데 능하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851쪽(e북 기준).
2002.06~10月 지방선거 민주당 패배와 노무현의 위기
노풍(盧風)은 위태로워졌다. 그러는 가운데 6‧13 지방선거가 있었다. 선거 결과 전국 16개 시‧도지사 중 한나라당이 11곳에서 압승했다. 뿐만 아니라 13곳에서 치러진 8‧8 재보선에서도 민주당이 참패했다.
이에 6월에 실시한 <동아일보> 여론조사에서도 노무현(36.3%)이 이회창(48.9%)에게 12.%포인트 격차로 크게 뒤지기 시작했다. 노무현은 당시를 “명색만 후보였을 뿐 당내에서 점차 고립돼 갔다”고 회고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제3의 후보 영입론’이 제기됐고, 정몽준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마침 그 시기는 2002년 월드컵 열기가 달아오르던 때로, 그는 당시 월드컵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노무현은 신당 논의뿐만 아니라 정동영 후보와의 재경선 요구 수용 의사를 밝혔다.
정몽준은 9월 17일 ‘국민통합21’을 창당했으며, 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를 만들어 후보 재경선을 주장했다. 10월 17일에는 김민석 의원이 국민통합21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노무현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때 ‘개혁국민정당’이 10월 20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열고, 인터넷 당원 투표를 통해 노무현 지지 의사를 밝혔다.
2002.11~12月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노무현에겐 승부수가 필요했다. 11월 3일, 그는 정몽준에게 후보 단일화를 제안했다. 협상의 난항 끝에, 11일 국민통합21이 제안한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여론조사 결과 뒤지고 있었던 노무현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방식이었다.
언론사 두 곳의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 지지도가 처음으로 40%를 넘었다. 나는 정몽준 후보에게 근소하게 뒤지는 3위였다. 결단할 때가 온 것이다. 이대로 가면 선거에서 이길 확률은 0%였다. 단일후보가 될 확률은 50%에 조금 모자랐다. 일단 단일후보가 되기만 하면 대통령이 될 확률은 100%에 가까웠다. 복잡하게 계산할 일이 아니었다. 한나라당에 정권을 다시 넘길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정몽준 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연립정부를 세우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95쪽.
11월 25일 두 곳에서 여론조사를 했다. 그 결과 하나는 무효가 되고, 다른 하나는 노무현의 승리로 유효했다. 그의 단일화 승리에도 노사모가 함께했다.
이것이 그저 얻은 행운이 아니었음을 나는 잘 안다. 노사모와 개혁 성향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있었다. (중략) 수많은 지지자들이 단일화 여론조사를 하기 며칠 전부터 집 전화를 핸드폰으로 착신전환 해두었고, 혹시 하는 마음에 스팸 전화도 마다 않고 신호만 울리면 전화를 받았다. 내가 단일후보가 된 것은 이런 분들의 열정과 참여, 성원 덕분이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196쪽.
한편 이회창은 후보 단일화에 “오로지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뽑기 위해 단일화한다는 것은 선택권자인 국민의 판단기준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당은 당의 정체성과 정강정책을 가지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대선 후보를 선정해 국민 앞에 제시한다. 그런데 당 통합 방식이 아니라 당의 정체성과 기본적인 정강정책이 서로 다른 두 당의 후보가 오로지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후보를 뽑기 위해 단일화한다는 것은 선택자인 국민의 판단기준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하고 정당주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바야흐로 정치판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막장극으로 치닫는 것처럼 느껴졌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996~997쪽.
이회창은 2~3위 후보끼리 단일화가 판을 뒤집는 결과까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특히 단일화 과정에서 두 사람에게 TV 토론의 기회를 준 것을 “불공정하고 형평성에 반하는 선거운동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선거법상 허용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단일화 이후 노무현이 다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을 앞서기 시작했다. 정국의 변화는 단일화 직후 11월 25일 <한국갤럽>과 KB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37.0%)이 노무현(43.5%)에 6.5%포인트 역전됐다. 이회창은 이러한 정세 변화를 노무현의 승부 정신과 노무현(흙수저)와 정몽준(금수저)의 대결로 해석했다.
불리한 처지에 있던 노무현 후보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모험수로 정 후보와의 TV 토론과 여론조사라는 승부수를 던졌고 이것이 적중했다. 마치 도박판에서 돈을 잃고 있던 도박사가 모든 것을 한판승부에 걸어 도박판을 휩쓰는 것과 같았다. 많은 국민들은 이런 모험과 승부에 열광했고 대역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역전의 요인(아마도 결정적 요인일 수 있다)은 노무현과 정몽준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노무현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고 정몽준은 대표적인 금수저 출신이다. 한쪽은 무산대중과 서민을 대변하고 다른 층은 재벌과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모양새였다. 이 대결에서 흙수저 출신이 금수저 출신을 쓰러뜨렸으니 관중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세력의 구세력, 기득권 세력에 대한 혁신과 변화처럼 느끼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1003~1004쪽.
2002.12.13.~19. 단일화 파기 및 제16대 대선
단일화에 합의한 정몽준은 유세장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권력분점을 문서로 보장받길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12월 13일, 노무현은 정몽준과 국회에서 만나 국정 동반자로서 정치개혁을 함께 추진할 것을 합의했다. 그렇게 정몽준은 선거 닷새를 남긴 14일 부산 유세에서 첫 공동유세를 가졌다.
문제가 됐던 유세는 18일 저녁 명동-종로였다. 그날 밤 정몽준은 성명을 통해 단일화 철회를 선언했다. 그는 노무현이 유세장에서 했던 “미국과 북한이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발언을 이유 삼았다. 이것이 합의된 정책 공조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종로 유세에서 정몽준 지지자가 ‘차차기는 정몽준’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고, 노무현이 정동영과 추미애를 단상 위로 올라오게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표현은 다르다. 노무현은 “정몽준 대표와 정동영, 추미애 의원 등을 함께 추켜세우고 덕담을 했다”고, 이회창은 “노무현이 ‘너무 속도위반 하지 말라’고 했다”는 표현을 썼다.
단상에는 정몽준 대표와 내가 서 있고 단하에는 “차차기는 정몽준”이라는 현수막이 펄럭이는데, 정동영 의원은 아래에 서 있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마지막 날인데, 단상에 한 번이라도 올려 손이라도 들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도 한 번쯤은 단상에 오르고 싶어할 것 같아서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런데 추미애 의원도 거기 있었다. 그도 큰 꿈을 가진 정치인인데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함께 올라오게 했다. 누가 또 더 올라왔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렇게 좋은 정치인들이 많아서 얼마나 좋으냐고 하면서, 정몽준 대표와 정동영, 추미애 의원 등을 함께 추켜세우고 덕담을 했다. 이것이 폭탄의 뇌관을 건드리는 행위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00쪽.
언론은 노 후보가 종로 유세에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대표 지지자가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 속도위반하지 말라. 대찬 여자 추미애 의원도 있고, 국민경선을 지킨 정동영 최고위원도 있다. 몇 사람 있으니 경쟁할 수 있다”고 말했고, 정 대표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판단하고 지지 철회를 하게 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1030쪽.
당시 노무현은 “하늘에 맡기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며 잠이 들었다. 새벽에 그를 찾아온 건 정대철 선대위원장이었다. 정대철은 그에게 정몽준 자택을 찾아가자고 제안했다. 다음은 지난 4월 정대철 전 의원의 <시사오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가자는 내 말에 노무현이 펄쩍 뛰면서 안 간대요.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차에 태웠어요. 제3한강교 지나갈 땐데 ‘차 돌려! 안 해!’ 이러더라고요. 내가 만류하고, 다시 가다가는 ‘차 돌려!’ 여의도서 신촌으로 가는 동안만 차를 세 번이나 돌렸죠.
딱 가니까, 기자들이 와 있더라고요. ‘우리는 서글픈 표정만 짓고 있자. 그럼 동정 받는다.’ 내 동물적인 감각이었어요. 서글퍼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있는 장면, 그게 국민 정서를 자극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의 말대로 전날 밤의 일은 국민 정서를 건드렸다. 제16대 대선 투표 당일, 노무현은 역전극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전 투표에서 졌으나, 오후 3시 이후 역전한 것이다. 이회창 역시 이 사건이 “노무현 지지자들을 더욱 결집시키는 계기”로 평가했다.
그때 나의 주변에서는 대체로 “이제 다 끝났다”고 안도하는 분위기였지만 일부에서는 걱정을 진지하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일부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라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정 후보의 지지 철회를 듣고 노 후보의 지지자들을 더욱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노 후보 지지자들이 인터넷 광장을 통해 열정적으로 뭉치고 호응하면서 대단한 응집력을 보여줬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1031쪽.
노무현은 57만 980표(2.33%포인트) 격차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회창은 정치 은퇴를 선언하며,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흘렸다.
“유권자를 설득하는 능력과 이미지가 노무현 승리 이끌어내”
전문가들은 1997년 제15대 대선의 승패를 야권 연대(DJP 연합)에서 찾곤 한다. DJ의 호남과 JP의 충청의 지지 기반이 더해져 승리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회창은 이인제의 한나라당 탈당 후 출마로 지지 기반이 분열돼 패배했다는 설명이다.
5년 후 2002년 제16대 대선은 어떨까. 전문가들은 DJ의 호남 지지 기반을 노무현이 흡수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이에 더해 수도권 이전의 공약으로 충청의 지지 기반까지 더해졌다는 것이다. 반면 이회창은 또 한 번 지역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회창은 이러한 정치 공학적인 분석에 반대했다. 이는 결국 승자 편에서 분석한 ‘사후약방문’과 같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이러한 고리타분한 선거공학에서 벗어나, ‘이미지’에서 패인을 찾았다.
유권자 중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층 이른바 중도층이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나는 이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나는 선거유세나 토론 또는 홍보에서 청중이나 상대방을 이론의 여지없이 압도할 만큼 힘 있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선거는 설득인데 그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1041~1042쪽.
그는 귀족과 서민, 기득세력과 개혁세력이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자평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오랜 기간 한나라당 총재를 지내고, 대선 후보를 두 번씩이나 하면서 대세론도 나오는 등 국민들에게는 지겹도록 오래 보아온 얼굴이 돼버렸다”며 “말하자면 기득 세력의 대표주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라 설명했다.
노무현 역시 김대중의 후광을 받아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표를 흡수했다는 점에 공감하면서도, ‘이미지’와 ‘인물론’에 힘을 보탰다. 그의 개혁적인 이미지를 지지한 노사모를 통해 날개를 달았다.
노무현은 선거 승리의 순간마다 노사모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자서전을 통해 민주당 국민참여경선 승리에도 “노사모가 일당백의 활약을 했다”고, 단일화 성공에도 “그저 얻은 행운이 아닌 노사모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통령 당선에도 “그들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2002년 16대 대선은 여전히 정당과 지역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설명대로 정당과 지역을 뛰어 넘어 ‘인물’의 가능성을 보여준 선거였는지도 모른다.
“열정과 진심이 돈과 조직(勢)을 이겼다.” - 노무현, 제16대 대선 당선자
“이미지와 연출(performance)의 대결이었지, 정책이나 시대정신은 핵심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 이회창, 제16대 대선 낙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