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택한 KT&G…릴, 해외行 순항할까 [안지예의 줌-아웃]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안지예 기자]
시시각각 변하는 소비 트렌드 속 기업들이 어느 때보다 발 빠르게 경영 전략을 세우고 있다. 기업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생존 날갯짓이 되는 가운데, 오늘 그들의 선택이 현재 시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내일의 모습에 변화를 줄 수 있을지 [줌-아웃] 코너에서 분석해본다. 때로는 멀리서 보아야 잘 보이는 만큼, 나무가 아닌 숲으로 시각을 넓혀 업계의 ‘큰 그림’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KT&G가 필립모리스인터내셔날(PMI)과 협력해 궐련형 전자담배 ‘릴’(lil)의 해외 공략에 나선다. 국내 무대에서 경쟁 관계인 양사가 손잡은 걸 두고 업계에선 ‘적과의 동침’이 본격 시작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KT&G-PMI 15년 장기 계약 의미는
KT&G와 PMI는 지난 1월 30일 ‘KT&G-PMI GLOBAL COLLABORATION’ 행사를 열고 릴의 해외 판매를 위한 제품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앞서 2020년 맺은 3년 단기 계약에서 나아가 15년 장기 계약을 새로 갱신한 것이다. 앞서 첫 3년 계약 당시 성과가 좋으면 장기적인 협업 체계를 이어가기로 한 데 따른 결과다.
이번 계약으로 KT&G는 오는 2038년 1월 29일까지 15년간 전자담배 제품을 PMI에 지속 공급하고, PMI는 한국을 제외한 전 세계 국가에서 KT&G 제품을 판매한다. 판매 제품에는 KT&G가 현재까지 국내에서 출시한 궐련형 전자담배인 ‘릴 솔리드’, ‘릴 하이브리드’, ‘릴 에이블’ 등 디바이스와 전용스틱 ‘핏’, ‘믹스’, ‘에임’ 등을 비롯해 향후 출시될 제품들도 포함된다.
기존 계약과 다른 점은 15년에 달하는 장기 계약으로, 3년마다 총 5번 성과를 검토한다는 점이다. PMI가 정해진 KT&G 제품 판매량을 보증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PMI는 계약 초기인 2023년부터 오는 2025년까지 최소 160억 개비의 판매를 보증한다. 전자담배 전용스틱 등에 대한 최소 구매수량 기준을 통해 사업 안정성을 더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웨인 우(Waynn Wu) PMI 투자 부문 부사장은 “시장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3년간의 성과를 검토하기로 했다”며 “장기계약이기 때문에 KT&G와 PMI 모두에게 장기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시장에선 1위 놓고 경쟁
해외 시장에선 동반자 관계지만 현재 국내에서 KT&G와 필립모리스는 1위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경쟁자 사이다. 때문에 양사가 2020년 처음으로 전략적 제휴를 맺을 당시에도 업계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특히 최근엔 궐련형 전자담배 점유율을 두고 어느 때보다 두 회사의 경쟁이 치열하다. 그동안은 ‘아이코스’를 필두로 초기 시장을 선점한 필립모리스가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했지만, 지난해 릴이 1위 자리를 빼앗은 상황이다. 2017년만 해도 한국필립모리스의 궐련형 전자담배 시장 점유율은 87.4%에 달했는데, 2022년 1분기 기준 KT&G가 점유율을 45%까지 끌어올리면서 처음으로 필립모리스를 제친 것으로 전해진다. 일각에선 곧 KT&G가 과반 점유율을 차지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KT&G는 후발주자로 나섰음에도 릴 시리즈를 공격적으로 출시해 이 같은 성과를 거뒀다. 탄탄한 국내 영업망도 추격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다. 2022년 11월에는 인공지능(AI)을 탑재한 신제품 ‘릴 에이블’(lil AIBLE)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굳히기에 나섰다. 이에 앞서 필립모리스도 2022년 10월 ‘아이코스 일루마 시리즈’를 새로 선보인 바 있다. 경쟁에 불이 붙은 셈이다.
해외 무대 협력이 가져다 줄 시너지는
이처럼 국내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양사가 해외에서 손을 맞잡은 이유는 뭘까. 우선 KT&G와 PMI는 앞선 협업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강조했다.
웨인 우 부사장은 최근 열린 기자간담회 현장에서 “KT&G와 3년간 많은 신뢰가 쌓였다”면서 “장기 협약 체결에 대해 굉장히 고무돼 있고, 파이프라인을 증설해 중저소득 국가와 중저시장 국가로도 제품 공급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복인 KT&G 사장 역시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하면서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 미래 담배 산업의 혁신적 변화를 주도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결국 지난 3년간의 협업 성과가 이번 장기 프로젝트를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실제 릴은 PMI와 전략적 제휴를 맺은 이후 매출액은 2배, 영업이익은 4배 가량 증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진출국은 일본을 비롯해 이탈리아, 그리스 등 유럽 주요국과 중앙아시아, 중앙아메리카 권역 등 31개국에 달한다.
특히 두 회사의 이해관계를 따져보면 KT&G는 PMI의 유통망을, PMI는 KT&G의 제품력을 각각 노리고 있다. 공격적인 해외 진출을 구상하고 있는 KT&G 입장에선 전 세계적인 유통망을 보유하고 있는 PMI와의 협업으로 사업 효율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연초 담배 비중을 줄이고 있는 PMI는 KT&G의 혁신 제품을 활용해 포트폴리오를 손쉽게 강화할 수 있다. 실제로 업계에선 KT&G가 빠르게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기술 경쟁력을 꼽고 있다.
증권가에서도 양사의 장기 협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주영훈 NH투자증권 연구원은 “KT&G가 PMI와 전자담배 판매 관련 장기계약을 체결하면서 해외 사업에서의 안정성을 확보했다”면서 “양사가 장기간의 공급 계약을 체결한 만큼 해외 진출 국가의 추가 확대도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경신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KT&G 전사 사업포트폴리오 내 NGP(Next Generation Products)로의 무게 중심 변화와 관련된 체질개선 의지가 높다고 판단된다”며 “저변확대 목적의 디바이스 분포 가속화와 현지 시장 내 유의미한 지배력의 스틱 안착을 기대할 만하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