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민주가치, 버린적 없어…‘거짓 프레임’, 정치惡” [時代散策]
김무성 전 대표(새누리당) “윤석열 대통령, 나라 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밑도 끝도 없는 배신자 프레임, 가장 큰 문제” “총선서 도장 갖고 날랐다는 얘기 악의적 편집 ” “명예회복 필요? 정치인은 역사 앞서 당당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윤진석 기자]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가올 일은 쫓을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만약에,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흥망성쇠도, 성패와 승패의 주역들 모두 바뀌었을지 모른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계승할 것과 청산할 것을 만들어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시사오늘>은 그동안 역사적 증언을 모와왔다. 당대의 시사점을 오늘날에 반추하기 위해서다. 과오가 반복되지 않을 때 미래는 비로소 안개를 거둘 것이다. 오늘도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어느 시간 모퉁이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건. ‘재발견’의 묘미가 있다. 시대산책이 현대사와 동행하는 이유다. |
시대산책 ‖ 김무성 편
- 밑도 끝도 없는 배신자 프레임
- 18·19대 총선 공천학살의 피해
- 2012년 대선 다시 친박으로
- 7·14 전당대회 비박으로 몰려
- 20대 총선 공천 파동 일촉즉발
- 탄핵 정국 당시 청와대 속사정
- 바른정당 정치사 오명 된 이유
1951년 부산 출생, 6선(부산 남구·영도 15~20대), YS 대통령 후보 정책보좌관, 문민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청와대 민정사정 비서관, 47대 내무부 차관, 한나라당 원내대표, 새누리당 대표, 마포포럼 공동대표(현), 민추협 공동회장(현) |
경칩이 지났다.
다시 꽃 피는 봄이 왔다.
3년 전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이하 김무성)는 의원실을 비우기 전 국회 벚꽃길을 걸었다. 6선에 이르는 동안 숱하게 걸었을 길이다. 시간을 정리하듯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봤다. 20대 국회를 끝으로 불출마를 선언한 뒤였다. 우파 대통합을 위한 백의종군이라 했다.
이후 마포포럼(더좋은세상으로)을 만들었다. 공부 모임이었지만 실상은 반문(反문재인) 기지다.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학생부터 시민단체, 정치인들이 활동할 공간이 없자 문을 개방했다. 이곳에서 4·7 재보선 단일화 판을 만들어 정권교체의 교두보를 열었다.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의 입당을 적극 유도해 정권교체의 목표를 완성했다.
- 마포포럼 보면 실질적으로 선거 승리의 공이 큰데 정작 조명은 적은 것 같단 말이죠.
“우리가 뭘 원해서 하는 건 아니잖소?”
- 그럼 뭔가요.
“마지막 남은 애국심으로 하고 있으니까.”
수더분하게 말했다. 늘 그렇지만 목소리가 석양을 가로질러 가는 뱃고동 같다.
- 윤석열 대통령이 이를 알까요.
“왔다 갔으면 싶었는데 안 오더라고. 선거 끝나고 용산에 한 번 안 불러줘. 하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 섭섭하죠?
“섭섭하긴 섭섭하지. 그러나 우리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담담했다.
- 나라를 구한 게 맞습니까.
“….”
말끝마다 구국의 정권 탈환을 외쳤던 그다.
“윤 대통령이 잘하고 있잖소.”
반문했다.
“나는 윤 대통령이 나라를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왜요.
“문재인 정권의 대못 빼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용감하게 선두에 서서 하고 있잖소.”
대못이라 함은 “귀족노조”를 말했다.
“나라 바꿀 시간 부족해”
현실 정치를 둘러싼 대화가 좀 더 이어졌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당선에 힘을 실었다면 국민의힘 3·8 전당대회에서는 ‘김기현 후보’를 전폭 지원했다. 김 후보는 현재 신임 대표가 돼 있다.
지난달 27일 인터뷰차 마포포럼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였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던 예견대로 ‘김’의 승리로 끝났다.
전대는 결선까지 가지 않고 1차 경선에서 끝났다. 김기현 52.93%, 안철수 23.37%, 천하람 14.98%, 황교안 8.72% 순이었다. 또 다른 후보였던 ‘윤상현-조경태’는 컷오프(예비경선)에서 떨어졌다.
- 예비경선 때 일이긴 하지만 윤상현-조경태 의원은 무소속으로 나와도 될 만큼 조직표도 많을 텐데 천하람 후보를 못 넘었습니다.
“둘 중 누가 더 많이 나왔나?”
대뜸 물었다.
- 순위는 안 나왔습니다.
“윤상현 의원은 대통령 하겠다고 전국 조직 만들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지만 안 되는 거라. 장점이 많은 정치인이에요. 굉장히 열심히 하고 부지런하고 말도 잘하고 머리도 좋아. 술도 잘 먹어. 스무 명 모이는 데 가면 한 잔씩 먹고 이름을 다 외워버려. 진실 되면 더 좋겠지만 말요.”
칭찬 가운데 뼈가 느껴졌다.
- ‘김기현’이 틀림없이 이길 거로 본 이유는 뭔가요.
“선거는 구도에요. 상대적입니다.”
운을 떼며 이어나갔다.
“나온 인물들 면면을 봐요. 안철수 의원이 당대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황교안 전 대표는 지난번 실패했잖소. 공천 X판으로 했잖아.”
“내 말 그대로 써줘요” 당부하며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선거 중간에 공천관리위원장을 교체한 예가 있었나요. 1심 징역형 받은 사람을 위성정당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쓰는 게 말이 돼요.” 격앙했다.
- 안철수 의원과는 4·7 재보궐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서운해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동안 안 의원의 정치적 행위를 지지해서 서울시장 선거 때 끌어들였던 게 아니오.”
오해하지 말라는 표정.
“생각이 같은 데 왜 우리가 갈라져 있느냐. 선거 구도를 놓고 설득한 거였지.” 그러면서 “정치적 내전 상태에서는 표가 분산되면 안 돼요. 처음에는 우리 당이 더불어민주당에 지고 있다가, 안 의원이 뛰어들면서 판이 뒤집혔잖소.”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선거 구도를 놓고 김 후보를 지지했던 거요. 무슨 말이냐. 시간이 얼마 없어요. 나라를 바꾸는 데 1년밖에 안 남았어요.”
총선을 기준으로 봤다.
“대통령과 뜻맞는 사람이 파트너가 돼야 해요.”
안 의원은 그런 면에서 “부족하다”고 했다.
“겪어보니까 아까 얘기는 이념이 같다는 거였고 사고의 구조가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야.”
- 어떤 부분에서 말입니까.
“외계인 같아요.”
갸우뚱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김 후보를 택했지. 내게 도와달라며 상향식 공천을 약속했소.”
김 후보는 전당대회 공약으로 상향식 공천을 내걸었다. 당헌당규를 잘 실천하면 된다고 했다. 이를 만든 이가 김무성이다. 새누리당 대표 때였다.
그건 그렇고, 의아한 점을 되물었다.
- 외계인 같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좀 표현하기 어려워요.”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지 멈칫했다.
“안 의원을 돕던 많은 이들이 20대 대선 때 (윤석열과) 단일화해야 한다, 단일화해야 한다 했지요.”
- 네.
“근데 한다는 말이 ‘부인과 딸이랑 상의하겠다.’ 아니, 정치적 동지와 상의해야지. 그렇잖아요? 정치에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서울시장 선거 때도 그래. ‘늬 우리 당에 입당해야 시장 된다.’ 끝까지 말을 안 듣더라고.”
실망한 눈빛이다. 안 의원은 초반 여론조사에서 앞서갔지만,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와의 단일화 경선에서 조직력에 밀려 떨어졌다.
“저평가 이유, 배신자 프레임 때문”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김무성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려면 네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그가 반평생에 걸쳐 독재와 싸워왔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해 13개 학교 연합 시위를 주도했다. 광주 민주화 항쟁에 비분강개해 정치권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스스로도 “민주화 개념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해왔다. “정치는 중간이다. 대화와 타협이다.” 민주적 방법론을 지론으로 삼아왔다.
둘째는 故김영삼(YS)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치를 배워온 상도동계라는 점이다. YS는 수평적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승부사적 스타일이되 중대 사안을 결단하기 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경청했다고 한다. 1985년부터 상도동계에 입문한 그 역시 권위적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셋째 무성 대장이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스케일이 크고 선이 굵은 유형이라는 점이다. 1985년 민추협 사무실을 얻을 때나 통일민주당 당사의 임대료 50%를 내는 등 엄혹했던 시절 막후에서 민주화를 위해 재정적 지원에 나섰다. 입도 무겁다. 작심하고 토로하지 않는 이상 사사건건 부딪쳐 시시비비를 가리는 인물이 아니다.
넷째 선거의 귀재라는 점이다. 킹메이커로서 정권재창출과 정권 탈환에 이르기까지 중도실용주의 노선과 보수통합을 기치로 내걸고 전면에 나서거나 물밑에서 적극 지원한 선거 결과는 모두 승리였다.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는 국민 눈높이 정치를 지향, 스윙보터층의 지지를 이끌었다.
문제는 저평가돼있다는 것이다.
- 밑도 끝도 없는 배신자 프레임 때문이라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
착잡해 보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배신자는 있을 수 없는 얘기요. 정치권에 들어와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이 충성을 다하겠다는 거였어요. 전제군주국가 왕한테나 충성하는 것 아닙니까.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바른길로 가면 그걸 배신자라고 하는 거요.”
- 극복할 방법이 없나요?
“뭘 극복해? 내가 배신자 프레임에 빠져나올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그 프레임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오히려 말해주고 싶소.”
그래야 “우리 정치가 바로 된다”고 강조했다.
- 지금 정부도 배신자 프레임 때문에 우물쭈물하잖아요.
“하하핫….”
당황한 기색.
“잘하고 있는데 어느 땐 다소 그런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긴 하지.”
김무성은 민주평통(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내정됐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배신자로 보는 일부 진영의 반대에 부딪쳐 철회됐다.
“참 한탄스러워. 나 혼자 한 게 아니잖소. 탄핵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니까.”
국정 농단 사태 때 새누리당은 수차례 의총을 열었다. 62명 의원이 탄핵에 찬성했다.
“지금 와서 아닌 척들 행세하는 것 아니오?”
가증스러워했다.
“조원진도 ‘형님 탄핵하면 안 됩니다’하는 전화 한 통화 없었어요. 나한테 매달렸다는데 전부 다 거짓말이야.”
일갈하고는 숨을 몰아 쉬었다.
“그때 친박(박근혜)들이 박근혜 대통령한테 배신감에 치를 떨었어요.”
- 이유가 뭡니까.
“아무도 안 만나주니까.”
최경환·윤상현·홍문종·유정복 등 친박 실세들도 독대란 걸 해 본 적 없고, 문고리 3인방(이재만·안봉근·정호성)들도 대면보고를 못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래놓고 최서원(최순실)을 매주 만나 국가 중대사를 논의했다고 하니 확 뒤집어지지 않았겠소.”
김무성도 박근혜 정부 시절 대면을 해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대표하고는 만나야지. 내가 전화라도 바꿔 달라고 하니까 그조차 안 된데. 허허헛…. 국정이 돌아갈 리가 있나.”
국정 농단 사태 때 광화문 촛불은 뜨거웠다. 야당에서는 앞다퉈 하야를 촉구했다. 당장이라도 끌어내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오죽하면 최경환·정갑윤·홍문종·윤상현·조원진·정우택 등 친박 핵심 8인이 먼저 임기 전 명예로운 퇴진을 건의할 정도였다.
“박 전 대통령도 헌법재판소에 가면 기각될 것이다, 차라리 탄핵 절차 밟기를 원했다니까.”
청와대에서조차 광화문 분노를 잠재우려는 방법으로 탄핵이 논의되고 있었다.
“근데 재판 끝에 8대 0 만장일치로 통과된 결과물 아니오.”
예상외의 결과였다. 비박으로 몰려 철저히 배척당해 왔지만,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그였다. 탄핵 결과를 지켜봐야 했던 순간을 떠올리려니 곤혹스러운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공천학살의 피해자”
김무성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남구을에서 4선, 영도에서 2선을 했다. 정치적 고향은 부산이지만, 출발지를 생각하면 1978년 10대 총선 때 뛰어들었던 포항으로 봐야 한다. 둘째형이 경영하던 동해제강 일을 돕던 중 정치에 꿈을 품고 포항지구당 개편대회 경선에 출마했다. 박정희 측 훼방으로 실패했지만, 전폭 지원해 준 상도동계와 연을 쌓는 계기가 됐다.
YS와의 인연은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다. 민족 교육을 내건 영흥 보통학교 설립자이자 민주당 신파였던 故 해촌 김용주는 신민당 시절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그때 민주당 구파이자 원내부총무가 YS였다.
- 정치역정을 포항부터 보면 50년 가까이 돼갑니다.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어떻습니까.
“정치인은 역사 앞에서 당당해야지. 그때 그 시간 앞에 급급하다가는 더 큰 구렁텅이에 빠진다고 봐요. 내 소신의 정치적 결단으로 역사적 평가를 기다려야지.”
- 차근차근 풀어가 보겠습니다. 19대 총선 때 당에 잔류했잖습니까.
“18대 총선부터 얘기가 돼야 설명이 되는데….”
2008년 이명박 정권 때였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공천을 안 줬어요.”
18대 총선을 앞두고 있던 3월 13일 한나라당에서 영남권 공천 결과를 발표했다. 친박계 50%가 탈락했다. 당시 최고위원이던 김무성도 포함됐다. 전국적으로 초선은 물론 서청원, 홍사덕, 김재원 등 중진들도 무더기 탈락했다. 박근혜 경선 캠프 좌장격을 맡았던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친이계(이명박)와 친박계(박근혜)가 대선 경선 전후로 앙금이 커졌을 때였다. “정적 죽이기” “공천학살이다” “원칙도 기준도 없다”는 아우성이 쏟아졌다. 박근혜 전 대표는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반발했다.
“분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어떻게 지켜온 정당인데 불한당이 들어와 내쫓았다.” 공천관리위원회를 겨누는 듯했다. “반드시 살아 돌아와 이 불한당들을 내쫓겠다.”
15명이 탈당해 친박연대와 무소속으로 출마해 그중 11명이 살아남았다. 낙선자를 포함해 이들 모두는 다시 복당했다. 한나라당은 153명에서 164명으로 늘었다. 정작 분위기는 냉랭했다.
“우리 입당할 때 꽃다발 하나 안 줬어. 과거에는 한 명 입당하더라도 의원 총회 열고 꽃다발 주고 변도 듣고 했는데 인사말 할 기회도 안 주더라고. 기가 막히더라. 아이러니한 것은 나를 제거한다고 공천도 안 주더니 정무장관 맡아 달라, 원내대표해 달라…. 우리 정치의 후진성이지.”
우여곡절 끝에 원내대표는 맡았다. 정치력을 발휘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등 어려운 법안들을 통과시켜 나갔다. “이명박 대통령이 수시로 전화를 줬지.” 신임이 두터워졌다.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이번엔 “박근혜 권력이 또 나부터 죽인단 말이야.”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당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재편됐다. 당명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공천 칼자루를 쥔 친박은 김무성을 탈락시켰다. 2010년 세종시 문제 관련해 다른 입장을 냈던 것이 배제된 원인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 김덕룡-김현철 신당설부터 박세일 대표의 국민생각 합류설 등이 난무했습니다. 돌연 탈당 않고 불출마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덕룡-김현철 신당설은 와전이야. 전혀 사실이 아녜요.”
정정하며 설명에 들어갔다.
# 다음은 김무성 시점. 낙천한 친이계들은 2012년 3월 8일 4차 공천 발표에서 김무성이 탈락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당일이 되자 국회 헌정회 앞 한정식집으로 모여들었다. ‘박세일 당으로 가자’ ‘아니다. 심대평 당이다.’ 분분했다. 심대평 당은 자유선진당이었다. 소위 탈락한 친이계들이 20명 됐다. 심 대표가 사인을 보내오길 공동당대표만 하게 해주면 당명을 바꾸든 뭐든 된다고 했다. 논의 끝에 갈 당을 선진당으로 정했다. 탈당 성명서를 만들고 공천의 부당성에 대해 적어 내려갔다. |
“집에 와서 샤워하고 기자회견하려 했는데 앉아서 생각하니 대통령선거가 일 년도 안 남은 거라.”
심경이 복잡해졌다.
“우파 분열하면 대선까지 실패할 가능성이 보였던 거요.”
재집권이 물 건너갈 상황이었다.
“분열의 씨앗을 내가 만들어서야 되겠나.”
숙고에 들어갔다. 막판에 불출마 선언하고 백의종군을 결심했다.
“스무 명 넘는 친이계 의원들을 일일이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어요. 부둥켜 운 사람도 많아요. 밤새 술 마시고 달래고…. 한두 사람 빼고 다들 출마를 안 했거든.”
불출마를 끌어냈다.
“내가 얼마나 미안했겠어. 박 전 대통령은 그런 걸 모르는 거야.”
서운함이 스쳤다.
“19대 총선 내내 전국 다니면서 지원 유세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총선은 과반 이상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까지의 힘이 축적됐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지.”
김무성은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다. “백의종군해 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미국에 데리고 갔어요.” 13명이었다. “차로 운전하고 다니면서 미국 종주를 했지.”
- 18대 대선에서는 박근혜 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잖습니까.
“대선 때가 됐는데 소위 말해 (박 전 대통령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 모두 능력이 없는 거요. 내가 박 전 대통령한테도 그랬어요. ‘당신 찾아와서 충성 맹세한 사람들 다 문제 있다.’ 무능한 사람들이 대선을 하려고 하니 조직 자체가 안 되는 거요. 정치판도 몰라, 선거판도 몰라. 이대로 가면 진다.”
엉뚱한 곳에서 위기가 생겨났다.
“선거 기구표조차 못 만들었다니까? 회사도 큰 조직, 작은 조직 있잖소. 역할이 중복되면 반드시 싸움이 생기게 마련이야. 내가 싹 다 고쳐버렸지.”
- 박 전 대통령이 뭐라고 하면서 도와달라고 했던 겁니까.
“처음에 와서는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서 여러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합디다. 밤새도록 고민했는데 선대위를 보니 실무가 안 풀리고 있는 거요. 안 되겠다 싶어서….”
# 김무성 시점. 김무성(김) : 실무를 관장하는 총괄본부장을 맡고, 후보께서 대통령 되더라도 나는 어떤 임명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하겠습니다. 박근혜(박) : 아니. 왜 그럽니까. 더 중요한 일을 맡아서 해야죠. 김 : 사심에 가득해서들 후보가 대통령 되면 자기는 무엇무엇 하겠다. 여의도 빈 사무실은 다 잡아놨어요. 이거 안 됩니다. 바로 잡아야 합니다. 박 : 어떻게요? 김 :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어떤 임명장도 맡지 않겠다’ 선언하는 겁니다. |
- 어떻게 됐습니까.
“처음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내가 전화를 딱 끊어버렸어. 조직이 중복되는 것을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소. 욕심들이 가득해서는…내가 쌍욕을 하면서 두드려 잡은 거요. 이번엔 결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거야. 선거 중 제일 큰 게 대선인데 모두 후보한테 결재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 무능한 X들이….”
혀를 찼다.
“후보한테 내가 말했어요. 이제부터 결재 안 올리겠다.”
‘박’은 알아서 하라고 했다.
“대신 밤새도록 결재해서….”
그제야 “확 풀리면서 자전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거요.” 숨을 돌렸다.
“어떤 조직이든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끌고 가는 견인차가 있어야 해요. 악역 담당을 누가 하려 하나요. 솔선수범하니 시비 거는 X도 없지. 확 받아버리니까.”
- 상대방 전략에 대해서도 굉장히 대응을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긴말 안 하고 짧게 공격했지.”
2012년 18대 대선 승리로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다.
“선거 이기고 나는 내 역할 끝났다. 쉬러 간다고 편지 써 붙이고 갔는데 국민들 마음을 많이 흔들었던 것 같아. 실제로 몸을 숨겼는데, 지지 전화가 오질 않나.”
반향이 컸다. 대선주자 김무성이라는 이름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엎드려 있는데, 보궐선거가 있어서 내가 당선됐잖소.”
2013년 4월 재보선이 있던 부산 영도에서였다.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근현대사역사교실, 퓨처라이프포럼 이런 것을 만들어 매주 세미나를 열었소. 지금 생각해도 나에 대해 뭣하나 반박할 일이 없어.”
자신감이 넘쳤다.
“전대 나오자 비박으로 몰려”
- 근데 왜 대선 일등공신인데 다시 또 비박으로 분류된 겁니까.
“난 비박을 한 적이 없어요.”
단칼에 잘랐다.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하고 나오니까 갑자기 비박이 된 거예요. 저쪽에서 다른 사람 내보냈잖소.”
같은 상도동계 뿌리를 둔 친박계 서청원 당시 의원이었다.
“치열한 전쟁이 붙었어요. 없는 말 만들어서 모함하고….”
- 프레임 같은 거였네요?
“그렇지.”
맞장구쳤다.
“박근혜 대통령이 거기에 약한 사람이에요. 귀에 대고 저XX 어떻고 하면 넘어가 버리는 거야. 나는 성격상 잘 찾아가지 않는 사람이고.”
모함과 오해로 멀어졌다고 보는 듯했다.
“내가 당대표 됐을 때 기억할지 모르지만, 박 대통령을 위해 공무원 연금개혁 만들었지. 최선을 다해 선두에 섰습니다. 연금개혁이 박근혜 정부의 최대 치적 아닙니까. 근데도 날 비박이라고….”
섭섭함이 역력했다.
- 전대 당시 서청원 의원과 경쟁했을 때 차라리 한 템포 쉬고 가는 게 어떠냐. 이런 시각도 있었는데요.
“선수나 나이나 대선 때 세운 공이나 딱 내가 나설 적기였어요. 서청원 선배가 원내대표할 때 내가 초선이었소. 나이도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많아요. 그때 나오는 게 아니지. 본인은 국회의장으로 갔었어야지.”
- 그랬으면 (국회의장)됐을까요?
“그럼. 세상이란 게 운입니다. 살고 보면.”
- 설득해보지 그랬습니까.
“나를 안 쳐다보는데 뭔.”
2014년 7월 14일 전대 결과 서청원을 누르고 김무성이 이겼다. 1만 5000표 가까운 압도적 표차였다. 언론에서도 ‘보수 혁신의 아이콘’, ‘무대의 시대가 열렸다’고 떠들썩했다.
- 최고위원 꾸렸을 때 말이죠. 이인제, 서청원 의원 모두 상도동계잖습니까. ‘상도동의 부활을 꿈꿔보자’ 이런 식으로 설득해서 풀어나갈 방법은 없었습니까.
“내가 왜 노력을 안 했겠습니까.”
말해 뭣하냐는 표정이다.
“나는 참 민주적으로 운영했어요. 임명직 최고위원. 두 자리가 있었잖소. 보통은 무조건 내 사람 심어야지. 근데 누구를 했습니까. 이정현 의원 시켰고 안대희 전 대법관 지명했어요. 사심 없이 일했어요. 증명되잖소? (최고위원 선출도) 김태호 의원은 날 팔아서 3등했고, 이인제 의원은 홍문종한테 밀리는 것을 내 조직이 밀어서 4등으로 만든 겁니다.”
- 아. 그랬나요.
“다 내 신세 진 사람들이지. 근데 상향식 공천 당헌당규 개정할 때 싸움이 난 거요. 나를 모욕 주고 그랬지.”
괘씸함이 묻어났다. 18대·19대 공천학살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김무성은 상향식 공천을, 친박계는 전략공천 비슷한 우선추천식 공천을 주장했다.
“공천을 지역 주민들한테 물어야지. 왜 위에서 결정합니까. 나도 당대표하면서 내 마음대로 공천한 적 한 번도 없어요. 단돈 일 원도 받지 않았어요. 지역구 역시 전부 여론조사 시켜서 일등 한 사람 시켰어요. 후유증이 없어. 섭섭함도 없고. 그런데 권력 공천해야 한다고….그거 막으려다가 나하고 싸움이 난 거예요.”
친박계를 겨냥하며 “부정한 무리들이지.”
“도장 갖고 날라? 거짓말”
2016년 20대 총선이 가까울수록 새누리당은 공천 파열음으로 일촉즉발 위기에 놓여 있었다.
“(2016년 3월 24일) 마지막 공천 파동 났을 때 나보고 도장 갖고 날랐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이야. 친박들이 나한테 뒤집어씌운 거예요.”
작심 비판하듯 내질렀다.
“기억해 보라고. 유승민-이재오 다 공천 탈락시켰잖아. 그 자리에 말도 안 되는 사람 집어넣고. 당헌-당규에 심히 위배되는 공천관리위원회 공천을 나는 당대표로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 이 지역은 공천하지 않겠다. 기자회견 하니까 당사무처 직원들이 박수 치고 환호하고 난리가 났어. 나도 내 지역구(부산 영도) 하루라도 갔다 와야 할 것 아니오. 내려갔는데 누가 선거 홍보로 찍어놓은 영상을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도장 갖고 날랐다고 SNS에 퍼뜨린 거요. 그걸로 누명을 뒤집어쓴 겁니다.”
일명 ‘옥새 파동 논란’이 조작된 거라는 얘기였다.
- 해명하지 그랬어요.
“아니라고 했지.”
- 적극적으로 해보죠.
“고발하겠다고까지 했는데도…. 아이고. 그리된 거지.”
손쓸 수 없을 만큼 퍼져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 유승민 전 의원은 그때 어차피 무소속으로 나가려고 그랬잖아요.
“내가 무공천(대구동구을) 했으니까 무소속으로 나갈 용기가 생긴 것이지.”
유 전 의원이 “형님 그때 한 약속(잘못된 공천은 바로잡겠다) 지키시지요” 하자, “걱정 말라.” 거듭 약속했다고 한다. “이재오-유승민한테는 약속 지켰지.” 새누리당에서 두 지역구는 무공천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근데 이 의원(서울 은평을)은 떨어졌지.”
- 20대 총선 때 새누리당이 122석 얻었잖습니까. 처음엔 160석~170석까지 예상했는데요.
“180석 예상했었지.”
정정했다.
- 여의도연구소는 질 것을 이미 알았다고 하던데 맞나요. 폭락하는 것을 어떻게 짐작했습니까.
“공천 파동이 X판이었잖소.”
앞선 얘기와 연결됐다.
“이한구라는 자가 공천관리위원장 딱 되자마자 일성이 기자들하고 간담회 하면서 당대표도 공천을 안 줄 수 있다. 이래 버렸잖아.”
2016년 2월 4일 새누리당은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4·13 총선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이한구 의원을 의결했다.
“또 하나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할게.”
침을 삼켰다.
“공천 신청한 현역의원 중 25군데가 단독신청이었어요. 서울 강서 김성태, 양천 김용태…. 이들이 아니면 당선이 안 되는 지역이야. 1차로 먼저 줘서 전쟁터로 빨리 나가야 해요.” 하지만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래놓고 제일 마지막 날 공천을 준 거 아니오.”
- 이유가 뭔가요.
“나를 물 먹이려고 그런 것이지. 대부분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었거든. ‘맛 좀 봐라.’ 자기들 의도한 대로 볼모로 잡은 것이지.”
지금과 달리 그때는 집단지도체제였다.
“나 혼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
청와대에서 이한구 공관위원장을 보냈을 때도 속수무책이었다.
# 김무성 시점. 김 : 이한구 아니면 누구라도 받겠다. “하는 수없이 (김기춘) 비서실장한테 전화를 걸었어.” 김 : 대통령 만나야겠소. |
“다시 현기환한테 ‘대통령과 전화라도 한 통화하게 해달라.’”
소용없었다.
“그 사이 서청원 선배는 표결하자고 난리야.”
지도부 9명 중 7명은 청와대 뜻을 따르는 데 급급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어쩔 수 없이 받은 거예요. 의결하고 나니 당대표인 나도 명찰 붙이고 면접을 봤잖소.”
칼자루를 쥔 공관위원장은 당대표도 공천심사를 받아야 한다며 경선을 치르게 했다.
“그 같은 공천 파동에 민심이 확 돌아버린 거요.”
- 선거를 치르면서 알게 된 겁니까. 민심이 확 돌아간 것을.
“여론조사해 보잖소. 안 좋아. 현기환이 나한테 전화 와서는 하는 말이 가관이야.”
# 김무성 시점 현기환 : 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이러더라고. 나한테.”
- 왜 그런 겁니까.
“우리 당이 일당이 돼서 뭘 하겠다는 생각보다 박근혜 대통령 퇴임 이후 대구·경북은 살아남으니까 그것만 생각한 거예요. 망할 수밖에 더 있나.”
“반기문 믿고 바른정당 만들어”
2017년 1월 24일 30명 의원은 집단·연쇄적으로 새누리당을 탈당해 신당을 창당했다.
- 탄핵 정국 때 바른정당을 만들었잖습니까.
“….”
- 이유는 뭡니까.
“내가 민주화 투쟁하다가 정치판에 들어오면서 굳은 결심을 한 것이 있었소. 당은 한 정당에만 있겠다. 스스로 약속을 했어. 이걸 어긴 거요.”
신민당 출신인 그는 YS를 따라 본류가 흐르는 길을 걸어왔다.
침통해졌다.
“문재인 권력이 사실상 확정된 날이 언제라고 생각하오?”
물어왔다.
- 탄핵 됐을 땐가요?
“틀렸어.”
- 반기문 총장(전 유엔사무총장)이 대권 포기한 시점인가요?
“아니.”
고개를 저었다.
“차기 권력자가 문재인으로 확정된 날은 19대 총선에서 우리가 2당으로 전락했을 때요. 그날이 문재인 정권 탄생이야.”
단언했다.
“생각해 봐요. 최서원(최순실) 사태 터지고 대선은 다가오는데 우리 당은 후보가 없는 거야. 당시만 해도 ‘홍준표’가 무죄 받을 줄은 아무도 몰랐어.”
김무성이 반기문 전 총장한테 눈을 돌린 이유였다. 보수의 대안이 없었다는 지적이었다.
“내가 볼 때 문재인은 절대 대통령 돼서는 안 될 사람이었소. 선거를 치러야 하니, 박근혜 대통령 보고 탈당하라고 했지.”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박 대통령은 거절했다.
“국민으로부터 질타 받는데 이길 수 있나. 못 이기지. 그때 당은 두 목소리로 갈라져 있었어요. ‘선거에 져도 할 수 없다’ vs ‘문재인한테 도저히 정권 주면 안 되겠다. 죽더라도 나가서 싸우자’”
김무성은 후자였다.
“그래서 바른정당을 만든 거예요.”
계획도 있었다. ‘문’을 이길 대항마로 반기문 영입에 매달렸다.
“근데 끝까지 못 갈 거라는 말들이 많이 있었어.”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보다 못해
“반기문한테 밀사까지 보냈지.”
# 김무성 시점 김 : 당신 끝까지 할 거요? |
“하지만 (국내) 들어와서는 20일 만에 그만둔 거 아니오.”
2017년 2월 1일 반 전 총장은 돌연 정치교체 뜻을 접겠다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내가 판단 잘못했구나 싶었지.”
자책하는 어조였다.
- 대선 중도 포기하는 것을 몰랐습니까?
“몰랐지.”
고개를 저었다.
“자기 비서들도 몰랐다는 거 아냐.”
- 메시지 같은 게 왔다 갔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하고 두 번 만나 장시간 대화도 했는데 이틀 뒤 불출마한 거요.”
- 왜 그랬다고 봅니까. 여러 의혹 때문일까요.
“알 수 없지. 본인한테 물어봐야지.”
- 일각에서는 반 전 총장이 어떻게든 하려고 했는데 바른정당에서 유승민 전 의원이 절대로 중도 포기 안 하려는 것을 알고 물러났다고 얘기하던데 맞습니까.
“바른정당 와서 경선했으면 무조건 됐어요. 새누리당에 있던 충청도 의원들이 1차로 넘어오고 2차로도 다 넘어오게 돼 있었어요. ‘유승민’과 붙으면 무조건 ‘반기문’이 이기지. 경선하면 흥행은 되지 않소. 본선에도 도움이 되거든.”
- 이미 안에서 배수의 진을 쳐서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던데요.
“말도 안 돼요.”
펄쩍 뛰었다. “바른정당을 내가 만들었는데, 내가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유승민’이든 누구든 말이 되는 소릴 해야….” 역정을 냈다.
- 불출마해서 난감했겠습니다.
“내 정치사의 오명을 남긴 거요. 바른정당 만든 것이….”
후회가 여실했다.
- 바른정당 가서 출마했다면 가능성이 있었다고 봅니까.
“왔으면 이길 수 있었어요.”
- 문재인 후보한테요.
“그럼.”
확신했다.
“새로운 프레임이 만들어졌을 거요. 옛날에 민한당 떨어지고, 신민당이 됐던 것처럼 그럴 수 있었어요. 나는 경험해 봤기 때문에 자신 있었소.”
1985년 12대 총선을 한 달여 남기고 YS 중심으로 창당된 신민당은 민의를 등에 업고 돌풍을 일으켰다.
“유승민, 연락 안 한 지 오래”
- 보수 단일화는 왜 안 됐던 겁니까.
“‘홍준표’ 쪽에서 단일화하자 했고, 나도 그랬어요. 근데 (유승민이) 끝까지 말을 안 들었지.”
- 유 전 의원은 왜 그런 겁니까.
“본인한테 물어야지.”
바른정당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김성태 의원 중심으로 열다섯 명이 다시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해 가버렸잖소. 나는 당을 만든 사람인데 갈 수 없잖아. 스무 명 남은 상황에서 유승민 대통령선거 때 열심히 따라다녔지.”
2017년 19대 대선에서 유 전 의원은 6.8%를 얻어 4위에 그쳤다.
“대선 끝나고 지방선거가 있었잖소.”
이듬해 4월 7대 지방선거를 생각하니 암담했다.
“당이 있는데 후보를 안 낼 수가 있나. ‘우파 분열하면 또 진다. 돌아가자.’”
유 전 의원을 설득했다.
“근데 또 말을 안 듣잖아.”
- 유턴했다면 나아졌을까요? ‘보수 회복’이 더 빨랐다고 본 겁니까.
“그렇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를 몇 번에 걸쳐서 했어요. 그때 키스 사건인 생긴 거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여의도) 식당 가서 회식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뽀뽀해’ ‘뽀뽀해’ 이러는 거라. 자꾸 하라니까 했는데 이 XX들이 사진 찍고 밖의 기자한테 보내서는 바로 기사가 난 거야. 다 그쪽(유승민)에서 한 짓이지.”
언론에서는 당의 결속과 화합의 의미를 다지는 취지에서 둘이 입맞춤을 했다고 보도했다. 2017년 9월의 일이었다. 결속은 오래 못 갔다. 2개월 뒤 의총에서 김무성은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8명 의원과 함께 복당했다.
- ‘유승민-이준석’의 배후라고 보는 시각이 있던데요.
“(유승민과) 전화 한 통화 안 한 지 몇 년 됐어. 김종인과 이준석은 4·7 재보궐 단일화 방해했을 때 내가 얼마나 비판을 많이 했나. 20대 대선 때도 당대표(이준석)가 나서서 우리 후보(윤석열)를 디스해 표가 떨어졌다고 봐요. 누구는 나더러 권성동·장제원(친윤) 배후라 하고, 유승민·이준석(반윤) 뒤에 있다고 하니 이 두 개가 상충되는 말 아니오.”
- 실제 권성동·장제원 의원과는 친하지 않습니까.
“친하지만 내 말을 듣나? 원래 권력이 붙어있으면 눈도 안 보이고 귀도 멀게 돼 있는 거요.”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화제를 돌려 최형우 전 의원(6선·정무·내무부 장관 역임)에 대해 꺼냈다. YS 오른팔 최형우는 신한국당 대선 경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권이 요원해갈 무렵 민정계 이한동 당대표 내정설이 돌았다. 상도동계에서 대권, 당권 모두 놓칠 듯했다. 김무성은 최형우를 찾아갔다. 대권 말고 당권으로 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 그 얘기를 두고 YS나 차남 김현철(동국대 석좌교수)의 뜻이 아니었냐는 추측이 있던데요.
“누구의 뜻도 아니요. 아무하고도 상의 없이 나 혼자 한 거요.”
곧바로 “나는 진짜 최 선배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라고 토로했다. “생각해 봐. (청와대에서) 민정계 이한동을 당대표 시킨다는데 내 보기엔 최 선배가 당대표 적임자였던 거지. 당대표도 안 되고 대권도 안 되면 그럼 뭐야. 불확실한 대권보단 확실한 당권으로 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만큼 내가 최 선배와 가까워요.”
- 대권 포기하고 잘 정리 정돈해 당권으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안정적이었겠지.”
- 역사가 바뀌었겠네요.
“….”
고개만 끄덕였다.
대권 행보를 멈추지 않던 최형우는 무리가 왔는지 건강 이상신호를 보였다. 1997년 3월 11일 오전 8시 50분경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쓰러졌다. 뇌출혈이었다. 당대표가 됐다면 킹메이커로 나서며 신한국당도 정권재창출에 성공하지 않았겠냐, YS계는 물론 대통령 재평가도 나아지지 않았겠냐는 아쉬움이 있어왔다.
- 본인도 대통령까지 거의 왔었는데 안 됐잖습니까. (새누리당 시절 김무성은 28주 연속 대선주자 1위를 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내 손으로 만들고, 탄핵시켰으니까…. 나는 거기에 대해 내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거요.”
돌아보면 친박에서 비박으로 되풀이되며 내몰린 것 모두 본인 의지와는 거리가 먼 듯했다. 그 자리 그대로인데 상대만 가까워졌다, 멀어진 느낌이다. 신의와 헌신, 반목과 애증, 회한이 뒤엉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70대 넘어 선출직에 나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의 나이 올해 71세.
-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선출직이 낫지 않습니까.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요.”
초연했다.
“지금처럼 선거 때마다 바른 방향으로 가려는 후보들 있으면 돕는 일이나 해야지.”
어느덧 시선은 내년 총선을 향해 있었다. 정권 탈환을 부르짖던 때를 지나 정권재창출을 노래할 기세다.
마포포럼 세미나는 매주 열린다고 한다. 또 가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