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신 그날은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이순자의 하루]
제발 죽음에도 차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순자 자유기고가)
지금으로부터 61년 전이다. 엄마는 마흔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병명은 산후풍이었다. 100일 전 아들을 낳고 100일 후에 돌아가셨다.
그때 아기는 엄마가 낳자마자 저세상으로 갔다. 엄마의 슬하에는 4남매가 있었다. 딸 둘, 아들 둘이었다. 제일 컸던 언니 나이가 스무 살, 여동생이던 내 나이가 15살, 남자 큰동생이 10살, 막내 남동생은 5살이었다.
돌아가신 날은 양력으로 4월 13일, 음력으로는 삼월 초하룻날이었다. 새벽 4시에 엄마는 가래 끓는 소리가 멈춤과 동시에 숨을 거뒀다. 딱 석 달 열흘 앓다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엄마는 몸의 반쪽이 심하게 부었음에도 병원 진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다만 사십 리 밖에 있는 한의원에서 지어오는 한약이 전부였다. 그것도 의원이 매일 진맥을 하고 짓는 것이 아니었다. 약 지으러 간 스무 살 사촌 오빠의 말만 전해 듣고 지어준 것이었다. 근방에서 무척 유명한 의원이었다.
엄마의 간병은 친언니가 했다. 약을 달이고 미음을 끓여 누워계신 엄마에게 숟가락으로 떠 넣어 드리는 게 다였다.
우리 집은 돈이 없었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세 살이 적었는데 하필이면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면장으로 있다가 쫓겨났다. 5‧16 세력이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을 때였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전국의 모든 수장 자리를 군인들로 꽉 채웠다. 차라리 아버지가 면장이 아닌 일반 면사무소 직원이었더라면 쫓겨나지 않았을 터다. 불행히도 면장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물러난 것이다.
엄마가 병석에 눕고 한 달 만에 살던 집을 팔았는데 그것도 외상으로 넘겼다. 지금에야 이해 안 갈 수 있지만, 그때는 집이든 땅이든 외상으로 파는 일이 가끔 있었다. 돈 한 푼 못 받고 부면장에서 쫓겨난 데다 집마저 외상으로 팔았으니 역시 돈 한 푼 없는 빈털털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팔아먹을 땅도 한 평 없었다. 할아버지가 물려준 전답이 꽤 있었지만 5‧16 발발 전 자유당 이승만 정부 때는 농산물 가격이 똥값이었다. 땅값도 헐값이어서 농촌의 땅 가진 사람들 삶이 녹녹지 않았다.
아버지는 삼형제였다. 큰아버지는 농군, 둘째아버지는 법률가였다. 막내인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당시 공무원 급여가 얼마나 적었으면, 아버지가 타는 돈으로는 양쪽 큰집 세금 내기도 빠듯했다고 했다. 큰댁에는 연달아 큰일이 터지기 일쑤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사촌 언니들 출가에 사촌 큰오빠 결혼식까지 모두 그 경비를 내 아버지께서 전‧답을 팔아가며 충당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아버지 스스로 기꺼이 도운 일이었다. 큰댁들이 쓰러지게 놔둘 수 없다면서 본인 소유의 땅을 판 거였다. 인정이 원체 많고, 형님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던 분이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엄마가 들려준 얘기였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암튼 이런 이유로 엄마가 아팠을 때는 정작 팔아먹을 땅이 한 평도 없던 것이다.
우리 집은 당시 시세로 35만 원에 팔렸다. 보통의 시골집값이 1~2만 원에서 비싸게는 5~6만 원 할 때였다. 10만 원짜리도 드물었으니 35만 원이 꽤 큰 가격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에 이끌려 외상으로 준 것이니 아무리 큰돈인들 아버지와 식구들은 한 푼도 만져 보지를 못했다.
아름드리나무로 지어진 우리 집은 강상면에서는 제일 좋은 집이라고들 했다. 외상으로 사 간 이가 기존 집을 개축해 모양새는 더 좋아졌다. 언젠가 한 번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 집 앞을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며 눈물이 났다.
외상으로 우리 집을 사 간 사람은 서울에서 소문난 노름꾼이었다. 본부인은 강상면 오추게에서 필육(옷감) 장사를 했다. 양평 장날이면 언니나 내가 그 필육 난점에 가서 집값으로 푼돈을 받아다가 썼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해서 엄마는 돌아가시고, 당신의 장사가 시작됐다. 그때 우리는 큰댁의 작은 사랑방에 살았었는데 작은 대문이 있는 문간방이었다. 집안 어른들이 멍석을 깔고, 나와 언니는 그 위에 앉아 통곡했다. 너무 울어서 목이 꼭 잠겨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러다 목이 조금 틔면 또 울었다.
남동생들은 철모르고 놀기 바빴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열 살 먹은 남동생이 우리가 우는 멍석 끝에서 딱지치기했던 것과 다섯 살 먹은 막내가 그 주변에서 제 또래의 어린이와 씨름 한판을 하는 광경이었다. 돌보고 키워준 엄마가 숨을 거두고 시체가 돼 누워있는데 세상모르는 어린 아들들은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것이다.
그때 내가 다니던 학교의 반학생들이 조의금을 갖고 찾아왔다. 나는 양평중학교 2학년 1반 부반장이었다. 조의금을 가지고 온 학생들은 반장을 비롯해 네 명의 친구들이었다. 반 아이들은 엄마 빈소에 절도 하지 않은 채 조의금 봉투만 불쑥 내밀고는 그대로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울면서 반 아이들을 배웅했다. 나 역시 고맙다는 말도 한마디 할 줄 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목이 좀 틔면 엄마의 빈소 앞에서 곡소리를 내다가 나도 모르게 우연히 대문 밖 동네 어귀를 쳐다봤다.
엄마가 돌아가신 그날은 유난히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하이리 우리 동네 야산에는 진달래꽃이 엄청 많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야. 어느샌가 조문 왔던 반 아이들이 진달래꽃을 한 아름씩 꺾어 안고는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가고 있지 않은가?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기가 막혔다. 반 아이들이 진달래를 한 아름씩 가슴에 품고 춤을 추며 가는 것을 원망하듯이 자세히 바라봤다.
‘저게 뭐야. 반 친구는 졸지에 엄마를 잃고 목 놓아 슬피 울고 있는데 저 애들은 뭐가 그리 좋아서 남의 동네 진달래를 한 아름씩 꺾어 저리 좋다고 껑충거리면서 뛰어가고 있을까.’
어이가 없어 절로 눈을 흘겼다. 만약 그 반 아이들이 가까이 있었다면 일일이 붙잡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이내 아이들은 동네 어귀에서 사라졌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멍석 위에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배신감이 들었다. 아주 큰 배신감이었다. 진달래꽃에 반해서 친구의 슬픔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반 친구들…. 그들은 양평읍에 사는 애들이었다. 물론 읍내니까 바로 가까운 곳에 진달래꽃은 없었겠지…. 억지로 이해도 해보았다.
그렇다고 엄마 잃고 슬피 울고 있는 반 친구를 바로 등 뒤에다 두고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진달래를 한 아름씩 꺾고는 히죽거리며 갈 수 있느냔 말인가. 예의가 없는 건가, 정이 없는 건가? 아무리 해도 서운함과 원망이 가시지 않았다.
이미 다 지난 61년 전 일이다. 나는 이제 나이가 78세나 되었고 만으로는 77세다. 그런데도 그 일들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너무도 생생하다. 나와 언니가 울고 있는 멍석 위에서 딱지치기하고 씨름 놀이하던 남동생들 모습까지 말이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죽음의 저편에는 정말 영적인 세계가 있기나 한가. 그리고 죽음은 왜 차례를 밟지 않을까?
엄마는 불과 마흔네 살. 꽃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으로는 마흔두 살이다. 왜 그리 젊은 나이에 빨리도 갔을까? 설마 자식새끼 사남매보다 진달래꽃이 좋아서 꽃길 따라가신 것은 아니겠지?
엄마도 진즉에 큰 병원에서 진료받았다면 더 오래 살아 계셨을지 모른다. 원망스럽다. 다 원망스럽다. 죽음이 원망스럽다. 제발 차례대로 세상에 태어나듯이 죽음에도 차례가 있었으면 좋겠다.
※ 시민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이순자 씨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사는 77세 할머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