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대표 연임을 許하라 [기자수첩]
비례대표 책무보다 지역구 선거에 관심 쏟을 수밖에 없는 구조…취지 살리려면 연임 가능성 열어 놔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6월 14일 국회 대정부질문.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야 의원들이 한 마음으로 질의자를 칭찬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주인공은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 이날 김 의원은 시종일관 차분한 어조로 장애인 문제에 대한 제도적 맹점을 지적했습니다.
마무리 발언에서는 어항 크기에 따라 몸집이 달라지는 물고기 ‘코이’를 예로 들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약자의 성장을 가로막는 다양한 어항과 수족관이 있다. 정부가 더욱 큰 강물이 되어주길 기대한다”고 당부했습니다. 김 의원의 발언에, 여야 의원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박수를 보냈습니다.
언론은 ‘비례대표의 모범 사례’라며 이 일을 다뤘습니다. ‘비례대표 축소·폐지론’의 반대 논거로 김 의원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김 의원의 질의를 지켜보면서, 조금 다른 의문을 갖게 됐습니다. ‘왜 선거 때마다 47명씩이나 탄생하는 비례대표 가운데, 김 의원 같은 모범 사례는 자주 나오지 않는 걸까?’
비례대표 출신으로 지금은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전직 의원, 비례대표 의원실에서 일했던 전직 보좌진 등을 만나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비슷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지금 같은 시스템에서는 훌륭한 비례대표가 나오기 어렵다. 김 의원은 일종의 아웃라이어(outlier·평균치에서 크게 벗어나 다른 대상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사례)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례대표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제도권 진입이 어려운 각 분야 전문가들이나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국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도입됐습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비례대표’란 전문성을 십분 발휘, 자신이 대표하는 직군·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의정활동을 수행하는 사람일 겁니다. 김 의원이 칭송받는 것도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어서일 테고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비례대표 의원들이 ‘전문성을 살린 의정활동’을 펼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능하거나 불성실해서가 아닙니다. ‘시간’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데이비드 메이휴는 자신의 저서 <의회, 선거 커넥션>에서 “재선(再選)은 모든 의원들에게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목표들을 그려보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목표다”라고 썼습니다.
국회의원이라면 재선을 노리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개인적 욕심도 욕심이지만, 정치인으로서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과 국회의원이 갖는 권능(權能)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비례대표도 예외는 아닙니다. 자신이 대표하는 유권자들의 기대를 등에 업은 입장에서, 재선은 꼭 이뤄야만 할 과제죠.
문제는 ‘비례대표 연임’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습니다. 법이나 당헌·당규로 막고 있지는 않지만, 관행적으로 사실상 금지되고 있죠. 따라서 비례대표가 재선을 원한다면 지역구로 나가야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의정활동에 적응해 전문성을 발휘할 만 하면’ 차기 총선에 대비한 ‘지역구 밭갈기’에 나서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즉, 지금은 ‘비례대표 역할을 제대로 하고 4년 후 국회를 떠날 것인가’와 ‘일단 재선을 위해 지역구 활동에 더 힘을 쏟을 것인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김 의원 같은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면 대다수 의원들은 후자를 고를 공산이 크고요. 당연히 비례대표 무용론(無用論)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때문에 제도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비례대표 의원들이 연임할 수 있는 방안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례대표로서 높은 평가를 받을 경우 연임이 가능하다면, 당초 목적대로 사회적 소수자를 대변하고 전문성을 살려 의정활동을 펼칠 유인도 커지니까요. ‘제 할 일을 하는 비례대표’가 희귀한 시대에, 우리 정치권이 한 번쯤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