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택 “YS ‘통합’으로 선거승리 이끈 후 직선제 쟁취” [풀인터뷰]

강원택 서울대교수 YS “독재 이외 세력 하나로 함께 가자”로 뭉쳐 “야권 후보, YS·DJ 단일화했어도 승리 장담 못해” “1987년 대선은 ‘민주 대 비민주’ 아닌 지역주의”

2023-11-18     김자영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 슈나이더는 ‘근대 민주주의는 정당과 관련하지 않고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유신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에 나서며, 차기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굳혔다.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양김 씨는 정당을 만들어 대권에 도전했다. 

양김 씨가 정당을 창당한 경우는 크게 다섯 번이다. 신민당(85년), 통일민주당(87년), 평민당(87년), 민자당(90년), 국민회의(96년) 등이다. 그중 신민당은 12대 총선 직전에 창당된 정당으로, 민주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었다. 

강원택 교수는 학자로서 민주화와 관련해 학문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는 연구를 이어오고 있다. 올해 초엔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시사오늘>은 강 교수가 생각하는 민주화의 의미와 정치의 역할이 궁금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양김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추석 연휴 직후인 지난 10월 4일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연구실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민주화, 혁명 아냐…민추협·신민당 역할”
“권력 잡은 586 세대, 미화되고 영웅시 돼”


강 교수는 정치권이 ‘민주화’를 수없이 부르짖었지만 정작 그 시기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고 짚었다. 6·29 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구체적 절차를 살피기보다 ‘군부 독재 전두환 체제에 대한 저항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1987년 체제의 기원을 살피다 2·12 총선에 주목하게 됐다.

- 38년 전 선거를 다시 연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1987년 민주화가 어떻게 됐지?’라는 질문에 다수의 답은 이렇죠. ‘활발한 시민운동, 학생운동, 노동운동이 이뤄졌고, 거기에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준 결과‘라고.”

강 교수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도 단순화된 설명이에요.” 당시 독재에 저항하던 소위 586세대가 2000년대 초반 권력의 중심에 들어온 뒤 그들의 투쟁이 미화, 영웅시되는 측면이 생겼다는 지적도 더했다.  

“한국의 민주화는 혁명적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6월항쟁에서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온 결과로 이뤄졌지만, 1987년 체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민주화추진협의회, 신민당이라는 정당의 역할이 있었어요.”

강 교수는 저서 ‘87년 헌법의 개헌 과정과 시대적 함의’(2017)에서 6·29 선언을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운동 세력 간의 타협’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민주화의 요구는 거셌지만 권위주의세력을 ‘타파’할 만큼 강하지 못했고, 권위주의세력 역시 민주화운동세력의 도전을 억압할 수만은 없었다”는 설명이다. 

 

“6월항쟁 만들어낸 중심은 YS와 DJ” 
“신민당 선거승리로 직선제 기폭제”


강 교수는 또한 YS와 DJ 두 사람이 없었으면 ‘한국의 민주화가 됐을까’라는 의문이 든다고 했다. “신민당이 던진 ‘대통령 직선제’는 제한적 목표였지만 다수의 동의를 얻는 의제였고 많은 이들이 호응했습니다. 운동권 학생·재야 단체가 들어오며 연대의 힘으로 6월항쟁까지 갈 수 있었단 말이에요. 그걸 만들어 낸 건 두 사람이죠.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1980년대 전후 정국은 혼란했다. 10·26 사태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권력에 공백이 발생했다. 하지만 박정희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 그가 만들어 놓은 제도, 제도 내 인물, 작동 방식은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정국을 끌어나갈 만한 힘은 여전히 유신체제에서 형성된 집권 세력에게 놓여있었다. 게다가 당시 김영삼·김대중을 필두로 하는 민주 세력은 분열돼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며 YS·DJ 등 다수의 야당 인사가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계엄 선포 직전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했고, 김영삼에겐 가택연금 조치를 가했다.  

전두환은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12대 대선 한 달 뒤 치러진 11대 국회의원 선거는 대다수 기성 정치인들이 규제로 묶여있는 상황에서 진행됐다. 전두환 정권은 선거 직전 여당인 민주정의당을 급히 창당했다. 야당인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은 보안사령부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제조’됐다. 

그때 홀로 국내에 남아있던 YS는 1983년 5·18 민주 항쟁 3주기를 맞아 단식 투쟁이라는 사즉생의 결단을 내린다. 미국에 있던 DJ는 <뉴욕타임스>에 ‘김영삼의 단식 투쟁’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하고 워싱턴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YS를 지지했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계와 김대중계가 서울의 봄과 함께 분열된 이후 처음으로 힘을 모았다.

12대 총선 참여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건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공식 발족한 뒤다. 당시엔 민추협 내에서도 참여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반대하는 이들은 승리 가능성이 작고 ‘총선 참여 자체가 전두환 정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란 이유를 들었다. 총선 참여를 적극 주장한 것은 김영삼 쪽이었다. 

강원택

- 2·12 총선 참여 여부를 두고 의견이 갈렸습니다. 

“YS와 DJ의 정세 판단이 달랐을 겁니다. 당시 DJ는 미국에 있었는데, 자신의 관계자들이 있는 민한당을 활용하자고 했습니다. YS는 변화의 요구가 있으니 새 당으로 가자고 주장했고. DJ는 총선이 한 달여 남은 상태였으니 스케줄로 봐도 빠듯하다고 봤을 겁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두 사람의 스타일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DJ는 생각이 많고 진지하고 신중했던 반면 YS는 정치적 감이 왔을 때 돌파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강 교수는 2·12 총선과 관련해선 “YS 감을 특별히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거 직전까지 대부분 사람은 신민당의 선전을 예상하지 못했다. 제3당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은 관제야당 대신 체제 저항적 선명 야당인 신민당의 손을 들어줬다. 

“2·12 총선 결과를 살펴보면 신민당이 대도시에서 거의 다 이겼거든요. 이미 변화의 요구가 있었던 겁니다.”

- 어떤 요구였나요.

강 교수는 12대 총선이 도시화, 중산층과 고등교육 이수자의 증가 등을 비롯해, 신민당이라는 제도권 정당과 학생·재야 등 제도권 밖의 저항 세력 등이 모두 합쳐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중산층은 안정을 회고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크면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기 마련입니다. 다량의 정보가 유통되고, 교육 수준도 높아지면 권위주의적 정권의 정치적 억압에 대해 비판 의식이 높아집니다. 한편으로 광주 항쟁을 경험하며 군부에 대한 저항감이 굉장히 커졌고, 관제야당은 믿을 수 없고. 이런 모든 상황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강 교수는 “이것을 촉발해 낸 것은 신한민주당”이라고 강조했다. “YS와 DJ 중 한 사람만 있었다면 그만큼의 폭발력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현장에서 현실적인 면은 YS가 끌고 나갔고, DJ도 미국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했죠.” 

이 과정에서 그가 주목한 것은 ‘통합’이다. 

“신한민주당을 만들 때 민추협 세력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이철승을 비롯한 비민추협 세력도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유신 체제 당시 신민당 시절 김영삼과 완전히 등졌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YS가 같이 하자고 해서 함께 한 겁니다.

대단한 거죠. ‘독재 이외의 세력은 하나로 집결해라. 같이 가자’라는 이 메시지가.” 

신한민주당의 부상은 직선제 개헌 천만인 서명 운동으로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추진된 서명운동은 국민에게 커다란 지지를 얻었고, 전두환 정권에 상당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2·12 총선에서 결집한 민심은 1987년 6월 항쟁, 6·29 선언을 통한 민주화 쟁취에 영향을 미쳤다. 

 

“1987년, YS가 DJ 였다면 역시 탈당했을 것”


YS와 DJ는 신민당·통일민주당까지 함께 했지만,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길이 갈렸다. DJ는 민주당을 나와 평민당을 차렸다.

- YS가 세력을 키우는 식으로 정당 활동을 했다면, DJ는 민주당을 나와 평민당이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는 등 독자적인 정당을 만드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두 사람의 정치참여 방식 차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건 정치 스타일의 차이라기보다 그들이 처한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만약 그때 YS가 망명을 가 있고, DJ가 국내에서 YS 같은 역할을 했다면 YS도 탈당했을 수 있죠.”

- DJ가 평민당 창당 대신 통일민주당 안에서 YS와 경선하는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나요. 

“당시 YS가 당 총재를 맡아 당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DJ는 YS와 경선하면 진다고 판단한 것으로 봅니다. 들러리 서기 싫으니 따로 살림 차리겠다고 나간 거죠. YS나 DJ 모두 수백만 표 되는 고정 지지층이 있지 않았습니까. 나가도 그 표에 다른 표를 얹으면 1등 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분열해서 진다고 생각했으면 갈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강 교수는 어찌 됐건 “서로 판단을 잘못한 것”이라고 논란(?)을 종결했다. 강 교수는 예상외의 질문도 던졌다. “둘이 합쳤으면 이길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기자는 ‘두 사람을 지지하는 이들의 표를 민주화 지지자의 표라고 본다면, 그 표가 노태우·김종필에게 갈 확률이 낮지 않냐’고 물었다.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1987년 선거에서 민주 대 비민주 구도는 아무 의미가 없었어요. 지역주의로 쏠렸죠.”

그는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논문 내용을 소개했다. “DJ로 단일화한 뒤 DJ와 노태우가 붙었다면 지역주의가 작동 안 했을까요? DJ에게 꼬리표로 붙어있는 색깔론을 불편하게 본 사람이 많았다면 단일화해도 이기지 못했을 수 있죠. YS로 단일화했다면 DJ로의 단일화보다 가능성은 높았겠지만, 실제 결과는 알 수 없는 거죠. 가정이기에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단일화했으면 저절로 이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강원택

- 두 사람의 정당사를 통합이나 분열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현재 정치를 두고 이야기해 봅시다. 지금 누가 탈당해서 새로운 정당 만들 수 있습니까?” 역질문이었다. “정당을 만들 수는 있겠죠.” 만들되 성공은 못 할 거란 말로 들렸다. 

“탈당해서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죽으나 사나 그 사람을 지지하는 굉장히 많은 수의 고정된 지지층을 가진, YS·DJ·JP 정도 되는 사람들이었기에 정당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강 교수는 되려 현재 거대 양당이 똘똘 뭉쳐있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지금은 다당제가 바람직하다 싶은데, 당이 분열 안 되지 않습니까. 당 만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는 두 사람 모두 정당을 만들 역량이 있었던 정치인이었던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YS·DJ는 결국 이후 각각 14대·15대 대통령으로 나란히 취임한다. YS는 1990년 1월 노태우·김종필과 함께 연단에 서서 ‘3당 합당’을 선언했고, DJ는 1997년 대선에 앞서 김종필과 DJP 연합을 강행했다. 두 사람의 선택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나 ‘3당 합당’은 충격이었다. 

 

“YS, 3당 합당 안 하면 1987년 대선 반복 판단” 


두 사람이 대권으로 향하는 길의 차이점을 묻는 기자에게 강 교수는 “YS는 3당 합당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이걸 왜 했을까?”라고 되물었다. 

강 교수가 되짚어 본 당시 YS의 생각 회로는 이렇다. 

“5년 뒤에 어떻게 될까? 나(YS)는 무조건 대선 나간다. 그럼 DJ는? DJ도 나온다. 민정당에서도 한 명 나온다. 그럼 1987년 선거와 1992년 선거 구도가 똑같네. 나와 DJ는 비슷하게 표를 나눠 가질 것이고. 노태우 아닌 다른 민정당 후보가 나머지 표를 가져가면 민정당 후보가 당선될 것이다. 이 구도를 깨려면 참여하는 후보자 수, n을 줄여야 한다.”

“YS가 그린 그림은 통일민주당에서 경선을 통해 후보를 뽑는 것이었겠지만 DJ는 진다고 판단하고 그 판에 안 들어간 것이고, YS 입장에선 DJ와 단일화하면 제일 좋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그렇다면 단일화할 상대는 하나만 남습니다” 

그런 현실적 판단하에 YS가 ‘3당 합당’을 선택했다는 게 강 교수 설명이다. 1988년 총선으로 4당 체제가 형성됐고,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국면으로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은 민정당과 평민당에 이어 제3당 지위에 머무르게 됐다. 노태우는 여소야대 국면을 탈피해야 했고, 김영삼은 차기 대선을 향한 경쟁에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다른 방편을 모색해야 했다. 김종필의 민주공화당은 4당 중에서도 제일 소수 정당이었다. 

“물론 YS 입장에서 모험이죠. 민정당이 대통령 후보 만들어 준다는 보장은 없는 거예요. 자기가 쟁취해야 했던 거죠. 결과적으로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던 게 나중에 행동으로 보여지죠.”

노태우는 DJ와 합당도 고려했다. 얼마나 진지한 고민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안도 했었다. DJ는 거절했다. 

- DJ는 YS가 차마 3당 합당이라는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 본 걸까요.

“그 생각 못 했겠죠. 못했을 것 같아요. 당시 DJ의 평민당이 제1야당이었어요. DJ 입장에선 제1야당 대표로 있는 게 괜찮았단 말이에요. 그러다 뒤통수 맞은 거죠.”

- 3당 합당의 충격이 다른 연합보다 컸던 이유는 뭘까요?

“일단 두 가지입니다. 유권자들이 1988년 총선을 통해 4당 구도를 만들어 준 거잖아요. 유권자 입장에서 2년도 안 돼서 인위적으로 이 구도를 뒤집느냐는 불만이 있을 수 있죠. 각각 따로 있길 바랐는데, 엘리트들끼리 모여 정계 개편을 한 것에 대해. 

또 민주화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잖아요. 사람들 사이에선 민주화 운동 대표 세력이었던 김영삼·김대중의 정당이 군부 권위주의 후계자인 노태우의 민정당과 절대 하나가 되기 어려운 정당이란 인식이 컸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 정치로 봤을 때, 게임의 룰은 6·29 선언 이후 바뀌었다. 민정당 입장에서 6·29 선언은 공정한 경쟁에 의해 권력을 추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여러 면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1987년을 기점으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지역주의로 넘어갔다. 

“당시에 비판이 컸지만, YS로서는 대단히 현실적 판단을 했다고 봅니다. 만약 DJ도 심각하게 그 사안을 먼저 고민했더라면 지지받을 수 있었겠죠.”

- DJ는 같은 고민을 정말 안 했을까요. 

“4당 체제로 쭉 갈거로 생각했을 겁니다. 변화 가능성이 있다면 움직였겠죠. 나중에 이 사건이 DJ에게도 영향을 주고 DJP 연합까지 가게 한 것 같아요. 힘을 합칠 수 있다면 합쳐야겠구나 하는. 사실은 똑같이 한 거죠.”

- 합당의 주목표는 다른 어떤 이유보다 대권이었던 걸까요. 

“대권이죠.” 즉답했다.

순진한 발상일 수도 있겠지만 물어봤다. 

- ‘군정 종식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어서 3당 합당을 선택했다’ vs ‘대권 등 여러 이해관계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두 가지 중 YS가 후자를 더 우선했을 거라고 보나요. 

“대통령되고 싶은 게 우선이었겠죠. 물론 정치인이 내세우는 명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명분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어떤 희생,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걸 계속 밀고 나가려는 의지가 필요한데, 김영삼과 김대중 모두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해서는 그런 모습을 보여줬죠.”

“”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했기 때문에 민주화를 위한 노력을 안 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DJ도 마찬가지고. 민주화 이후 환경에서 YS는 일차적으로 권력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다만 ‘권력을 잡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의 집권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고민은 당시에도 명확했던 것 같아요. 문민정부에서 볼 수 있죠.”

강 교수는 “군 척결 문제나 금융실명제는 사전에 준비됐던 것 같다”고 전했다. 정치화된 군의 탈정치화 작업, 또 한편으로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정경유착·부정부패 등 문제를 가장 밑바닥부터, 금융실명제로 해결하겠다는 의도가 있었다는 얘기다. 

문민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일환으로 전두환·노태우를 구속,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가능하다’는 선례를 남겼다. 

“전·노 구속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을 갖고 행한 것 같지는 않지만, 거쳐 가야 할 일을 잘 거쳐 갔다고 생각합니다. 금융실명제로 노태우 비자금이 나타났고, 지지율 문제도 있었고. 여러 요인을 고려해 돌파한 거죠.”

다시 3당 합당 이야기로 돌아갔다.

- 당시 민정당·민주당·평민당·공화당 4당을 이념 측면에서 구분해 본다면 어땠나요. 이질감이 없었나요. 

“나는 4당 모두 보수정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02년 노무현 등장 전까지 한국 정치에선 이념적 차별성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학계나 언론에서도 그전까지는 정당의 정책적 차별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YS는 초기 민주당 구파, DJ는 신파였고 더 내려가면 한민당이 있잖아요. 그 뿌리라는 게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념 면에서 정당 간에 상당한 유사성이 있었습니다.

다만 DJ는 유신 이후 반독재 투쟁을 하면서 밖에 있었고, YS는 제도권 정당 안에 있었죠. 그때 DJ는 재야인사들과 교류하며 가까워졌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이념적으로 진보적 색채를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전체적으로 DJ까지는 보수정당이었다고 봅니다.”

- DJ가 제도권 밖에서 재야인사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김영삼은 줄곧 제도권 안에서 활동한 의회 민주주의자였고요. 이 차이는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비롯된 건가요. 

“그렇죠. 1971년 대선에서 진 뒤에 DJ가 국회의원이 됐죠. 그런데 유신이 선포되고, 국회는 해산됐고. DJ는 국내에 들어오면 잡힐 가능성이 있으니, 일본에 머물면서 반독재 투쟁을 한 겁니다. 미국도 다녀왔고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YS는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국내에 있었고, DJ는 사형선고 받고 죽을  뻔하다가 미국으로 망명을 갔죠. 두 사람의 정치적 역정이 달랐습니다. 두 사람 성향 차이도 있겠지만 (정치 참여) 방식의 차이를 만들어 낸 건 환경의 차이에 있을 것 같습니다.”

 

“DJ, 3당합당에 위기의식…진보성 강화”
“DJ정당과 노무현 열린우리당 완전 달라”


강 교수는 정당간 이념적 거리가 벌어진 것은 3당 합당 이후라고 말했다. 

“DJ가 살아남아야 하니까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거죠. 호남 대 비호남 지역 구도로 가면 확장성이 없잖아요. 호남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 호남 정당으로 가면 당이 쪼그라드는 것으로 봤겠죠. 여기에 재야인사를 불러들이고, 틀 내에서 진보성을 강화하기 시작하죠. 그 진보성이 2002년 이후 나타난 정도의 급격한 변화는 아니고, 나름의 상대적 진보성을 DJ가 보여준 거죠.” 

“3당 합당과 함께 정치적으로 위축된 김대중은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지역주의적 이원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세력과의 연대 및 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상대적으로 이념적 진보성을 강화해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성의 강화가 계급 정치적 속성을 지닐 정도로 이념 공간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적 정치  맥락에서  정당  간  의미  있는  이념적  차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강원택, ‘3당 합당과 한국 정당 정치’, 2017. 

강 교수는 “DJ 정당하고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 어떤 점이 특히 다른가요. 

“DJ가 보수적인 틀 내에서 온건한 개혁을 추진했다면, 노무현 이후 이뤄진 변화는 과격하다고 할 만큼 진보적이죠. 당시 정치적 맥락으로 보면요.”
DJ의 대권 도전기로 돌아갔다. 

- DJP연합은 3당합당만큼의 논란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뭐라고 보시나요.

“우선 한번 해봤잖아요. JP를 과거 5·16쿠데타의 배후 조종자이고 박정희 뒤에서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그건 옛날이야기가 된 거죠. 상황이 바뀌었고, 바뀐 상황에 적응해서 지역주의 정당이 합쳐진 겁니다. 나는 3당 합당, DJP연합 둘 다 잘 된 거라 봅니다.”

1985년부터 2000년대 초반 상황을 짚어가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2003년 또 한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로 참여정부가 들어섰다. 3김은 자연스레 정치 무대에서 뒤로 물러났다. 그 이후 세 차례에 걸친 권력 교체가 이뤄졌다. 1987년 체제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한국 민주주의 공고화에 기여했다. 절차적 민주주의 확립, 독재와 장기 집권 방지라는 목표가 달성됐다. 

이후 1987년 체제 극복, 새로운 목표에 대한 요구가 지속해 제기됐지만 정치권에선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국민들의 정치 혐오, 정치 불신 현상도 심해졌다. ‘한국 정치가 YS·DJ 시절보다 나아졌느냐’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게 됐다. 

이와 관련, 강 교수는 “민주화 직후 지역으로 갈라졌던 정치는 이제는 그 위에 이념적, 세대적, 계층적 균열까지 더해져서 점점 더 사회를 두 집단으로 갈라놓고 있다”(민주주의의 위기와 한국 정치, 2019)고 지적한 바 있다.

- 현재 정당들이 YS·DJ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을까요. 

“아, 많죠.... 많은 사람이 3김이 사라지면 탈지역주의가 이뤄지고 정당정치도 훨씬 잘 되고, 더 나은 형태의 리더십이 이뤄질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나도 그런 기대를 했고요.” 

하지만, 그 기대는 20년 동안 실망으로 변했다. 강 교수는 오늘날 정치에 대해 “3김 때보다 못하다”고 평가하며 요즘 정치 행태와 YS·DJ 정치 행태를 길게 대비했다. 

“정치에서 중요한 건 사회적 갈등을 풀어내는 거잖아요. 그 시절 정치인은 그걸 보여줬죠. 큰 배포, 관용, 정치력이 있었고 길게 보면서 사소한 일은 타협했어요. 제왕적 당 총재, 지역주의의 화신 같은 비판도 있었지만, 그 시대에는 정치가 제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를 이뤄냈고, 그 이후의 정치 질서를 만들어 냈고, 정치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YS·DJ, 경쟁하면서도 서로 인정하고 존중”


“YS나 DJ는 1970년대부터 경쟁한 숙명의 라이벌이었습니다. 스타일이나 지지층도 달랐고요. 관계가 좋을 수는 없겠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협상했습니다. 공개 협상이 어려우면 막후 협상을 통해서라도 문제를 풀어냈고요. ‘정치’가 ‘작동’했던 겁니다.” 

“서로의 요구를 100% 만족시켜 줄 수는 없겠지만 갈등을 풀어내야죠. 그게 정치의 역할인데요. 그런데 요즘에는 선악의 문제로 보죠. 우리는 100% 옳고 저기는 100% 나쁘고. YS와 DJ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경쟁자지만 상대방을 존중해 주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 대립을 풀려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강 교수는 얼마 전 야당 대표의 단식도 언급했다.

“지금은 단식도 요구 조건 자체가 막연하고, 지지자를 향해 어젠다 던지기 식이니까. 타협의 여지도 별로 없고 양쪽 모두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습니다.”

- 선악 구도는 독재 대 반독재 구도에서도 있었던 것 아닌가요.

“지금처럼 극단적인 선악으로 보진 않았습니다. 지금이 최악인 것 같습니다. DJ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막아서 못 갔지만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 문상을 가려 했습니다. YS는 5공 문제 관련해 사법적 처벌이 이뤄지고 나서 임기 끝나기 전에 석방시키고 사면·복권했습니다. 자기식의 정리를 해줬기 때문에 뒤에 취임한 DJ는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DJ는 대통령 되고 전임 대통령 불러서 외교 상황을 전해주기도 하고, 노태우나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전두환도 불러 이야기했습니다. 스케일이 달랐죠. 지금은 좀스럽다고 생각됩니다. 정치가 아주 좁아졌습니다. 작아졌어요.”

- YS나 DJ가 현재 정치 상황에 놓인다면 또 다른 판단을 하지 않았을까요.

“환경 변화도 있겠지만, YS와 DJ가 오랜 정치 경험, 의회 경험을 가졌다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의 대통령이나 야당 대표는 국회의원 경험이 없습니다. 한 사람은 관료 출신이고, 한 사람은 지방자치단체장 경험이 전부고. 의회 안에서 문제를 논의하고 풀어본, 고민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온 것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정치 리더는 지지자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정치 리더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지지자들을 설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건 여러분이 잠시만 참아달라’던가 ‘이 일에는 이런 선택이 맞다’는 것을 설득할 줄 알아야죠. 그런데 지금은 강경 지지층에 휘둘립니다. 지지층이 요구하니 한다는 것은 상당히 비겁한 변명입니다. DJ는 ‘국민보다 반걸음 앞서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참 중요한 표현이죠. 같이 있는 것을 넘어서되, 너무 멀리 가지는 않는 것. ‘반걸음’ 앞서는 것.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되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뒤돌아보는 것. 지금은 그게 없어졌습니다.”

- 지금 공천 물갈이, 외부 인사 영입이 계속 이뤄지는 상황에선 의회 경험을 충분히 가진 지도자를 양성하기 더 어려워질까요. 

“그래도 재선, 3선, 4선 이상 의원들이 있죠. 물론 지금은 자꾸 밖에서 등장합니다. 정치권 밖 TV나 유튜브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드러난 사람들, 선거 때 돼서 주목받은 사람들을 여론조사합니다. 그런데 여론조사는 인기조사 아닌가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어떤 정치를 할지 알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 이미지지. 그럼 그 사람들에게로 관심이 쏠리고 기존에 비판 받았던 사람들은 기회가 사라지게 됩니다. 정당이 자꾸 외부에서 데려오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강 교수는 인터뷰 전에 현실 정치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그러면서 “YS·DJ 생각이 요즘 많이 난다”고 했다. “‘YS·DJ 같으면 이렇게 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면서.

- 환경이 변해서 그런 정치인이 나오기 어려운 걸까요. 아니면 큰 정치를 꿈꾸는 개인이 없는 걸까요. 

“2004년부터 확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386이 들어오고. 그 이전의 것들이 부정되기 시작하고, 타협하는 태도보다 운동권 정치가 제도권 안에 반영되고. 거기서 쌓인 정치 경험이 정치 리더나 대통령으로 가지 못하고, 갈등이 심화해 오늘날까지 왔다고 봅니다. 나는 정치적 경험의 부재가 굉장히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의회’를 문제를 풀어내는 최종적 공간이란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을 안 하고, 걸핏하면 사법부로 갑니다.”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에 대한 평가 너무 박해”


- 마지막으로 YS·DJ에게서 본받아야 할 점을 설명한다면요.

“우리나라에서 정치 지도자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박한 것 같습니다. 완전한 성인이 아닌 이상 평가받기 어려운 것 같아요. 중국의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문화혁명을 해서 국가 시스템 경제를 거의 거덜 냈어요. 그걸 회복하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습니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었고. 20년 이상 사회를 후퇴시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안문 광장 가면 모택동 사진이 걸려있고 화폐에도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 기념물은 세종대왕 말고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모택동의 경우 등소평이 공칠과삼으로 정리했습니다. 모든 정치인이 그렇게 평가받지 않을까요.

우리가 한국 대통령 이야기하면 다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1980년대와 지금의 한국사회는 달라졌습니다. 발전되고 세련되고 훌륭해지고 경제 규모도 커지고. 국가는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다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성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죠? 

YS·DJ의 공과를 꼼꼼히 들여다봐야겠지만, 그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이뤄내는 것, 그 이후 정치 질서를 만들어 낸 것, 정치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해 낸 모습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본 기사는 강원택 교수와의 인터뷰와 논문 “3당 합당과 한국 정당 정치” (2012), “87년 체제 극복의 바람직한 방향” (2014), “87년 헌법의 개헌과정과 시대적 함의” (2017) “민주주의의 위기와 한국 정치” (2019),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연구” (2023)를 참조해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