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은 어떻게 몰락했나? [김자영의 정치여행]
문민정부서 5·18 특별법 제정 및 전·노 구속 단죄 민주당 586세대 ‘민주화 운동’ 주역이란 자만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누적 관객 수 7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 흥행으로 12·12 군사 쿠데타를 비롯한 1980년대 전후 현대정치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을 시작으로 12·12 군사 쿠데타가 벌어지기까지, 전두환 신군부와 이를 막고자 했던 이들의 권력 다툼을 다뤘는데요.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가 벌인 일은 4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치권은 물론 대다수 시민의 공분을 자아내는 듯합니다. <서울의 봄>을 보는 동안 분노로 치솟은 심박수를 측정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샷을 올리는 ‘심박수 챌린지’가 유행하는 등 새로운 문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관객의 분노를 일으키는 중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주인공 전두광, 그리고 그를 도왔던 과거 군 사조직 ‘하나회’가 있었습니다.
정치권에서 국민의힘을 전두광·하나회에 빗대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는 영화를 언급하며 “대한민국은 조직화한 윤석열 특수부 하나회 세력에 무너지고 있다”며 검찰을 하나회에 빗댔습니다. 민주당 3선 김민석 의원은 “지금 시대정신은 국민들은 뭉쳐서 윤석열 검찰 독재를 견제해라. 서울의 봄을 회복하자는 것 아니겠냐”고 전했습니다.
민주당 내엔 운동권 586 세대 다수가 포진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들이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주역이라는 자만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회를 뿌리 뽑고, 5·18 특별법 제정, 전두환·노태우 구속 등 12·12 쿠데타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단죄한 것은 다름 아닌 문민정부였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6·29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 데 구심점 역할을 한 최대 공로자도 YS였다는데 이의를 달기 어렵습니다.
민주화 과정과 이후 5공 청문회, 하나회 척결, 5·18 특별법 제정, 전두환·노태우 구속 등으로 진행된 일련의 사건이 역사적 필연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1980년대 정치 환경이 얼마나 엄혹했는지를 떠올려보면 당시로선 대한민국의 민주화, 전두환의 몰락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983년 YS 23일 단식 투쟁, 무기력한 야권 일깨워
YS 주도 민추협 결성 이어 2·12 총선 신민당 돌풍
전두환, 퇴임후 국가원로자문회의 ‘상왕’ 노렸으나
5공 청문회 이어 문민정부서 12·12반란 주범 구속
12월 12일 군사반란은 1980년 5월 17일 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이어졌고,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3권을 장악합니다. 정치·정당 활동이 금지됐으며 국회는 해산했습니다. 김대중(DJ)은 내란음모 혐의, 김종필(JP)은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됐고, 김영삼(YS)은 가택연금 됐습니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당초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에 반성문을 쓰고 미국으로 망명 갑니다. 김종필도 정치권을 떠나 미국에서 지냈습니다. 반유신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윤보선 전 대통령도 신군부 세력에 항복합니다.
국내에 남아있던 김영삼은 물론 그의 동지들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암흑과도 같은 시기였습니다.
호구지책으로 YS의 오른팔로 불리던 최형우 전 장관의 부인 원영일 여사는 속옷 장사에 나섰습니다. 최기선·문정수·김덕룡 등은 생계를 위해 민속주점을 차렸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을 제조해 자신들의 입맛대로 국회를 운영하려 했기 때문에 신군부에 협조하는 인사들만 정치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서울의 봄은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그때 무기력한 민주인사를 일깨우고 결집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 YS의 23일 단식투쟁(1983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영삼의 상도동계 주도로 민주화추진협의회(1984년)가 결성됩니다. YS가 앞장서 2·12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창당한(1985년) 신당(신민당)은 돌풍을 일으켰고 일련의 과정이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민추협과 신민당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겠다’는 뜻을 담은 대통령 직선제 목표를 설정하고 1000만인 개헌 서명을 추진, 시민들의 염원을 한 곳으로 결집해 전두환 정권을 압박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두환은 6·29 항복을 통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습니다.
12·12 쿠데타 세력의 완전한 처벌은 문민정부에서 이뤄지게 됩니다. 1987년 12월, 노태우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이때 전두환은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취하면서도 안전장치를 마련해 퇴임 이후 ‘상왕’ 노릇을 하려 했다고 전해집니다. 헌법 90조의 ‘국가원로자문회의’를 통해서입니다. 90조 2항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된다’고 명시됐습니다. 그러한 시도에도 불구 전두환은 이후 일가친척 비리 사건으로 원로자문위 의장직을 내려놓고, 1988년 5공 청문회 이후 백담사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과거 청산이 끝나는 듯했으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다른 국면을 맞이합니다. YS는 대통령 취임 11일 만에 전광석화와 같이 하나회 숙청을 시작해 군의 탈정치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문민정부는 1995년 5·18 특별법 제정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위상을 바로잡았고, 전두환·노태우를 12·12 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주범으로 지목해 구속했습니다. 이로써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선례가 만들어졌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앞장서 싸우고, 권력이 생기자 역사를 바로잡는 데 사용했던 YS의 용기가 없었다면 이뤄지기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여야간 대립이 날로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정치권에서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 의문이 든 적 한 번쯤 있을겁니다. 이들의 선택은 과거 정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학습효과 아닐까요. ‘김자영의 정치여행’은 현 정치 상황을 75년간의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를 비춰 해석해 봤습니다. 다음주 금요일에 찾아 뵙겠습니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