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는 패배를 직감했던 걸까 [김나영의 오프더레코드]
임종윤 가처분 기각된 26일 한미사이언스 주가 급락 송영숙 모녀 주총 불참…이우현 OCI 회장도 자리 떠 개회 및 표결 지연…성난 주주들, ‘이유가 뭐냐’ 재촉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김나영 기자]
취재원과 대화하다 보면 ‘오프더레코드(Off the Record)’라는 말이 자주 오간다. ‘보도에서 제외해야 할 사항’이란 뜻의 이 마법 같은 단어는 입에 오르는 순간 업계의 비밀 이야기들을 터트린다. 이 코너는 기자가 독자에게 들려주는 ‘오프더레코드’다. 정제된 글로 꾸민 기사 한 편에 싣지 않았던 현장 뒷이야기, 행간 사이 숨긴 경험담을 은밀하고 경쾌하게 풀어내려 한다.
‘아, 왠지 한미그룹이 밀리는 것 같은데.’
지난 28일, 경영권을 놓고 한바탕 표 대결을 치른 한미그룹 주주총회에서 개표가 5시간 넘게 이어지자 기자는 직감했다. 임종윤·종훈 형제가 승기를 들 것 같다고.
생각해보면 이 반전 드라마에서 복선은 계속 있었다. 주총이 있기 이틀 전인 26일, 형제가 사측에 제기한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이 기각되자 한미그룹의 주가가 급락했다. 이는 중요한 시그널이었다. 형제와 모녀 양측의 우호지분이 비슷해 소액주주들의 표심이 판세를 가를 것으로 점쳐졌기 때문이다. 이날 한미사이언스(한미그룹)는 전일 대비 3200원(7.30%) 하락한 4만650원에 거래를 마감했다. 장 중엔 3만9350원까지 떨어졌다.
주총 당일엔 형제 측은 참석한 반면 송영숙 회장 모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표면적인 불참 사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이우현 OCI 회장은 참석했지만, 그 마저도 주총 중 자리를 떴다.
무엇보다 지연에 지연을 거듭하는 상황이 한미의 패조를 짐작케 했다. 주총은 시작부터 삐그덕댔는데, 당초 오전 9시에 개회 예정이었던 행사가 3시간 30분 늦춰진 오후 12시 30분에 시작했다. 현장에 참석한 주주들은 “마냥 기다리라는 거냐”며 화내거나, 지연 상황을 참지 못 하고 떠나기도 했다. 한미그룹 관계자는 위임장 및 의결권 집계가 늦어지고 있다며 연신 사과했다.
오후까지 하염없이 이어지는 주총에 모두가 지쳐갔다. 몇몇 기자들은 “그냥 밥 먹으러 가자”며 자리를 뜨기도 했다. 기자 또한 언제 표결이 날지 몰라 사측이 준비한 과자로 식사를 때우며 6시간 동안 프레스룸을 지켰다. 중계를 통해 “배가 고픈 주주들께서는 뒤편에 마련된 간식을 드시라”는 한미그룹 측의 안내가 들렸을 땐, 120석의 기자실엔 실소가 터져나왔다.
오후 2시에 다다랐을 때 한미 측은 “15분 내 표결하겠다”고 알렸다. 이에 한 주총 참석자는 “(주총에) 들어오기 전 집계 현황을 봤는데, 중복 건에 대해선 이미 정리를 하고 들어왔다”며 “현장과 위임 여부를 기입할 수 있어 바로 비교가 가능한데 15분이 걸리는 이유가 뭐냐”고 의문을 표했다.
한미 측은 “분명히 15분 정도 걸린다고 말씀드렸다”면서 “중복된 건은 다시 확인해 최종적으로 하나만 카운트 해야 한다”고 단호히 말했다.
사측에 따르면 이날 제출된 위임장은 1000건에 이른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15분이 걸린댔던 표결이 또 다시 1시간 가량 지연됐을 땐 승리의 무게추가 형제 측으로 기울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형제의 승리였다. 아니, 소액주주들의 승리였다고 해야 할까. 임종윤 전 사장은 이날 주총을 마치고 한층 홀가분해진 목소리로 “주주는 주인”이라며 “주주들이 법원도 이기고, 연금도 이기고 다 이겼다”고 했다.
이사 선임 의안을 발표할 때 울분에 가득 차 한탄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였다. 한미그룹은 이사 후보자들을 설명하면서 형제 측 관계자들은 소개에서 제외했다. 신 전무가 형제 측에 “후보자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주주제안 쪽 (후보자 설명)은 준비를 못 했다”고 하자, 임 전 사장이 “한미의 수준이 참담하다”며 현장에서 ‘급조’해 후보자들을 소개했다.
한미그룹의 경영권 분쟁은 일단락됐지만 형제들에게 놓인 과제는 산더미다. OCI 통합이 무산되면서 5400억 원에 이르는 ‘상속세 폭탄’의 재원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후계자로 공식 지정된 임주현 부회장과의 관계도 해결해야 할 문제다. 무엇보다 모녀 측에 섰던 주주들 역시 ‘한미의 주인’ 중 일부인 만큼, 이들의 우려를 하루빨리 잠재울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터다.